소설리스트

환생천마-111화 (11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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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향기 속으로(4)

노인은 여전히 그 언덕에 서 있었다.

“흑수검이 죽었습니다.”

수하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희생이 더 큽니다. 육십여 명이 죽고 삼십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놈들은?”

“피해가 미미합니다.”

노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궁단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애초에 너희 놈들을 포섭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섭했어야 했군.”

사내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이지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게다가 수장인 흑수검까지 당할 줄은 더욱 몰랐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흑수검은 종천락에게 죽었나?”

“아닙니다.”

“아니라고?”

“종천락을 상대하는 도중에 다른 자의 손에 목이 잘렸습니다.”

“멍청한!”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자가 누군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천궁단 놈들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 놈들은 어디에 있나?”

“검향림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 생사루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노인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을 향했다.

“할 수 없군. 그를 투입시키게.”

노인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 결정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물러가자 노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결국 이렇게 추잡스럽게 마무리되는군.”

* * *

오랜만에 생사루를 다시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혈천신교의 성지는 모두 세 곳,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대단히 성스러운 곳처럼 들리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성지란 이름으로 구축된 전략적 요충지였다.

각 성지마다 특징이 있었는데 이곳 검향림의 성지는 진법과 기관 등과 관련해서 학문적인 연구가 이뤄지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검마(劍魔)와 혈투를 벌였다. 검마는 이곳 생사루의 주인이었고, 성지를 지키는 수호마인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공터에서 그와 삼백구십육 초를 싸워서 이겼다. 고수들간에 사백 여초는 그리 길지 않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백 여초 동안에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후일 그 싸움을 돌이켜 보고서야 나는 그 싸움을 왜 그렇게까지 고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욕심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고, 마교주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검술을 지녔다는 검마를 최대한 빨리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백 초 내로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마교의 검마도 내게는 백초지적밖에 되지 않는다는 명성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 욕심이 나를 죽일 뻔 했고, 더 긴 싸움이 되게 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백 초 안에 그를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싸움을 계기로 나는 절대 상대를 빨리 이기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몇 초식만에 이기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다음으론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제대로 얻은 것이다.

그 검마와 싸웠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천궁단의 무인 하나가 걸어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문이 열려 있습니다.”

무인들이 들어가서 내부를 살폈다.

잠시 후 들어갔던 무인들이 나왔다.

“텅 비었습니다.”

종천락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

‘접선하려던 자는 이미 놈들에게 끌려가 버린 것 같소.’

이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본능이 말하고 있겠지. 그게 아니라고.

나는 그의 혼란을 이해했다. 평생을 무림맹과 강호를 위해 충성을 바쳐왔던 그다. 그런데 맹주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일행들이 모두 다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먼지가 쌓인 것으로 볼 때,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종천락이 드디어 마음을 돌려먹었다.

“잠시 쉬었다 출발하겠다.”

과연 맹으로 되돌아 가야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경계를 서는 무인들을 제외하고 다들 여기 저기 흩어져 앉아서 쉬었다. 연속된 싸움으로 다들 지쳐있었다.

갈사량 역시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가장 많이 지쳤으리라.

“잠시 여기 기대서 쉬시지요.”

그를 한쪽 벽으로 안내한 후 바닥의 먼지를 치워내고 옷가지를 깔아주었다.

“고맙네.”

“별말씀을요.”

“자넨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니 생기가 도는 것 같네.”

“그래 보입니까?”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맹주님도 자네 같았지. 다들 힘들고 지치고, 무서워서 온 몸이 덜덜 떨릴 때에 맹주님은 오히려 힘이 펄펄 나셨네. 그 모습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지.”

내가 그랬었더냐?

오랜 세월을 전쟁을 하다 보니, 싸움터의 생활이 몸에 익어버린 것이리라.

하긴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은 오히려 허전함을 느꼈다. 물론 그런 허전함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전쟁광이라 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지금이라면? 아마 광두에게 그런 감정을 솔직히 말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드니, 어느새 갈사량이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상자들의 상처를 다시 한 번 살펴주었다. 워낙 좋은 약을 썼기에 상세가 좋았다. 동료를 보살피던 천궁단 무인들이 내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나 역시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다보니 검마를 이긴 후 이곳에 올라가던 기억이 난다. 수하들이 이곳을 수색하는 사이, 나는 맨 꼭대기 층에 올라갔었다.

꼭대기 방에 들어가니 그 날이 생생히 기억났다. 검마를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왜 사백 초나 걸렸을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혀서 저 창문에 서서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당시의 나는 천하제일인에 무림맹주였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인간이 저지르는 한심함은 그 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나는 내 과거를 통해 깨닫

는다.

잠시 창밖을 쳐다보다 이번에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때에는 상념에 빠져 방안을 제대로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 옆에 놓인 검 받침대는 겉으로 봐선 평범해 보였지만 상당히 실력이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이었다. 침상이나 차를 마시는 탁자도 마찬가지였다.

별 다른 물건이 없어서 그냥 다락방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제 보니 이곳이 검마의 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방이 달라보였다. 정갈하면서도 깔끔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띄었다.

옷장 손잡이에 작은 자물쇠가 하나 걸려 있었다. 옷장을 잠근 것이 아니라 그냥 손잡이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는 자물쇠였다.

자물쇠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톱니바퀴로 된 장치를 돌려서 글자를 조합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끼릭, 끼리릭.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글자가 정확히 맞아야 열리는 자물쇠인 모양이었다. 글자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조합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차피 장식용으로 걸려 있는 것이라서 굳이 암어를 맞출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나가려던 내가 다시 돌아섰다.

문득 톱니에 눈에 띄는 글자가 있었다.

귀(鬼), 팔(八).

우연히 눈에 들어온 두 글자를 보는 순간,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귀마팔식(鬼魔八式).

검마의 마지막 초식 이름이었다. 톱니를 돌려보니 조합할 수 있는 글자 중에 나머지 글자도 있었다.

귀마팔식이란 글자를 딱 맞추는 순간.

철컹.

옷장 반대쪽 벽이 열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옷장 자물쇠를 맞췄는데 반대쪽 벽이 열리다니? 이런 대단한 장치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곳은 아주 작은 방이었다. 거기에 작은 서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한 권의 두꺼운 책자가 놓여 있었다.

귀문둔서(鬼門遁書).

펼쳐보니 이곳에서 연구하던 진법에 관한 책이었다.

“아, 이것이 여기에 숨겨져 있었구나.”

과거에는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나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나는 검마를 일찍 죽이지 못한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수하들은 내 눈치를 보았고, 당연히 내가 머물고 있던 이곳 칠층에 대한 수색은 꼼꼼히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제대로 이뤄졌다 하더라도 이 비밀방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검마의 마지막 초식이 귀마팔식이란 것은 죽기 전에 그가 했던 말로 나만이 알았던 것이다.

수색하던 무인이 어찌 그 초식을 알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옷장은 잠겨 있지 않았고, 이 자물쇠는  장식품처럼 걸려 있었기에 한 두 번 돌려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귀문둔서를 내려다보는 내 눈빛이 흔들렸다.

진법에 대한 혈천신교의 정수가 깃든 책자다. 앞으로의 대업에 큰 도움이 될 책이었다.

내가 책을 품에 잘 갈무리한 후 다시 자물쇠를 아무렇게나 돌렸다.

그러자 비밀방 문이 닫혔다.

방을 나와서 일층으로 내려갔다.

천천히 내려가는데 나는 이상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뭔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과연 일층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 옆, 한 사내가 정신을 잃은 천궁단 무인의 바지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놈은 남색(男色)을 즐기는 자였다. 게다가 그는 아주 추하게 생긴 사내였다. 정말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나지만, 이 사내를 두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추하다란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바지를 벗기던 손길을 멈추고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어? 너는 왜 멀쩡하지?”

일층 공간 자체에 뭔가가 확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놈이 살포한 것은 살상용 독이 아니라 정신을 잃게 하는 독이었다. 아주 효력이 강한 독인데다가 모두가 지쳐 있어서 중독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내공이 심후한 자로군.”

말을 마친 그가 후욱 하고 바람을 불었다. 아마 입에서 뭔가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내공이 심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만독불침지체가 되었기에 그 어떤 독이나 미약에도 중독되지 않는 것이다.

“저들을 깨워라.”

내 말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강호에서 나를 독미랑(毒美郞)이라 부른다.”

독미랑.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독에 일가견이 있는 독공의 고수로 미혼약을 살포해서 남색을 즐기는 엽기적인 놈이었다. 미랑이라 이름 지은 것은 자기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일 것이다.

난 강호를 일통한 후에 독의 사용에 제한을 두었다. 사파와 마교와의 전쟁을 통해, 그 끝도 없던 독살 시도가 너무나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대부분 독을 사용하는 문파들은 사파와 흑도의 맥을 잇는 문파였다. 그들이 항의했지만 일축했다. 정파가 강호를 통일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그럼 나는 누군지 아느냐?”

“누구지? 이렇게 내공이 심후한 애송이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유가 있었다. 곧 내가 쓰러질 것이란 완벽한 믿음이 있었다.

“이딴 지저분한 독 쓰지 말라고 정한 사람.”

“뭐?”

내 신형이 계단에서 붕 날았다.

퍼억!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간 내 발길질에 독미랑의 턱이 돌아갔다.

한 바퀴 돌아 바닥에 처박혔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

그가 이번에는 맹독을 살포하려 했다.

탁탁.

하지만 내가 한 발 먼저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놈의 품 안을 뒤져서 독낭(毒囊)을 찾았다. 안에 이십여 개의 크고 작은 병이 들어 있었다.

“넌 절대 해독제가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다.”

내가 하나둘씩 병마개를 열어서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내가 코를 킁킁대는 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너 설마 만독…….”

그때 내가 맡고 있던 병을 코앞으로 내밀자 그가 기겁했다.

놈이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숨을 참았다. 자신의 독이지만 미리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절명하는 그런 지독한 독이었던 것이다.

확인하지 못하면 모를까, 나는 독과 독이 아닌 것을 구분해 냈다. 내 몸이 구분했고 놈의 반응이 구분했다.

결국 놈은 해독제가 어떤 것인지를 실토했다. 자신의 독 중에서 가장 지독한 독을 먹이려고 하니, 더는 견디지 못한 것이다.

독이 아닌 것 중에서 골랐기에 나는 걱정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층에 살포했다. 아, 물론 벗겨진 바지는 다시 입혀주었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신을 다 차리기 전에 독미랑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처음부터 독을 살포했으면 다 죽었을 것이다!”

“더러운 짓을 하려고 살려뒀지. 결국은 다 죽였을 것 아니냐?”

그 말에는 달리 변명을 하지 못했다.

“어쨌든 해약을 알려줬으니…….”

푸욱!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검에 목을 베어버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 모두들 정신을 차렸다.

종천락이 놀라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칠층에 있다가 내려오는데 저 놈의 독을 당한 후였습니다. 놈을 제압해서 협박한 후, 해독제를 찾아낸 것입니다.”

“또 자네가 우릴 구했군.”

“마침 칠층에 있어서…… 운이 좋았습니다.”

다들 나를 경탄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내 말에 종천락이 갈사량에게 물었다.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맹으로 돌아가야 하오?”

만약 맹주에게 배신당한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종천락은 이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연달아 그들의 목숨을 구하자, 이제 우리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이미 생각을 마친 것인지, 갈사량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린 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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