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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찾아서(3)
나를 비롯한 합격자들은 십여 일 동안 외원에서 대기하며 기본 교육을 받았다.
내원으로 들어가기 전, 우릴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출신과 배경, 성격까지. 신원이 확실해야 내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기들과는 적당히 친해졌다. 오래 볼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 번쯤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십여 일이 지나고 드디어 우린 정의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원에는 무인들의 숙소가 여러 곳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정의각 무인들을 위한 곳도 따로 있었다.
혼인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 숙소에서 기거했다.
나도 방을 하나 배정받았다. 방에 있는 것이라곤 침상 하나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작은 탁자 하나, 옷가지를 넣을 수 있는 옷장이 전부였다. 다행히 외원의 풍경이 보이는 창이 있어서 그리 갑갑하진 않았다.
얼마나 있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잘 부탁한다.”
다음 날, 나는 배정받은 곳 앞에 서 있었다.
작전오조(作戰五組).
작은 글자가 문에 붙어 있었다.
이곳 정의각은 각각의 군사들이 자신만의 조를 이끌었다.
과연 누구 밑으로 오게 된 것일까?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순식간에 방에 여섯 명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칸막이가 있는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는 이들이 넷, 하나는 벽에 붙은 커다란 지도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누군가 내 정면의 큰 창을 바라보며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 등을 보는 순간,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바로 갈사량이었던 것이다. 면접에서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 것이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부로 정의각 작전오조에 배치를 명받은 신입 군사 벽리단입니다!”
내 우렁찬 목소리에 지켜보던 이들이 웃었다. 자신들도 처음 들어올 때 저랬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때 갈사량이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자넨 앞으로 꿈이 뭔가?”
아마 그대가 들으면 깜짝 놀랄 꿈일 것이다.
자네와 함께 무림맹주와 그 배후세력을 싹 쓸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로 첫 날부터 화젯거리의 중심에 설 미친놈이 될 생각은 없었으니.
“좋은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군사란 어떤 군사지?”
“현장의 무인들을 잘 이끌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군사입니다.”
“몸을 사리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나?”
“적어도 동료들을 소모품 취급하고 싶진 않습니다.”
“능력 좋은 군사가 되긴 어렵겠군.”
“전 능력 있는 군사도 되고 싶습니다.”
“욕심 많은 친구군.”
잠시 창밖을 응시하던 갈사량이 내 쪽으로 돌아섰다.
“반갑네. 앞으로 잘 해보세.”
“네. 부디 잘 이끌어 주십시오!”
나는 갈사량의 수하로 배정되었다. 바라마지 않던 좋은 시작이었다.
내가 들어오면서 작전오조는 이제 일곱 명이 되었다.
밥을 먹으며 오조의 선배들에게 갈사량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다섯 명쯤 모이면 그 중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수다쟁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처음에는 사마천에게 온갖 구박을 받다가 근래 그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좁은 방에서 갇혀 지냈는데 이제 하나의 작전조를 이끌게 되었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작전오조의 주임무는 무명대협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맙소사. 갈사량이 나를 추적하는 일을 하고 있었구나.
놀라우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근래 강호의 흐름에서 무명대협은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볼 수 있었다. 그 일을 맡았다는 것 자체가 갈사량이 제대로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고 있다는 뜻
이기도 했다.
작전오조에 들어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잘 적응하고 있었다. 맡은 일은 열심히 처리했고, 대인관계도 무난하게 해내고 있었다.
못난 심술을 조직의 기강으로 포장해서 텃새를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갈사량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었다. 아예 아래에 안 두면 안 두지, 지저분한 성격의 수하를 데리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무명대협의 행방이 너무나 묘연해서 요즘에는 다른 임무를 주로 했다.
부패무인 감찰.
그와 관련한 최근의 여러 임무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갈사량이 자신의 입지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음을.
내가 들어온 지 육 일이 지났을 때 갈사량이 나를 불렀다.
“어떤가? 일은 할 만한가?”
“네, 모두 잘 해주셔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갈사량이 일거리를 하나 맡겼다.
“최대한 빨리 조사해서 보고서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임무처럼 보였지만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우선은 그에게 능력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갈사량이 맡긴 일은 자료를 찾아서 요약 정리하는 일이었다. 자료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다른 동기였다면 이 엄청난 작업량에 기가 질려버렸을 것이다.
우선 빠르게 자료부터 찾았다. 자료는 정의각의 서고와 자료실에 흩어져 있었다.
일단 나는 눈이 좋았고, 몸이 빨랐다. 순식간에 여기저기를 오가며 자료를 찾았다.
책상에 한 가득 자료가 쌓였다. 그것을 빠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난 두 달간 글을 읽는데 익숙해진 나였다.
다음에 필요한 것은 집중력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자료를 분석했다.
다음날 아침, 갈사량의 책상위에 보고서가 올라갔다.
보고서를 확인한 갈사량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빨리해도 사흘은 걸릴 일이었다. 한데 하루 만에 일이 끝난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보고서 내용을 확인했다. 많이 부족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호, 제법인데?”
갈사량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정의각 내부에 믿을 수 있는 수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전오조의 수하들도 다들 괜찮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자신의 수족으로 삼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은 한물 가버린 수장이다. 어떻게 보면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고 남은 구질구질한 수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밝히지 않는 한 기존의 수하들을 다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인원을 뽑았고, 마침 눈에 띄는 인물이 들어온 것이다. 능력을 시험해볼 요량으로 일을 맡겼는데, 생각보다 잘 처리한 것이다.
갈사량은 곧장 벽리단을 앞으로 불렀다.
“이것들을 혼자 처리한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제가 손발이 느리진 않습니다.”
“자, 이것도 처리하게.”
갈사량이 또 다른 일거리를 맡겼다. 앞서 맡겼던 일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한데 자네, 요령이 없군.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하면 일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을 모르나?”
그러자 벽리단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신 군사님의 신임도 늘어나겠지요.”
어제보다 더 많은 일거리였는데,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다시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이 놈 봐라?’
일처리 속도에 갈사량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전성기 시절에 이렇게 일했었던 것 같았다. 그땐 척하면 척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늘 올린 보고서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은 자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
갈사량이 보고서의 허점을 짚어주었다.
다 듣고 난 벽리단이 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따지는 것도 아니었고, 잘 보이려고 괜히 던지는 질문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분명 의문을 가져볼만한 그런 질문이었다.
갈사량이 기분 좋은 것은 그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었단 것이었다. 보통 뭔가를 지적하면 수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던지는 질문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벽리단의 질문은 그것과 달랐다. 정말 이 사안에 대해 궁금해 하고, 그 개선점을 알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놈, 물건이군.’
* * *
그날 밤 갈사량이 술을 사주었다.
“정식으로 크게 환영연회를 열어주지 못해 미안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마교의 준동으로 근래 무림맹 상황이 경직되어 있어서.”
“아닙니다. 이렇게 반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갈사량과 술자리를 가져본 적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술에 취해 속내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내게 똑바른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나머지 반은 권위를 중요시한 내 탓이겠지.
몇 잔의 술이 오갔다. 뜻밖에 갈사량은 술을 곧잘 마셨다.
“정말 마교가 부활한 것일까요?”
“왜? 그 때문에 맹에 들어와 놓고서도 믿기지 않는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혈천신교는 전대 맹주께서 완전히 뿌리 뽑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교놈들은 잡초 같은 놈이지.”
이번 일과 관련해서 그의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지만, 이제 갓 들어온 내게 내심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외람되지만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하게.”
“전대 맹주 시절 총군사를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왜 맹을 떠나지 않으신 겁니까?”
갈사량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차분히 그의 시선을 받았기에 이 질문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진 않았다.
“평생을 몸담았던 곳이니까 쉽게 떠나게 되지 않더군.”
갈사량은 복수를 위해서라는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진심으로 그와 가까워진 것이리라.
“사실 이번에 지원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고민을?”
“천도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서입니다.”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그와 관련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려 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울컥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고 싶은 욕망에 빠진다.
내가 천하진이다. 가자, 사량아.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하늘은 나를 벽리단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벽리단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천하진으로 살아나게 해주었겠지.
“우린 우리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네.”
“네, 군사님.”
가볍게 한 잔으로 시작한 술자리는 꽤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럼 내일 보세.”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호위 하나 없이 홀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 * *
다시 며칠이 지났다.
나는 이제 완전히 정의각 생활에 적응했다. 사람들과 친해졌고 내가 맡은 일은 실수 없이 처리했다.
나는 서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마음이 앞서서 잘 되는 일도 분명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관계만큼은 아니다.
일에 열중하고 있는 그곳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 무례한 방문의 주인공은 총군사 사마천이었다.
갈사량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했다.
그는 언제나 기척도 없이 이렇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이 무례한 행동으로 자신이 갈사량과, 그리고 우리들의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와서 갈사량의 자리에 앉았다.
갈사량은 처음에는 저 역겨운 행동이 너무나 싫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않았다.
갈사량은 이렇게 생각했다. 개는 짖고, 흙탕물은 튀고, 똥에는 냄새가 나고, 사마천은 저런 놈이라고.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네.”
“무슨 명령입니까?”
“마교와 관련된 일이네.”
마교가 언급되자 갈사량은 물론이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내용은 극비네. 천궁단이 움직일 것이고 본각이 그 임무를 지원해야 하네.”
“현장지원 명령입니까?”
“그렇다네.”
원래 정의각은 후방 지원을 하는 곳이다. 하지만 가끔 큰 작전이 있으면 군사가 직접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중요한 작전이니 자네가 직접 나가주게.”
“알겠습니다.”
사마천이 방을 나가자 갈사량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극비임무는 주로 출발 당일, 혹은 도착해서 작전이 이뤄질 시점에 알게 되는 임무였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란 의미다.
‘한데 왜 하필 천궁단이지?’
무림맹 중요삼단은 광월단, 철기단, 천궁단이었다. 그 중 주철룡이 이끄는 광월단이 앞장서서 마봉기를 맹주로 세웠다. 그 과정에서 철기단이 주철룡을 따랐다.
마봉기가 맹주가 되는 것을 반대한 유일한 조직이 천궁단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한 옆에서 대화를 모두 들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이번 임무에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제 무공이 군사님의 안전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갈사량이 느꼈듯 나 역시 이번 임무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반드시 갈사량을 따라붙어야 할 일이었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갈사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