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106화 (106/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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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찾아서(2)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강호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고, 전쟁에서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병법서, 지리, 조직운영, 첩보, 정보관리는 물론이고 군사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예술과 문학, 철학, 의술에 관한 책도 읽었다. 심지어 건축과

기후에 관한 책도 읽었다.

책에만 매진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내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 대학자가 나오고 있어요.”

어머니의 농담에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기만 했다.

어쨌든 뒤늦은 내 공부에 두 분은 만족했다. 무식한 검이 더 빨리 죽는다는 것이 공통된 지론이었으니까.

공부를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다.

벌써 한쪽 벽에는 내가 읽은 책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정의각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작한 공부였는데, 이제는 순수하게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주신 목록대로 다 사왔습니다.”

광두가 한 가득 책을 짊어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지난번에 가져온 책이 한 옆에 다 읽은 책 무더기에 쌓여 있는 것을 보며 광두가 놀라 소리쳤다.

“벌써 다 읽으시다니? 거짓말이죠? 그냥 대충 넘겨버리신 거죠?”

“맞아.”

“순순히 인정하시는 것을 보니 다 읽으신 것 맞네.”

“당연히.”

“대체 어떻게 책을 이렇게 빨리 읽죠? 다 이해가 되세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고. 책을 읽으면서 완벽하게 다 이해해야지 하는 강박관념은 버려야지.”

“아아아!”

너무 큰 감탄성에 내가 고개를 들어 광두를 쳐다보았다.

“그 말씀이 확 와 닿았어요. 초식을 펼칠 때, 완벽하게 펼쳐야 하는 강박관념을 버…….”

“버리면 죽어. 완벽하게 펼쳐야 해.”

“넵.”

빠른 태세전환에 내가 피식 웃었고 광두도 따라 웃었다.

“도순이랑 잘 된다더니 좋아 보이네.”

“방에서 책만 읽으시는 분이 어찌 그리 바깥일을 잘 아신대요?”

“책 속에도 세상이 있거든.”

“죄송하지만 진짜 세상은 저 문 밖에 있답니다! 도순이도 밖에 있고요.”

“하하하.”

그래, 맞다. 난 그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여기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새삼 놀랐던 점 하나.

뜻밖에 무공의 고수들이 무공과 관련 없는 책들을 많이 썼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북해신창(北海神槍) 두양수(杜洋手)가 서화와 관련한 책을 냈다거나, 서독편(西毒鞭) 정충(鄭沖)이 여행기를 남겼다거나. 특히 정충은 책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을 것 같지도 않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런 책을?’

정말이지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더구나 내가 알던 사람이 쓴 책을 볼 때면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어쩌면 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에서 온갖 사무를 처리하다보면 이 강호에 대해서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온갖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사람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번에 공부하면서 느꼈다.

나는 정말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살았고, 정작 강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음을. 심지어 나와 얼굴을 맞대며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삶을 후회하진 않는다. 내가 그렇게 살았기에 강호는 평화로웠으니까. 아니라면 저들이 책 쓸 시간이라도 있었겠는가?

광두가 다섯 번 정도 더 책을 실어다 날랐을 때, 창밖에 보이는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드디어 삼월이 된 것이다.

비록 책읽기에 빠져든 지 두 달에 불과했지만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이 공부가 무공에도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무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는 내게 영향을 미쳤다.

책을 읽으니 나란 사람이 변했다. 내가 변하니까 내가 펼치는 무공도 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변화는 미세했지만 의미있는 변화였다.

벽리단으로 새로 태어난 이후, 몇 차례 막연히 느껴왔던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으니까.

내가 새로운 삶을 살 때, 새로운 무공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변해야 무공이 변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 * *

시험을 위해 산동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송화린을 만났다.

“내일 다시 무한으로 간다고?”

“당분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섭섭하네.”

담담한 어조였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정의각 입각 시험에 떨어지면 곧바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요즘 글공부에 심취해있다면서?”

“여기까지 소문이 났어?”

“산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알잖아? 산동이 넓은 듯해도 엄청 좁은 곳이잖아?”

그건 강호 전체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은 더 없이 넓고 광활했지만, 때론 한 몸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다들 미쳤다고 하겠군.”

“그럴 리가. 산동에서의 네 평판은 완전히 달라졌어. 이제 이곳에서 제일 유망한 후기지수를 뽑으라면 너를 뽑을 걸?”

역시 소검대의 활약 때문이었다. 내 나이 또래 후기지수 중에 그런 큰 활동을 하는 이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긍정적인 소문이 났다니, 나쁠 것은 없다. 어차피 이 산동부터 장악할 생각이니까.

“혹시 이번에 무한에 가는 것, 글공부와 관계가 있어?”

그녀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갈사량을 얻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해줄 순 없었다.

“가끔 가서 소검대 애들 좀 살펴봐 줘.”

“내가?”

“우리가 함께 만든 검대잖아?”

그녀가 주저하는 것은 명분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네 실력이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어.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확실해. 내 말 믿어.”

고선화낭자의 진화검술은 소검대 무인들의 무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굳이 견줄만한 무공을 찾자면 광두가 익힌 남해칠식 정도였다.

“무공은 연무장에 혼자 틀어박혀서 익히면 금방 한계에 부딪쳐. 사람과 어울려야 더 빨리 늘고 벽을 쉽게 넘을 수 있지.”

공감되는 바가 있었는지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화검술 자체가 고독감이 느껴지는 무공이라 내 말이 더욱 와 닿았을 것이다.

“알았어. 한 번씩 들를게.”

“고맙다. 그럼 나 다녀올게.”

“조심해.”

송가장을 나선 나는 곧장 무한으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으로의 대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구하러 가는 길이다.

과연 천하진이 아닌 벽리단으로 갈사량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을까?

* * *

무림맹 본단이 있는 무한에는 입맹시험을 치르러 온 이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중원에서 몰려든 지원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온갖 인간 군상들도 모여들었다.

중년사내가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열 냥만 내면 합격비법을 알려주겠네.”

벌써 이 날파리 같은 인간들이 달라붙은 게 몇 명 째인지 모를 정도였다.

“일 없소.”

“푼 돈 아끼다가 큰 걸 잃어!”

기어코 악담을 하고 가는 사내부터 자신이 합격시킨 무인만 스무 명이 넘는다는 허풍쟁이까지. 온갖 파락호들이 넘쳐났다.

다른 조직들의 시험은 모두 연무장에서 치러졌는데, 정의각의 시험만은 실내에서 치러졌다.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나는 반 갑자의 내공만 남긴 채 나머지 내공을 숨겼다. 기도를 감추고 내공을 숨기는 것은 아주 고난이도의 일이었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나보다 더 고수가 내 몸을 살피면 내공을 숨긴 것을 알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는 누구도 알아낼 수 없다.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시험관을 기다리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무림맹 입맹 시험을 치르는 날이 올 줄이야?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과연 대부분이 학사차림의 사내들이었다. 다들 똑똑해 보여서 내심 합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일차 시험은 필기시험으로 이뤄졌다. 기본 지식을 묻는 문제였다. 예상했던 문제들이 주로 나왔다. 어렵지 않게 치렀다.

시험 결과는 오후에 나왔고, 다행히 합격이었다. 응시했던 이들의 삼분지 이 이상이 떨어졌다.

짜식들, 무섭도록 똑똑해 보였는데. 다들 허당들이었군.

무공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인정받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합격자는 내일 이차 시험을 치르러 오도록!”

다음날 이차 시험을 치르러 갔다.

이번에는 문제가 더 어려웠다. 단순히 답을 찾는 일차에 비해 이번에는 자기의 의견까지 개진해야 했다.

다행히 내가 잘 아는 분야가 문제로 나왔다. 전쟁과 관련해 여러 전략과 전술에 관한 문제들이 나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제들이었다.

특정 지형을 주고, 아군의 숫자는 몇, 적군의 숫자는 몇. 방어를 위해선 어떻게 진을 형성해야 하는가? 공격을 위해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침투해야 하는가?

적에 침투한 세작이 이러저러한 기밀을 알고 있다. 그가 적들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를 구하려면 반드시 몇 명의 희생자가 나오는데 과연 희생을 감수하고서 그를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었다.

싸움에 관해서야 이 문제를 출제한, 혹은 채점할 사람들보다 내가 전문가였으니까. 기존의 내 지식과 이번에 읽은 책에서의 배움을 더해 답안을 작성했다.

다들 난색을 표했는데 오히려 난 그리 어렵지 않게 시험을 치렀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두 시진쯤 후에 다시 시험관이 모습을 보였다.

그가 합격자를 발표했다. 다행히 내 이름도 있었는데 시험관이 내 이름을 호명했을 때, 유심히 나를 살피는 것을 보았다.

내가 쓴 답에 문제가 있었을까?

어쨌든 이번 시험에서 대부분이 다 떨어졌다.

다음 날 마지막 면접시험이 있었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마음에 격정이 일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면접관이 갈사량이었던 것이다.

왜 그가 나와 있는 것일까?

여러 군사가 면접을 보러 나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이번 일을 그가 맡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나름 정의각 내에서 잘 버티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처음부터 이렇게 그와 마주친다면, 차라리 잘 됐다.

차분히 걸어서 그 앞에 앉았다.

문득 검제가 있던 방에 들어가서 그 앞에 앉았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부터의 싸움은 그 싸움보다 열 배는 더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갈사량과의 관계는 지금부터다. 오히려 합격한 후보다 지금이 더 중요하다. 그의 눈에 띄어서 그의 곁으로 가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갈사량은 튀는 수하를 싫어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눈에 들어야 한다.

“벽리단, 산동 벽씨검문의 후계자군.”

“네, 그렇습니다.”

“벽씨검문이라면 산동의 전통적인 무가인데, 어찌 정의각에 지원을 한 것인가?”

“어려서부터 무림맹 군사에 뜻이 있었습니다.”

잠시 나를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앞에 놓인 서류로 향했다.”

“이차 시험에서 최고성적을 냈군.”

“아, 그렇습니까? 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시험관이 나를 유심히 봤군.

갈사량이 내가 치룬 시험지의 답안을 읽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힐끗 보고 말 것 같았던 갈사량의 시선이 시험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 답안지에서 천하진의 향기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든 갈사량의 태도가 달라졌다. 앞서 사무적인 느낌에서 좀 더 관심이 깊어진 눈빛을 보인 것이다.

“자네 무공실력은 어떤가?”

“정의각에서는 별로 필요한 일이 없겠지만, 무공은 자신 있습니다.”

“보여줄 수 있나?”

“네.”

자신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려도 되는 종이를 한 장 얻어서 허공으로 던졌다.

쉭쉭!

종이는 순식간에 네 조각이 되었고, 그것이 겹쳐지며 검 날 위에 놓였다.

쉭쉭쉭쉭쉭!

다시 검 날 위의 종이를 허공으로 날려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다. 잘게 잘린 종이가 눈처럼 휘날렸다.

“오! 훌륭하군!”

갈사량이 감탄했다. 비록 지닌 무공은 없었지만 평생을 내 옆에서 온갖 무인들을 봐온 그였다. 검을 잡는 모습만 봐도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백월검법의 대성을 이뤘을 때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나, 혹은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최고의 실력이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이곳에 넘쳐날 것이다. 당장 갈사량만 해도 누구보다 머리가 좋았으니까.

내게 무공을 펼쳐보라고 한 것으로 볼 때, 그가 필요한 사람은 어느 정도 무공을 할 수 있는 수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아니라면? 그래서 역효과가 난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후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고, 그렇게 면접까지 마쳤다.

“발표는 이틀 후에 날 것이네.”

“잘 부탁드립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험과 면접이 치러진 이곳은 맹의 외원이라 낯설기만 하다. 언제나 내원에만 있었고, 밖을 오가더라도 맹주만이 다니는 통로를 통해 움직였으니까.

정문으로 걸어 나가는 길에 핀 꽃들이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이틀 후, 합격자 발표를 듣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갔다.

발표를 위해 시험관이 걸어 나왔다. 갈사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겠다.”

결과를 듣기 위해 모인 이십여 명의 이차합격자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사실 나도 긴장했다. 아, 이렇게 긴장한 적은 처음인 듯싶을 정도다.

“합격자는 모두 다섯이다.”

다른 조직들은 수십 명 이상을 새로 뽑았지만, 정의각의 성격상 이번에 다섯 명만 뽑은 것이다.

시험관이 합격자 이름을 연달아 불렀다. 환호와 탄성이 교차되었다.

다행히 마지막에 내 이름도 있었다.

“……벽리단! 이상 다섯 명이다. 축하한다.”

시험관이 합격한 다섯 명을 앞으로 나오게 해서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부터 너희는 자랑스러운 정의각의 무인들이다.”

맹주에서 신입 무인으로, 나는 이렇게 무림맹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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