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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나날(3)
일호와 칠호가 널따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벽이며 바닥, 천장까지 새하얗게 칠해진 깨끗한 복도였다. 오히려 너무 새하얘서 오래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
“네.”
일호의 말에 칠호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본래 긴장과는 거리가 먼 그녀였는데, 솔직히 지금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조직에서 키워진 이래 이곳에는 처음 와 봤다. 또한 일호 위의 수장을 처음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오기 전에 일호가 준 약을 먹고 정신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 복도 끝이었으니까.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명백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게 기분이 나쁘면,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릴 때 무작정 끌려와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키워진 현실은 대체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깟 일로 기분 나쁠 필요 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복도 끝에 역시 새하얀 문이 있었다.
두 사람이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일호와 칠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들어선 순간 칠호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정말 너른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규모로 압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잘 꾸며진 그곳에는 책이 가득한 책장들과 값비싼 장식품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융단은 생전 밟아보지 못한 값비싼 것임을 한 발 딛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융단의 끝, 저 멀리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과장하지 않고 방이 너무 커서 그곳에 앉아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융단을 따라 걸어갈 줄 알았는데, 일호는 그 끝 문 앞에 멈춰 섰다.
책상의 사내가 말했다. 먼 거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결국 무명대협이란 자에게 검제가 죽었단 말이군.”
중년의 나직하면서도 굵직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실린 내공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 분위기 탓인지, 칠호는 그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동시에 불쾌감이 들었다. 사람을 불렀으면 가까이 오게 해서 대화를 해야
지.
“그렇습니다.”
일호의 대답에 중년사내가 이번에는 칠호를 지목했다.
“칠호.”
마치 자신을 여러 번 본 것처럼 불렀지만, 칠호는 오늘 그를 처음 보았다.
“네.”
“왜 놈을 추격하지 않았나?”
“괴망량과 취랑이 뛰어난 살수들이지만, 놈에게 파악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이유뿐인가?”
“네.”
멀어서 얼굴도 보이지 않을 거리인데, 그의 안광이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칠호는 최대한 담담하려고 애썼다. 괴망량과 취랑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미리 이야기를 한 덕분에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무명대협을 떠올렸을 것이고 자신이 사적인 감정이 있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나 옆에 선 일호가 자신의 동요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무명대협이란 사내는 분명 자신의 감정을 흔들었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미리 생각해 볼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아무런 동요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날 괴망량과 취랑을 살렸다면, 그들이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 되었다.
“검제가 무공으로는 당했을 리 없고. 혹 독살 당했나?”
사내의 물음에 일호가 대답했다.
“시체가 완전히 불타버려서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곳에서 싸움의 흔적 역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으로 붙어서 검제를 이겼을 리는 없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무명대협이란 자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했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군. 그럼 마령인은 어떻게 되었나?”
“현재 마철군과 함께 무림맹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라는 듯 조심스럽게 사내가 말했다.
“그 분이 먼저 움직이셨군.”
“네, 그렇습니다.”
‘그 분’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칠호는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 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찾지 않더라도 놈은 반드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겁니다.”
일호의 말에 사내는 침묵했다. 사내가 기분 나빠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놈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는 질책이 담긴 침묵이었다.
“물러가도록.”
“네.”
두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칠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일호가 알약을 내밀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복용했던 바로 그 약이었다.
“궁금한 것 없나?”
물론 궁금한 것은 많았다. 하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딴 약을 내미는 이 순간에는.
“네, 없습니다.”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그녀가 곧장 약을 삼켜버렸다.
핑, 세상이 돌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 * *
소검대 입대 시험은 이전과 같았다.
일차는 초식으로, 이차는 면접을 보았다. 어차피 초식만 봐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기에 굳이 비무시험을 볼 필요는 없었다.
모여든 오백 여명의 무인들 중에서 팔십 명을 뽑았다. 실력 반, 인성 반을 염두에 두고 뽑았다.
최종 면접을 볼 때에는 관휘와 몇몇 검대원들을 동참시켰다. 그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팔십 명의 검대원을 추가로 뽑았다.
팔십 명이 확정되었을 때, 송화린이 와서 그들에게 인사했다.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본가까지 와서 나서준 것이다.
그녀가 이 자리에 서는 것은 송가장과 합작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큰 의미가 있었다. 물론 검대원들은 그런 정치적인 문제보단 그녀의 미모에 빠져들었고,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인사를 마치고 들어온 그녀에게 내가 고마움을 전했다.
“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그런데 백 명이나 되니까 엄청나다.”
백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숫자도 숫자지만 기존 검대원들의 기세는 날카로웠고 새로 뽑힌 이들 중에서도 못지않은 이들이 제법 있었기에, 기세가 엄청나 보인 것이다.
“아직 멀었어. 진짜 실력이 엄청나게 만들어야지.”
“기대 돼.”
그녀는 이런 모습에 자극을 받고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자극이 틀림없었다. 분발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으니까.
그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소검대 모집을 보러 검대주 서중과 기존 검대원이 다 나와서 보았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서중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소검대가 발전하고 커나가는 것에 자극을 받고 있음을. 사람을 발전시키는 것은 언제나 자극이다. 조직 역시 사람이 이끄니, 기존 검대 역시 더욱 발
전에 매진할 것이다.
기존의 검대원 스물에 팔십이 더해져 이제 소검대는 일백 명의 검대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름은 소검대였다. 여기서의 ‘소’는 단지 숫자가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 검대에 대한 예의에서 비롯된 이름이었으니까.
백 명을 일조부터 오조로 다섯 개 조로 나눴다.
기존의 검대원들 네 명씩을 각 조에 배치했고, 그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을 조장으로 뽑았다.
소검대의 대주는 관휘로 임명했다.
스무 명을 거느리다가 백 명을 이끄는 수장이 되자 관휘는 바짝 긴장했다.
“자신이 없습니다. 아직 너무 어리고.”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얼굴이었다.
“나이야 어리진 않지. 그냥 젊은 거고. 젊고 유능한 검대주를 바라는 이들이 많을 거야.”
그렇게 나이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준 후, 다음으로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문제는 바로 이 자신감이었다.
“나이가 더 들면 자신감이 더 생길 것 같지?”
“아닙니까?”
“천만에.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감은 줄어든다. 나이 먹고는 경험으로 버티는 거지. 자신감처럼 보이는 그것은 능숙함이겠지. 그러니 젊은 넌 자신감을 가져라. 지금 이 때가 네 인생에서 가장 큰 자신감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라 여기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에 특출한 실력을 지닌 이가 들어왔다. 용태(龍泰)라는 사람으로, 이곳 산동에서는 제법 이름이 있던 무인이었다. 개인 사정으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쉬고 있다가 이번에 새로 우리 소검대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성품이나 평판이 좋았고, 실력까지 좋았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를 대주로 삼아야 한다는 말도 있는 듯 했고. 일종의 자격지심이었다.
“휘야.”
“네.”
“내가 너를 왜 대주로 임명한 것 같으냐?”
관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습니다.”
“잘 생겨서? 성격이 좋아서? 젊어서?”
그 말에 당황해서 관휘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잘 생기지도 않았고 성격도 좋지 않습니다!”
“그럼 강해서? 누구보다 노력을 많이 해서?”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가 알려주지.”
관휘는 나를 만난 이후 가장 긴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다.”
관휘가 깜짝 놀랐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너보다 잘 생긴 검대원도 있고, 성격이 더 좋은 이도 있고, 실력이 뛰어난 이도 있고, 지금까진 없었지만 더 노력하는 이도 나올 거다. 하지만 나는 네가 제일 마음에 든다.”
관휘의 얼굴에 격정과 감동이 뒤섞였다.
“그래서 네가 내 검대의 대주다.”
그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운명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소검대와 관휘를 보면 그렇다. 그를 보면 누구보다 이 소검대를 잘 이끌어 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가 마음에 든다.
“이제 네가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이유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관휘가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다음날부터 소검대는 본격적인 수련에 돌입했다.
두 달의 특별수련을 마치면 곧장 실전에 투입할 작정이다.
관휘는 평소보다 더한 열정과 성실한 모습으로 채 며칠도 안 되서 새로 들어온 무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용태를 대주로 삼아야 한다는 말들도 금방 수그러들었다.
관휘의 노력에 힘입어 각 조에 들어간 네 명의 기존 검대원들 역시 모범을 보였다. 이십 명 중 네 명은 비록 이 할에 불과하지만, 조의 분위기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언제든 갈등은 있을 수 있었다. 나는 관휘를 비롯한 조장들에게 그런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당연히 생길 수 있고, 그럴 때는 피하지 말고 해결하라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관계는 더욱 끈끈해지고 조직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설령 그로 갈등이 심화되고 조직이 분열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순간은 화나고 힘들고 두렵겠지만, 결국 다 이겨내고 헤쳐 나가게 될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해주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고 나면, 우린 중원제일의 검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 관휘와 조장들은 그날 잠을 설쳤을 것이다.
* * *
드디어 수가 연락을 취해왔다.
연락소에서 만난 수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오랜 조사가 성과를 낸 것이다.
“남현표국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신중한 조사였다. 원래 표국 하나 조사하는 일은 순식간에 처리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번 일의 위험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기에, 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신중한 방법으로 남현표국을 조사했던 것이다.
“남현표국은 절강성(浙江省)에 기반을 둔 표국입니다. 처음에는 표두 하나와 표사 넷으로 시작했는데, 불과 삼 년 만에 표두 다섯에 표사가 칠십 명이나 되는 중견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삼 년 만에 한 표국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지?”
“그들이 맡았던 지난 표행들을 분석해본 결과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뭔가?”
“특정한 곳에서 그들에게 일감을 몰아주었습니다. 여러 대리인을 내세워 그 사실을 숨겼지만, 한 곳이었습니다.”
“그게 어디지?”
그러자 놀랄만한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번에 황금대연을 개최한 대륙상단의 단주인 성왕보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대륙상단을 이끄는 성왕보는 중원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였다. 그래서 중원상인연합회의 회주 역할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 황금대연의 개최자이기도 했고.
“그가 개입되어 있단 말이지?”
혹시 그가 이번 일의 배후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거물급 인사였다.
“성왕보에게 접근하실 겁니까?”
잠시 고민한 후 내가 말했다.
“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
“그에 관한 조사는 지금 할 필요 없다. 그들을 자극하지 말고 당분간은 삼안각을 키우는데 심혈을 기울이도록.”
“명을 받습니다.”
이제 놈들에 대해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놈들의 세력은 거대했고 이 강호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다. 하나를 없앤다고, 혹은 급하게 달려든다고 소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놈들은 강하다. 만약 검제와 싸운 직후, 그와 비슷한 실력의 고수가 나타났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굴릴 때가 아니다. 이제 진짜 강해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올 겨울까진 조용히 수련할 생각이다. 움직이는 것은 내년 봄부터다.
그때가 되면 태성상단은 자리를 잡고, 삼안각은 중원 전체로 뻗어나가 있을 것이며 소검대와 흑표대는 더 성장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올 겨울이 되면 내 내공은 이 갑자를 채울 수 있다. 추혼수라검술의 오초식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괴물들의 덩치로 볼 때, 이제 오초식이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