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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나날(1)
임연정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조직에 남겠다고 했다. 외출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보고할 것이고, 조직에서는 자신이 필요하기에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데려갈 수 없다면, 이후 일은 그녀에게 맡겨야 하겠지.
나는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었다.
“가시오.”
“정말 저를 살려주는 건가요?”
“그렇소.”
“왜죠?”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 내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먹는 그 감, 아직 맛만 살짝 봤잖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그녀가 피식 웃고 말았다. 웃어야 될 상황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웃음으로 터졌다.
“하하하.”
그녀가 통쾌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분명 이 연구가 끝장나 버린 것에 대한 기쁨이 포함되어 있었다.
웃음을 그친 그녀가 내 모습을 기억하려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감이 제대로 익으면, 때론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하죠.”
담긴 뜻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고마움을 끝으로 그녀가 먼저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화르르르륵.
반 시진 후 장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의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연구소 내부의 시설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서류는 모두 불탔다.
검제와 싸웠던 흔적 역시 모두 사라졌다.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던 벽은 무너뜨려 가루가 되었고, 검제의 시체는 불에 타서 형체조차 찾기 어려울 것이다.
멀리 언덕위에서 불타오르는 장원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칠호와 괴망량, 그리고 취랑이었다.
저 멀리 그곳을 걸어 나오는 무명대협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칠호가 말했다.
“임무를 취소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괴망량이 물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도 될까? 문책이 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자 칠호가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저곳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죠?”
“누가 있었는데?”
“극비라서 알려드릴 수 없지만, 대단한 고수가 있었습니다. 상부에선 우리가 개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겁니다.”
“그래도 우리 둘이 함께 나서면 저 자는 죽일 수 있다.”
“과연 그럴까요?”
괴망량이 눈빛을 차갑게 빛냈다.
“우릴 너무 무시하는군.”
“네,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두 분 목숨은 제가 살려드린 것으로 하죠.”
괴망량과 취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칠호가 이렇게 나오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괴망량이 다시 물었다.
“좋아, 그렇다면 미행이라도 해서 행적을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그 역시 허가하지 않겠습니다.”
“뭐 어차피 결정권자는 너니까.”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취랑이 먼저 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
“사랑 같은 것 하지 마라.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결정이 사랑으로 오해받자 칠호가 발끈했다.
“사랑이라니요? 아닙니다!”
화를 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과하게 버럭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더 오해를 할 것임을.
과연 괴망량이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라. 어차피 우리 삶은 길지 않을 테고, 끝은 더럽고 비참할 거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실컷 사랑해라.”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나갔다.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칠호가 다시 장원 쪽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무명대협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이 감정이 사랑이라면 그를 뒤쫓아 가야겠지.
하지만 그녀는 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인생에 사랑 같은 것이 허락되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 *
나는 다시 무한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무명대협의 존재는 잠시 사라졌다. 황금대연에서의 모든 일들이 무명대협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당분간은 그로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광두는 정말 기뻐했다. 특히 정주의 객잔에서 공수찬과 전음을 보냈던 일을 몰랐기에 그동안 녀석의 걱정은 하늘을 찔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려주자 광두의 원망이 공수찬을 향했다.
“이렇게 무정하신 분이셨습니까?”
그러자 공수찬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 꿈도 희망도 없는 어둠의 탕아랍니까? 무사히 돌아오실 걸 알면서도, 그래도 자꾸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요. 넌지시 말 좀 해주시지.”
그들이 이번 기회에 많이 친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많이 다른 성격이어서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광두에게 말했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
“걱정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애정이라고 치고. 나중에 자식이라도 낳아 키우면 어쩌려고 그래? 이 험한 강호, 문 밖에 내보내기라도 하겠어?”
부정할 수 없었는지 광두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게 말씀입니다. 이렇게 혼자 살아야죠.”
“늙어서도 온갖 잔소리에 걱정하는 네 모습,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니 도순이랑 혼인해.”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뭔 혼인입니까? 그리고 도련님이 혼인하셔야 저도 가죠. 참, 송소저가 이곳에 들렀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화린이가?”
“볼 일 보러 왔다가 들렀다고 했지만 도련님 보고 싶어서 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 마디.
“아, 여전히 아름다우셨어요.”
그녀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까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감격스러웠다.
문득 임연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를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칠호도 떠올랐다. 칠호는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살수들도. 정주를 떠날 때, 혹시라도 추적이 있을까 몇 번이나 신경 썼지
만 그들의 미행은 없었다.
한 여인은 나를 찾아왔고, 다른 여인은 나를 떠나갔으며, 또 다른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한 순간에 세 여자를 동시에 떠올리다니! 전생에도 없던 일이다.
내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백무인은?”
“그때 이후로 통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백표는 강력한 조직을 만들라는 내 명령을 받았다. 아마 지금 그 일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가 맡은 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백표였으니까.
그런 점에선 공수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맡긴 일들을 훌륭하게 잘 처리해 두었다. 태성상단이 만들어졌고, 산동의 곡부과 무한, 그리고 정주에 작은 지부가 만들어졌다.
“상단은 제가 알아서 운영하겠습니다.”
“공총관만 믿겠소.”
“그래도 이번 제 일은 광무인 덕분에 일이 손쉬웠습니다.”
공수찬은 진심으로 광두에게 고마워했다.
“괜히 공치사 안 해주셔도 됩니다. 저야 따라다니기만 한 걸요.”
내 앞에서 듣는 칭찬이라 기분이 좋은지 광두의 얼굴에 웃음이 벚꽃처럼 피었다.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시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누군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든든한 생각이 들어서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었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광두가 나를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는군요.”
물론 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끔 그런 든든한 날도 있었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귀찮고 신경 쓰였겠지.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하다못해 밥을 먹어도 상대를 배려해야 하니까.”
광두가 공수찬을 보며 설마하는 표정으로 앞서의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는군요.”
아니라고 해줘야 할 공수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날도 있었지요. 하하하.”
다들 그를 따라 함께 웃었다.
한바탕 너스레가 끝나자 광두가 물었다.
“어떠셨어요?”
장난기가 사라진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힘들었다.”
이번에 놈들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마령인을 포섭하고 검제를 포섭한 자들이었다. 이미 사라진 혈천신교의 불회마령단을 개조하려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고작 꼬리에서 만난 것들이었다. 또 누가 그들의 편이 되었는지, 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대하고 대단한 세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앞으로는 더 힘들 것이다.”
그러자 광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련님 때문에 놈들은 훨씬 더 힘들어 질 겁니다.”
전혀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광두도, 공수찬도.
내가 그 말에 한 단어를 바꿨다.
“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이겠지.”
* * *
백표가 돌아온 것은 내가 돌아오고 열흘이 지나서였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내게 말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나는 두 말 않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무한과 곡부 사이에 위치한 하남성의 평정산(平頂山)이었다.
평정산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절벽이 나왔다.
낡아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나무다리를 건너가니 그곳에 산채가 있었다.
“예전에 녹림이 사용하던 곳이었답니다. 무림맹에 소탕당하고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는데, 이젠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곳입니다. 앞서 보았던 다리 이외에는 올 수가 없는 곳이라서 방비를 하기에도 아주 좋은 지
형입니다.”
산채의 너른 마당에 서른세 명의 무인들이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눈에도 보통의 수련이 아니었다. 숨이 금방이라도 멎을 것 같은 힘든 수련이었다.
“일차로 모은 이들입니다.”
드러난 기도나 수련을 하는 움직임으로 짐작할 때 실력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최소 맹호단 무인들의 실력은 되었고, 그 보다 더 뛰어난 이들도 많았다.
“자, 모두 집합!”
백표가 그들을 내 앞으로 불러 세웠다.
헉헉대는 숨결만큼이나 그들의 기도는 거칠었다. 강렬한 눈빛에 강인한 기질.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렇게 거칠면서도 천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들의 주군이시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들이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어린 나를 보고 무시하는 기색을 드러낼 법도 했는데, 그런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백표가 미리 기강을 잡아둔 것이리라.
“어떤 이들이오?”
“여러 사연들이 있습니다. 강호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나선 이도 있고, 저와 친분 때문에 온 사람도 있습니다.”
백표가 덧붙이기를 지금 이 순간에도 양청과 명도가 중원을 돌며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양청과 명도는 일전에 그가 받아들인 맹호단의 수하들이다.
“뽑은 기준은 무엇이오?”
아마도 백표가 고르고 골랐겠지만.
“함께 꿈을 꿀 수 있는가입니다.”
백표답다는 생각에 내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그 기준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요.”
“이들을 시작으로 키워나갈 생각입니다. 혹 생각해 두신 이름이 있으십니까?”
“조직 이름은 흑표대(黑豹隊)라 짓겠소.”
백표의 표가 표범을 나타내는 표자였다. 그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검은 표범들이란 이름을 지은 것이라 설명하니 백표가 크게 감격했다. 무림조직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조직을 가지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었
다.
내가 흑표대로 새롭게 태어난 그들의 기를 눌렀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고양이들이다.”
모두들 인상을 굳혔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인정할 수 없나?”
“없습니다!”
그들이 우렁차게 한 목소리를 냈다.
“그대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군가?”
그러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덤비게.”
사내가 백표를 쳐다보며 어디까지 덤벼도 되는지를 눈짓으로 물었다.
백표가 그에게 말했다.
“너의 최고 절기를 사용해도 괜찮다. 아니, 그래야만 할 거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내가 검을 뽑아들며 빠르게 쇄도했다.
쉬이익!
휘리릭.
쿵.
사내가 바닥에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껌벅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지켜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그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다들 상당한 실력자들이었기에 이것만큼은 알 것이다. 내가 손속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사내는 크게 다쳤거나 죽었을 것이라고.
쓰러진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내가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당했는지는 고양이가 아니라 표범이 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나를 향한 시선이 대번에 달라졌다. 물론 긍정적인 변화였다.
강한 자들을 이끌 때는 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속한 곳의 권위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했으니까.
끝으로 백표에게 말했다.
“부디 멋진 표범으로 키워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