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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대연(4)
그 시각, 나는 장원의 지하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마령인은 마철군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온갖 감언이설로 상황을 벗어나려 하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복도 끝 방에서 나오던 이호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성큼성큼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 새끼!”
그가 몸을 날려 뒤쪽 벽에 붙은 등잔을 회전시켰다.
끼리릭.
기관을 긴급하게 발동시키는 장치였다.
복도를 박차고 몸을 날린 나는 이미 복도 끝까지 와 있었고, 네 번째 기관의 사정거리 내에 있었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쉭쉭!
양쪽 벽과 천장에서 수십 발의 강침이 동시에 발출되었다. 고수 아니라 고수 할아비라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수라명왕검이 벼락처럼 빠르게 뽑혀 나왔다.
창창창창창창창창창창창!
나를 향해 날아들었던 강침이 모두 튕겨져 나가며 복도의 벽에 박혔다.
그 광경에 이호가 경악했다. 자신이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발출된 숫자도 숫자지만 강침의 위력과 속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너, 검을 쓰는 자였구나!”
나는 이미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이호가 검을 뽑아들며 몸을 날렸다.
슁! 쉬익!
이호와 내가 서로 스쳐지나갔다. 그의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실력대로 숫자를 부여한 것이라 여겨도 좋을 정도로.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그것도 검을 뽑아든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절대 이런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원래 그가 있던 자리에 멈춰 섰고, 이호는 허공을 날아가 내가 지나왔던 복도에 나뒹굴었다.
쉭쉭쉭쉭쉭쉭쉭!
그의 몸으로 앞쪽 기관의 암기가 날아와 박혔다.
처커컹! 철컥! 철컹!
바닥에서 빽빽이 튀어나온 칼날이 그의 몸을 꿰뚫었고, 동시에 천장에서 독연이 뿜어졌다.
푸우우우웅!
나와 스치는 순간 이미 내 검에 절명했기에 아픔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철컹.
내가 벽의 등잔을 원래자리로 돌렸다. 튀어 나와 있던 칼날이 회수되며 기관이 발동을 멈췄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령인과 여덟 호위들의 방은 비어 있었다.
나는 임연정과 그 의문의 방 사이에 멈춰 섰다.
먼저 그녀의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녀는 둥근 구체 앞에 서 있었다. 밖에서 들려온 기관이 발동한 소리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올 줄은 정말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신? 당신이 왜?”
더 이상 눈을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암살은 가지 않았소.”
“그게 무슨 말이죠?”
잠시 멍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이제야 상황파악을 했다.
“애초부터 그를 속였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준 약 역시 통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누가 걱정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살짝 안도감이 스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어떻게 되었죠?”
“마철군에게 붙잡혔을 거요.”
나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마령인에 대한 감정을 말해주듯, 그녀는 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를 죽일 건가요?”
“당신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무슨 뜻이죠?”
“당신이 알고 있는 배후를 말해주시오.”
“그럴 수 없어요. 저를 죽인다 하더라도.”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느끼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걸린 덫은 목숨과 바꿔도 풀 수 없는 덫일지도 모른다는. 배후를 말하지 않는다고 그녀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다.
“당신 뒤에 있는 것들은 모두 파괴할 거요. 이곳에 있는 책과 자료들도 모두 태워버릴 거요.”
“안 돼요!”
“돼!”
강하게 소리친 후에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이 연구하는 것 싫어하잖소?”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알았는지 의아해 했고,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것에 대해 기쁨을 느꼈다.
“원래라면 당신도 죽여야 하겠지. 하지만 당신이 나를 살려주기 위해 기회를 줬듯이 나도 기회를 주겠소. 조직에 남거나 멀리 떠나거나 당신 뜻대로 하시오.”
탁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허공을 격해 그녀의 마혈을 제압했다.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데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 그녀를 안아서 문 쪽으로 데려왔다. 아혈까진 제압하지 않았기에 말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내 품에 안겨 말없이 내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 품에 안긴 그녀는 가녀린 느낌이었다.
그녀를 문 밖에 세워둔 후 중앙의 구체로 걸어갔다.
“안 돼요!”
그녀의 제지에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꺼내들었다. 강기를 일으켜 이곳에 설치된 모든 것을 박살내 버리려던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익.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는지, 마찰음을 내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쪽의 바로 그 방이었다.
내가 천천히 그쪽을 향해 돌아섰다. 문은 다 열리지 않고 조금만 열려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강맹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안의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음을.
내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임연정이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면 죽어요.”
내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모를 일이오. 당신은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잖소?”
임연정은 내 말을 자신감으로 받아들였다.
“대체 당신 누구죠?”
“다녀와서 이야기하지.”
그녀를 두고 건너편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바깥의 그녀가 다칠까봐 문을 닫았다.
정신을 집중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방 안에는 아무런 가구나 집기가 없었다. 말 그대로 이사를 가고 나서 텅 비어있는 방 같았다.
그 한 가운데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노인의 안광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놓인 한 자루의 검. 이 방에는 오직 그와 그의 검
만이 있었다.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다.
앞서 몇 번이나 느꼈던 기운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고수였다.
과연 내가 이 노인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당장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 문이 스스로 열리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내가 이 문을 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자넨 누군가?”
생각보다 담담한 어조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젠가 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렁치렁한 머리가 얼굴을 가려서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당장 그가 누군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무명이라고 하오.”
이미 안에서 나에 대한 이름을 몇 차례 들었을 것이다. 나는 요 며칠 아예 이곳에서 살았었으니까.
“앉게.”
나는 서로가 손을 내밀면 손가락 끝이 맞닿을 정도에 마주 앉았다. 노인은 송곳 같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곳을 없애겠다고?”
“그렇소.”
“그럴 수 없네. 내가 저 아이와 저곳을 지켜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네.”
마주보는 방에 이 노인이 있는 이유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조직은 저 연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구와 약속을 한 것이오?”
“말해줄 수 없네.”
“모르는 것은 아니고요?”
순간 노인이 꿈틀했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을 참지 않았다.
“저들이 저 해약을 개발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소? 강호를 차지하려는 것이오. 그것을 알고 있기는 하오?”
그러자 노인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절대 그렇게 되지 않네.”
“어찌 그리 장담하시오?”
그러자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천하진이 있는 한 아무도 이 강호를 차지할 수 없네. 그저 음모 놀이나 하는 것이지.”
“천하진은…….”
“최고지. 정말 최고의 무인이다.”
“천하진은…….”
“누구도 죽일 수 없다네.”
그는 내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진을 만나본 적이 있소?”
“물론이지.”
노인의 눈빛에서 강렬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평생을 두고 유일하게 나를 이긴 사람이지.”
그가 머리를 번쩍 치켜들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내게 내린 재앙이기도 하지.”
그 순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나는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검제.
이제는 너무나 늙어버린 그는 내가 스물아홉에 싸워서 이긴 검제였다.
당시 그는 오십 대의 나이였다. 그로부터 사십여 년이 지났으니 지금 그는 아흔 살이 넘었을 것이다.
내가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던 해이기도 했다. 그 해의 난 검제와 도제, 권왕을 연달아 이겼다.
권왕과는 비무 이후에도 친분을 이었었다. 그에게 권법을 배우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검제와 도제는 그날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한데 이런 곳에서 검제를 만날 줄이야. 놈들이 그 검제까지 끌어들였을 줄이야.
“저들이 이 강호를 차지할 거요.”
“못한다니까.”
“천하진은 죽었소.”
순간 검제가 두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쳤다.
“헛소리!”
하지만 나는 차분히 말했다.
“그들이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았구려. 천하진은 일 년 전에 죽었소.”
“그럴 리가 없다!”
“나를 보시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소?”
맑은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검제의 눈동자가 떨렸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한다. 오직 나만이 그를 죽일 수 있다.”
폭사되어 나오는 삐뚤어진 광기.
그 뜨거움을 향해 차가운 진실을 물었다.
“그들에게 도와준 대가로 무엇을 받기로 했소?”
검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명분이 바르다면 ‘내가 고작 대가를 바라고 이러는 줄 아느냐?’란 대답이 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검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 차가운 말이 이어졌다.
“천하진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인가를 받기로 했겠지.”
그의 동요가 느껴졌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게 패배한 이후, 그는 평생을 상처를 안고 살았음을. 언제 어떻게 포섭되었는지는 몰라도, 놈들이 어떻게 포섭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 이 어리석은 늙은이야.
“나이를 먹었으면 저런 놈들의 유혹쯤은 이겨낼 수 있었어야 하지 않겠소?”
“누가 그를 죽였느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대쪽 방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뭐?”
“이 조직이 죽였을 가능성이 높으니, 결국 이 조직을 돕고 있는 당신이 죽인 셈이겠지. 당신에게는 잘 된 일이겠군. 그렇게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으니까.”
“닥쳐라!”
“당신이나 닥치시오!”
나는 화가 났다. 이 어리석은 늙은이에게도 화가 났고, 이 늙은이를 이용해 먹은 배후세력에게도 화가 났다.
“당신 정도의 고수가, 그깟 승패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저런 자들을 돕고 있었단 말이오?”
정곡을 찌르는 나의 말에 검제는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당신의 늙음이 죄는 아니지만, 잘못 늙은 것은 명백한 죄요.”
“건방진 새끼! 죽여 버리겠다!”
검제가 벌떡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그의 인성은 이미 삐뚤어져 버렸다. 누구보다 많은 늙은이들을 상대해 봤기에 고집불통의 이 어리석음은 어떤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배후 세력 놈들이 그를 끌어들일 수 있었겠
지. 옳지 않은, 저 반대쪽으로.
나도 함께 일어서며 검을 뽑았다. 어차피 저 방에 있는 것들을 다 없애버리려면 검제를 제압해야 했다.
그가 검을 내질렀다. 정말 나를 죽이려는 살초였다. 사십년 전 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챙챙챙챙챙!
나와 그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십여 수가 지났을 때,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설마 이 검술은?”
챙챙챙챙챙챙!
그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검을 내지르기 시작했으니까. 내공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지만, 내게는 젊음이라는 새로운 힘이 있었다. 이 싸움을 이겨야하는 올바른 명분이 있었다.
우리의 싸움은 팽팽했다. 그는 검제로, 나는 검신이라 불렸던 사람이다.
그는 어리석고 초라한 늙은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의 검술은 어리석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좁은 방에서의 싸움이었기에 벽에 검이 남긴 자국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촤촤촤촤촤촥!
하지만 벽을 부수지 않았다. 우리의 싸움은 검술의 극의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우아함이 있었다.
검광이 만들어내는 빛은 눈이 부셨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검선은 아름다웠다. 때론 그림처럼 멈췄고, 때론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온몸의 혈관이 모두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오랜만에 무아지경에 빠져서 싸웠다. 내가 어떤 초식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지 않고 싸웠다.
왜 싸우는지를 잊었고, 이윽고 누구와 싸우는지도 잊었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직 나는 싸우고만 있었다.
나의 무아지경을 깬 것은 하나의 소리였다.
푸우욱!
살이 찢기는 소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라명왕검이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너는 그의 제자구나.”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지어졌다. 내 무공에 죽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듯 보였다. 그는 똑바로 선 채로 절명했다.
그의 시체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싸움은 누군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던 것이다.
힘든 싸움이었다. 강기를 발출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거의 모든 내공을 다 소진한 상태였으니까. 거의 모든 심력을 다 쏟아 부었다.
부릅뜬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차라리 내 손에 잘 죽었소.”
놈들에게 이용당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을 테니까.
“다음 생에는 더 멋진 자리에서, 더 멋진 이유로 만나서 싸웁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꼿꼿이 서 있던 검제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내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걸어 나오자 임연정은 경악했다. 내가 살아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피곤함 가득한 얼굴로 내가 물었다.
“내 싸움은 이제 끝났소. 당신 생각은 끝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