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97화 (97/304)

=======================================

황금대연(1)

칠호는 무명대협을 다시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한 느낌을 받았다.

일전에 그가 도살자를 죽이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그때도 자꾸 눈길이 갔었는데, 오늘도 그에게 시선이 붙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반가워요, 앞으로 잘 지내요.”

임연정이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임연정이 이호에게 말했다.

“그대들 조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구나. 무뚝뚝한 사내들만 득실대는 줄 알았는데.”

한 마디 농담이나, 적어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지만 이호와 칠호 모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임연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재미없는 사람들 같으니.”

이어지는 행동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호가 칠호를 보며 말했다.

“우린 이만 나가지.”

“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포권으로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섰다.

그들이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었다.

칠호는 일호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 내려왔다. 무명대협이 천도문의 도살자를 죽인 데 이어 마령인과도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연이 겹쳐온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배웠다. 원래라면 무명대협이란 자를 죽일 작정으로 내려왔는데, 그를 보자 조사를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를 걸어 두 사람이 끝 방에 들어갔다.

“그래서 무명대협이란 자가 수상하다고?”

“네.”

칠호는 솔직히 자신이 내려온 임무를 밝혔다. 공연히 다른 이유를 대봤자 눈치 빠른 이호의 경계만 살 뿐이라고 판단해서다.

다만 무명대협을 자신의 판단으로 제거해도 좋다는 명령은 말해주진 않았다. 괴망량과 취랑이 함께 내려와 대기 중이란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일호의 명령으로 조사차 내려왔다고만 했다.

“도살자를 죽였다는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마공자에게 접근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내가 지켜본 결과 그리 의심스러운 자가 아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칠호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게다가 마공자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감안해서 조사하도록.”

“알겠습니다.”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이호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함께 온 자들이 있나?”

“없습니다.”

이호가 칠호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서 그것이 거짓인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자신들은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서 쉬도록. 출입허가는 내놓을 테니, 기관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거다.”

* * *

칠호의 등장에 나는 꽤나 놀랐다.

도살자를 죽일 때 군중들 속에 그녀가 있었다. 분명 그녀는 도살자와 관련한 임무가 있었다.

그 임무를 망치고 이번에는 마령인과 만났으니, 이들 조직에서는 당연히 나를 조사하려 들 것이다. 그녀는 나 때문에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까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죠?”

임연정의 물음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소?”

“사내들의 속이야 뻔하죠.”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합시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말았죠?”

“마공자가 질투 때문에 그대에게 전하지 않은 말이 있소.”

“질투라니요?”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는 것 말이오.”

내 고백과도 같은 말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이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죽기 전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보겠다는 심보인가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그런 고약한 심보가 되는 거요?”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 아니오.”

내가 정색해서 대답했다.

그녀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을 코앞까지 가져다대며 내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다. 그녀 눈에서 느껴지는 저 맑은 기운이 정말 순수함에서 나온 것인지, 내가 생각지 못한 악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날 좋아했던 사내들은 다 죽었어요.”

“잘 됐구려. 나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까.”

당당히 대답했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가 갑자기 기습적으로 내게 입맞춤을 했다.

깊은 입맞춤은 아니었고, 쪽 하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깜짝 놀란 내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곧 죽을 사람 불쌍해서 못 먹는 감이 이런 맛이라고 살짝 맛만 보여줬어요.”

내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의 이 부끄러움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그만 가세요.”

그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중에 봅시다.”

내 인사에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곧장 그녀의 연구실을 나왔다.

* * *

그날 저녁 나는 객잔에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말이지 임연정의 기습 입맞춤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설마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니면 정말 곧 죽을 내가 불쌍해서 입맞춤이라도 한 번 해준 것인가? 그럴 리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얼떨떨했지만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후회하진 않았다. 송화린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미안해야 할 대상은 임연정이 될 거다. 나는 놈들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녀를 이용할 작정이니까.

한걸음만 더 들어가서 놈들에 대해 알아내고 빠질 것이다.

이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만 알면 된다. 그것만 알아내면 무명대협은 잠시 자취를 감추고, 다시 벽리단이 되어 내 세력을 키워나갈 것이다.

내 진짜 목표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같은 행보라도 하늘과 땅차이가 될 테니까. 딱 한걸음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비밀장원 내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으니…… 그곳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 * *

사흘이 지나고 드디어 황금대연이 열리는 날이 밝았다.

정주는 이른 아침부터 축제의 열기에 빠져들었다.

거리는 상인들과 그들을 따라온 무인들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여러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심지어 남만에서 왔다는 상인이 코끼리에 기린까지 팔고 있었다.

나는 저잣거리를 지나 황금대연의 개최식이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마봉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 멀리 대형 단상이 보였고, 그 옆으로 강호명숙과 중요인사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운집한 사람들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소문과 정치에 아주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중원 곳곳의 소식들을 나누고 있었다.

어느 지역의 상단이 이번에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새로 생겨난 상단의 주인이 누구며 망한 곳은 왜 망했는지, 천도문의 후계자들이 각 지역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심지어는 무명대협의 등장이 상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런 이야기를 매일 들을 수 있다면 중원의 모든 정보상이 망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 와중에는 천도문의 횡포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용감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인들은 맹주와 관련해서는 언행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중년사내 하나가 단상으로 올라와서 황금대연의 시작을 알렸다. 내공이 깃든 그의 말이 사람이 꽉 찬 그곳에 멀리 울려 퍼졌다.

“중원 각지에서 귀한 걸음 해주신 귀빈 여러분, 지금부터 중원제일의 축제이자 세상에서 가장 번쩍이는 연회, 황금대연을 시작하겠습니다!”

펑! 펑! 퍼엉!

하늘에서 일제히 폭죽이 터졌다. 아래에서도 작은 폭죽들이 연이어 터졌다.

중년사내가 이번 황금대연을 개최한 주인공을 소개했다.

그는 단신의 백발노인이었는데 중원상인연합회의 회주이자 대륙상단의 단주인 성왕보(成旺寶)였다.

“이 자리만큼은 우리 상인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대연이 열리는 기간만큼은 허리를 펴고 큰소리를 내셔도 됩니다. 이번 대연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성왕보가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을 소개했다.

“자, 오늘의 이 자리를 축하해주러 강호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강호의 중심이자 대들보이신 무림맹주님을 소개합니다.”

와아아아아!

큰 함성과 함께 마봉기가 등장했다.

그를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전과 변함없는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천도문의 횡포를 뻔히 알면서도 박수를 치고 있는 상인들 때문도 아니었다.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네 명의 여인들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얼굴과 몸으로 뽑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미녀들이었다.

예전에 들은 적 있었다. 마봉기의 개인호위는 모두 여인들로 이뤄져 있다고.

차마 무림맹주가 되어서 그렇게 바꾸진 못했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맹호단의 무인들 외에도 저 여인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이다.

저런 색정 놈이 무림맹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화가 난 것이다.

그의 연설을 한 귀로 흘리며 주위를 살폈다. 명숙들이 앉은 귀빈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철군을 발견했다. 그는 마령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 * *

마철군은 오랜만에 마령인을 다시 만났다.

마봉기의 후계자들은 중원 각지로 흩어져 세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곳 하남성을 맡은 사람이 마령인이었다. 물론 그는 마령인이 비밀리에 시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남에서의 네 성과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열심히 하면 뭐하겠소? 어차피 후계자는 형님이 될 텐데.”

“헛, 아직 모를 일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나오면…….”

“죽여 버리시게?”

“이놈이?”

“농담입니다, 농담.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농담이 절로 나오는군요. 하하하.”

마철군이 사람 좋은 얼굴로 따라 웃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마령인을 가장 경계했다. 후계자들 중 가장 속마음을 숨기는데 능통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형제들은요?”

“오지 않았다. 이번 황금대연에 초청받은 것은 아버지와 나 뿐이다.”

“과연 맹주와 차기맹주만 챙기는군요.”

“그게 아니라, 근래 강호에서 본문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아마 그래서 아버지와 나만 초대한 모양이다.”

“언제는 본문이 좋은 소릴 들었던 때가 있었소?”

“그때보다 더 심각하다. 특히 무명대협이 염대협을 죽이고 난 후에는 우릴 보는 시선이 아주 좋지 않다.”

“염대협은 무슨. 그냥 도살자지. 나는 그 자가 잘 죽었다고 생각하오. 이제 우리 천도문도 바뀌어야지.”

“말조심해라.”

“자, 나는 인사 했으니 이만 물러납니다. 그냥 작별 인사까지 한 것으로 합시다! 대연이 끝나면 잘 가시오!”

마령인이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마령인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서로 모른 척했다.

나는 마철군의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가까이 두 사람이 있었다. 미리 마령인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우선 저 학사풍의 중년인이 바로 마철군의 군사 역할을 하는 노선생이다. 그리고 그 옆의 사내가 바로 신비조직에서 나온 삼호.

다시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일곱 명의 고수들이 바로 천도문주를 호위하는 천룡칠검이다.

천룡칠검은 앞서 마령인을 호위하던 여덟 고수들에 비해 한 수 위였다.

저들 각각의 무공 수위는 추도치와 맞먹었다. 추도치 일곱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들의 합격술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철군의 호위를 살핀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약속된 곳에서 마령인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기가 무섭게 마령인이 물었다.

“어떻던가? 암습이 가능하겠던가?”

“쉽지 않아 보였소. 특히 천룡칠검이란 자들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소.”

“고수들이지. 정작 더 큰 문제는 마철군이야. 그는 천룡칠검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무슨 문제인가?”

“노선생 옆에 있는 삼호란 자 말이오. 내가 암습을 가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오?”

“그냥 지켜볼 것이라 생각되네만.”

“확실한 것은 아니군.”

“그렇다네.”

“정확하게 알아봐 주시오. 어떻게 나올지.”

“알겠네.”

“천룡칠검이 그에게서 떨어질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내야겠소. 또, 그들 이외에 다른 비밀고수가 있을지도 알아내야 하고.”

나는 그에게 정말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막상 그를 보니 암살에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소.”

물론 나는 마철군을 암살할 생각은 전혀 없다. 마령인을 흔들어대는 말일 뿐이다.

과연 마령인은 갈망을 감추지 못했다. 나를 향한 눈빛이 짙어졌다. 그야말로 간절히 바라겠지.

무명대협이 그를 암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두겠지만, 실제 암습에 성공하면 그는 졸지에 가장 강력한 후계자 후보로 우뚝 올라서게 될 테니까.

“마공자.”

내가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일에 내 모든 것을 다 던질 작정이오. 그러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뭔가?”

“나를 장원 지하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주시오.”

“이유는?”

“내가 원할 때 언제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소.”

그녀는 물론 임연정이었다.

마령인이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과연 나를 믿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리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근원적으로 타인을 믿지 않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를 만난 이후, 그도 노력했고 나도 노력했다.

내 노력이 어떤 결과일지는 이제 그의 대답에 달렸다.

그는 대답을 내게 하지 않고 마부석의 마부에게 했다.

“장원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옆에 놓여 있던 눈가리개를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