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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에는(3)
송화린은 광두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벽씨검문의, 벽리단의 종복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서 무공을 펼치고 있는 광두는 그 어떤 무인보다 무인답게 보였다.
쉬이이익!
광두의 도가 허공을 찢어발기듯 강력하게 내질러졌다. 남해칠식이 완전히 손에 익은데다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그 위력은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의 무공수련을 봤으면 어서 돌아서야 했는데, 도법이 워낙 멋있고 강력해서 그녀는 눈길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뒤늦게 그녀가 몸을 돌리며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광두가 수련을 멈추고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누구십니까?”
광두의 물음에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렸다.
상대가 송화린임을 알아본 광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허어억!”
어찌나 놀라는지 송화린도 덩달아 놀랐다.
“아가씨?”
“네, 저예요.”
“우아아아악! 어떻게 아가씨가 여기를?”
광두가 후다닥 달려가서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너무 과한 인사에 송화린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광두가 펄쩍 뛰었다.
“어디 천한 제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천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상대가 종복이라고 한 번도 무시해본 적 없는 그녀였다. 게다가 조금 전에 본 광두의 무공은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한데 이곳에는 어인일이십니까?”
“아버지 심부름을 할 일이 있어서 무한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 객잔에 묵고 있다는 이야기를 일전에 들어서 잠시 들렀답니다. 객잔 주인장이 이곳에서 수련을 한다고 해서 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벽리단이 아닌 광두가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광두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괜찮아요, 그냥 지나다 들른 것 뿐이니까요.”
물론 괜찮지 않았다. 벽리단이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심부름을 자처했다.
미리 기별하지 않고 왔기에 못 만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막상 벽리단을 보지 못하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들렀다고 전해주세요.”
“물론입니다.”
광두가 더 안타까워했다. 송화린의 절대 지지자가 바로 광두가 아니던가?
“아가씨.”
“네?”
“저희 도련님, 놓치지 마십시오!”
난데없는 말에 송화린이 깜짝 놀랐다. 광두가 저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광두는 진지했다. 송화린은 그 진지한 눈빛에서 진심으로 벽리단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벽리단을 위해 한 말이었고, 그 마음을 느끼자 오히려 광두가 고맙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송화린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대답하고도 송화린은 스스로 놀랐다. 이렇게 힘차게 대답할 줄 몰랐던 탓이다. 수란에게도 잘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인데.
아마 광두에게서 어떤 ‘응원’의 기운을 받아서였을지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응원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대신 저 많이 도와주세요.”
광두가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언제나 아가씨 편입니다!”
* * *
임연정과 술을 마셨던 바로 다음날, 마령인이 나를 찾아왔다.
“어제 어땠나?”
“뭐가 말이오?”
내가 모른 척하자 마령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마음에 든 모양이군.”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자네 얼굴에 적혀 있네. 정말 좋았다고.”
“그럴 리가?”
내가 동경 앞으로 가서 얼굴을 비춰보았다. 낯선 무명객의 얼굴이 무뚝뚝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벽리단의 얼굴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얼굴을 매일 보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 마음의 검을 찾는 긴 여정 중이었으니까.
“얼굴에 아무 것도 안 적혀 있소만?”
“하하하. 여인에 대한 감정이 자신의 눈에 보일 리가 있나?”
내가 다시 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소. 그녀가 마음에 드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나?”
“얼굴도 예쁘고, 몸매는 끝내주고. 거기에 똑똑하기까지 하더군. 정말 매력 넘치는 여자요. 저런 여자와 사귈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걸 수도 있소.”
“하지만 위험한 여자지.”
“난 위험한 여자가 더 좋소.”
곧이어 내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당신 질투하는 것이오?”
“하하하. 그럴 리가! 나는 친구의 여자를 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네.”
“친구?”
내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는 당당히 말했다.
“친구지.”
“좋소. 그럼 증명해 보이시오.”
“어떻게 말인가?”
“지금 당장 나를 그녀에게 데려가 주시오!”
그러자 마령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술을 마셨는데 오늘도 일을 방해해선 곤란하지.”
내가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 그러시겠지요.”
“다 자네 목숨을 생각해서라네.”
과연 마령인은 고수였다. 이럴 때 데려가는 것보다 더 애타게 해서 데려가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속절없이 그의 농간에 놀아났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이들이 그래왔을 것이고, 그 능력으로 저 자리에 있는 거겠지. 고작 꼬리가 이럴 진데 몸통이나 머리는 얼마나 대단한 자들이 있
을지.
“대신 오늘은 내가 거하게 한 잔 쏘겠네.”
“하하하. 좋소이다.”
마령인이 이렇게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뭔가 목적이 있다는 것이리라.
그날 나는 마령인과 기루에 가서 진탕 마시고 놀았다.
술에 잔뜩 취했을 때, 그는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먼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 꺼지겠소. 무슨 일이라도 있소?”
“아니네.”
“아니긴.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보시오.”
술을 연거푸 마시고 기녀들을 모두 물렸다. 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괴로운 심정을 드러냈다.
“황금대연이 열리면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곳에 올 것이네.”
“그렇겠지요.”
“그때 난 형을 봐야하겠지.”
“형이라면?”
“마철군 말이네.”
“아! 유력한 후계자인 마대협 말이군요.”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마대협? 웃기지 말라고 해. 그는 대협이란 이름이 붙어선 안 되는 인물일세. 겉과 속이 완벽하게 다른 인물이란 말일세.”
“그게 정말이오?”
“뒤에서 온갖 구린 일을 저질렀다네. 살인과 겁탈까지 저질렀지.”
마철군이 실제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마령인이 하는 말들은 다 거짓이거나 음해일 것이다.
“믿을 놈 하나 없는 강호이구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에도 마령인은 마철군에 대한 험담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를 죽어 마땅한 놈으로 만드는 작업 중인 것이다.
“그런 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겨야 하다니!”
괴로움을 표하며 다시 술을 거푸 마셨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아나? 놈에게서 후계자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네.”
“하지만 어떻게 되찾는단 말이오?”
마령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생각을 대신 말했다.
“그를 죽일 생각이군.”
마령인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취기를 빌린 절망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기에 더욱 강렬하고 애처로웠다.
나도 모르게 울컥 말했다.
“내가…….”
하지만 대신 죽여주겠다는 말을 삼켰다. 울컥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그렇게 하겠다고 할 사안도 아니었으니까.
마령인이 술잔을 들었고 내가 말없이 건배했다.
그것이 마지막 잔이었고 우리의 술자리는 여기까지였다.
* * *
며칠 동안 마령인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추도치가 찾아와서 간단한 일거리를 하나 더 맡겼다.
육천 냥짜리 악인을 처치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무명대협의 명성이 유지되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 이곳 정주는 황금대연 준비로 무명대협의 소문이 한풀 꺾였지만, 다른 지역은 여전히 무명대협의 인기가 하늘
을 치솟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악인을 처지한 일로 무명대협에 대한 화젯거리가 이어질 것이다.
나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친 후 추도치에게 마령인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마령인이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름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술이 과했네.”
“나 역시 너무 취해서 기억도 나지 않소.”
“내 주사를 잊었다니 다행이군.”
“한 가지는 생각나오.”
“한 가지?”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 당신 형에 관한 이야기.”
그러자 마령인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후 곰곰이 생각해 봤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내가 말했다.
“그 일 내가 대신 하겠소.”
“뭐라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우린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자네!”
마령인이 격정에 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안 되네. 자넨 죽고 말 거네.”
“어차피 일 년 후면 죽을 목숨이오.”
“지금 해약을 연구 중이지 않나?”
“그거야 개발되어야 개발되는 것이지. 내가 바보인 줄 아시오? 개발될 해약이었다면 벌써 되었겠지.”
마령인이 뭔가 말하려는 것을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말리지 마시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나서는 것이니까.”
“자네!”
“당신 덕분에 팔자에 없는 대협도 되어 보고. 돈도 벌어보고. 아름다운 여인도 만나보고. 친구도 사귀어 보았소. 원래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소.”
“그게 뭔가?”
“마철군은 황금대연의 마지막 날 죽이겠소. 내 인생의 마지막 축제인데 그 정도는 즐겨야 하지 않겠소?”
“친구!”
내 손을 잡는 마령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저 눈물 아래에서 그는 희열을 느끼며 웃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했다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결코 알지 못하리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 눈물은 진짜 눈물이 될 것이다.
* * *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추도치와 함께 장원으로 갔다.
물론 여전히 눈을 가린 채였다. 마령인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조직의 절대적인 규칙이라고 핑계를 댔다.
대신 나에 대한 마령인의 대우가 달라졌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봐 말 한마디 한 마디도 조심하고 신경 썼다. 내가 툴툴거려도 잘 받아주었고, 되도록 좋은 말로 ‘우리’를 강조했다.
물론 그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답게 내 마음을 붙들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을 썼다.
아끼고 아끼더니 오늘 드디어 임연정과 만나게 해준 것이다.
“내 소식 들었소?”
“어리석은 결심을 했더군요.”
그녀는 담담했다. 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목숨을 구해주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을 테니까.
“괜찮은 술친구가 생기나 했는데, 아깝군요.”
“내가 살 확률이 거의 없소?”
“없어요.”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군.”
그녀의 입술이 살짝 달싹거리다가 멈췄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만 것이다. 그냥 죽이긴 아까운 감정이 있는 모양이다.
“죽기 전에 궁금한 것이나 물어봅시다. 당신 조직은 대체 뭐하는 조직이오?”
“말해줄 수 없어요.”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그 정도 아량도 못 베푸오?”
중요한 순간이다. 제발 실없이 한 마디 툭 던져라.
하지만 그녀는 만만치 않았다.
“이제 곧 죽을 사람인데, 굳이 아량을 베풀 필요가 없겠지요.”
“냉정하구려.”
“강호는 냉정하다 못해 비정한 곳이에요. 당신은 사람 보는 눈도 없고, 귀도 막혀 있으며, 심지어 마음까지 약한 사람이에요. 죽어도 싸요.”
“그렇다고 이런 막말을 하시다니?”
난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소.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이제 황금대연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날 마철군을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게 주어진 시간은 십삼일이었다.
그 안에 이들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일단은 내가 마철군을 죽이는 칼이 된 이상, 여러모로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좋소. 그럼 이것은 대답해 주시오.”
“뭐죠?”
“이 방 건너편 방에는 뭐가 있소? 뭔가 강력한 기운을 느꼈소.”
당시 그 기운은 아주 노골적으로 내뿜어졌었으니까.
“아주 무서운 사람이 있어요.”
“무서운 사람?”
정녕 그 엄청난 기운이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었단 말인가? 솔직히 긴가민가했었다.
사람의 기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대했고, 다른 것의 기운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녀의 이 실험실처럼 내가 생각지 못한 어떤 것이 복합적으로 엮여서 저런 기운을 내뿜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기운이 온전히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라고?
맹주시절의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의 기운이다.
어마어마한 기운이란 뜻. 물론 느껴지는 기운이 강하다고 저 사람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호인들은 자신이 내뿜는 기도와 거의 비슷한 실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대체 누구지?
이 문을 들어와서 임연정이란 생각지 못한 변수를 만났다. 한데 건너편 문 너머에도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단은 내 계획대로 계속 배후조직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 있소?”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임연정이 나를 쳐다보았다.
“왜 묻죠?”
“마공자가 말하지 않았소?”
“무슨 말요?”
“역시 질투를 하고 있었군.”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바로 그때였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접니다.”
이호의 목소리였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이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온 사람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호가 임연정에게 말했다.
“조직에서 새로 사람이 내려와서 인사시키러 왔습니다.”
함께 온 여인이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칠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