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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에는(2)
문 앞에서 이호가 정중히 말했다.
“접니다. 마공자와 무명대협을 모시고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정확하게 누가 들어가는지를 말했다. 그만큼 안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조심한다는 뜻이었다.
이호가 문을 열자 부드럽게 열렸다. 이번에는 잠겨 있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들어오지 않고 가버렸다.
나와 마령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기에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방안은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도 전에 우선 강력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통 사람은 의원에서 맡을 수 있는 약향이라고 느끼겠지만, 나는 이 냄새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두 가지 성분의 냄새였다. 바로 영약과 독약의 냄새가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 냄새 속에 온갖 물건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커다란 구체였다. 구체에는 십여 개의 대나무 관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관 끝에는 다시 여러 개의 통이 있었다.
통들은 각기 색이 달랐는데, 아마도 여러 영약이나 독약이 그 통을 통해서 가운데 구체로 모여드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약물을 한 곳에 모으는 것만이 아니라는 듯 상자에는 끓이고 식히는 장치들이 붙어 있었다.
앞서 느꼈던 신묘한 기운은 저 구체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구체 내부에 들어 있는 약물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한옆에는 온갖 약재들이 쌓여 있었고, 뱀이며 지네 따위의 독물과 독충들이 들어 있는 상자들이 있었다.
반대쪽 벽에는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문자와 숫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이가 붙은 벽에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책상 위는 물론이고 그 주위에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여인이 한 명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섰을 때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물론 나는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인지했지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공간은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고, 반대로 그녀는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 방의 배경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묘하게 이 공간에 어울렸다.
마령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사람이 왔으면 얼굴 보고 인사라도 합시다.”
여인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쪽은 사람 아니잖아요?”
맑으면서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어봤는지 마령인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사람을 하나 데려왔소.”
“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요.”
마령인이 나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녀에 대한 호의를 느꼈다. 아마도 그녀는 마령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리라.
“시험이 또 실패했소.”
그러자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알고 있어요.”
그제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게다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굉장히 육감적이었다. 가슴은 컸고 허리는 가늘었으며 다리는 곧고 길었다.
저런 외모라면 절대 이런 곳에서 책이나 들여다볼 것 같지 않았기에, 이 상반됨이 그녀를 정말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거기에 하나 더.
그녀는 도무지 몇 살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얼핏 봐선 이십대 초반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삼십대 같기도 했다. 만약 삼십대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동안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굉장한 고수였다.
마령인보다도, 추도치보다도 훨씬 고수였다. 물론 나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 여고수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냄새를 맡았다.
“새 지원자인가요? 체취는 좋네.”
마령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내 친구요.”
“친구? 당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어요?”
그녀가 마령인을 힐끗 쳐다본 후 내게 말했다.
“저런 사람과 가까이 하면 일찍 죽어요.”
농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담도 아니었기에 뭐라 대답해야할지 애매한 말이었다.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소.”
“한데 왜 같이 다니죠?”
“덫에 걸렸소.”
“덫, 무섭죠. 특히 저 사람 덫은 아주 강력하지요.”
대놓고 말했지만 마령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데 당신, 뭔가 묘하네요.”
내게서 뭔가를 느낀 모양이다. 묘한 느낌은 내가 그녀에게 느낀 감상인데.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힐끗 마령인을 쳐다보았다. 그녀 표정은 마치 ‘이놈을?’이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마령인이 웃으며 말했다.
“덫을 놓아서라도 붙잡고 싶은 친구요.”
앞서 대화의 대답이었고, 동시에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이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에 그가 말한 ‘그것’이 바로 이 여인과 관련 있음을. 앞서 놈들에게 한 시험을 내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마령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험의 대상은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렇게 나를 죽이려 들면서 저런 웃음을 짓다니.
더는 흥미가 없었는지 여인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와 마령인이 방을 둘러보았다.
한 옆에 놓인 독물 앞에서 내가 물었다.
“여기서 대체 무엇을 만드는 거요?”
“약이네.”
“약?”
“복용자를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약이지. 동시에 자넬 살려줄 약이지.”
“설마? 이곳이?”
“그래. 불회란 말을 없애고 그 자리에 무적이란 말을 붙이려는 연구가 진행 중인 곳이네.”
다시 말해 불회마령단의 부작용을 없애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를 속였구려. 이미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
“그런 약에 해결방법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 하지만 일 년 내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네.”
마령인이 여인을 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소?”
그러자 여인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들이 와서 방해를 해서, 일 년에서 하루쯤 더 걸릴 수 있겠지요.”
마령인이 나를 보며 웃었다.
“걱정 말게. 일 년 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네. 내가 왜 이곳을 자네에게 보여주려 했는지 이제 알겠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령인이 다시 말했다.
“나를 믿게.”
그때 여인이 돌아보지 않고 불쑥 말했다.
“혹시 술 마실 줄 알아요?”
내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어 당황한 얼굴로 마령인을 쳐다보았다.
마령인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이오. 다만 혼자서는 마시지 않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옆에 걸려있는 옷을 챙겼다.
“잘 됐네요. 나와 한 잔 해요.”
혹시라도 마령인이 따라붙을까 그녀가 먼저 말했다.
“둘이서만 마실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꿈도 꾸지 마세요.”
* * *
반 시진 후, 우린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눈을 가린 채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은 이호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는 이호가 따라 움직였다. 지금도 그는 주점 밖에 세워둔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호의 주된 임무는 마령인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지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며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꼭 안주를 챙겨 먹었다.
“술만 마시면 속 버려요.”
“건강 생각하면 그런 지하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 될 것 같소만.”
“일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이 있소? 그냥 두 눈 질끈 감고 이대로 어디론가 가버리면 되지 않소?”
“도망가 버려라?”
‘팔자 좋으시네’라거나 ‘무책임하긴’등의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만 해도 좋네요.”
이 순간 그녀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그 일은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봐도 묘한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저 관능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적인 느낌이 있었다. 구체에서 나오는 신묘한 기운만큼이나 그녀도 신비함을 지니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여인이 지하시험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령인이 대하는 태도나 이호가 따라붙는 것만 봐도 그녀는 이 조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름이 뭐요?”
“당신이 남의 이름을 물어볼 처지인가요?”
방에 들어갈 때 이호가 무명대협이라 소개했기에 하는 말이었다.
“내 이름 없는 것도 답답한데, 마주 앉은 사람 이름도 모르니 정말 답답해서 그러오.”
이런다고 쉽게 이름을 알려줄 것 같지 않았는데, 뜻밖에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임연정(林燕情)이에요.
“오, 좋은 이름이오. 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건배합시다.”
그녀가 기분 좋게 건배했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아주 술을 잘 마셨다.
“대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거요?”
“먹고 살기 위한 연구지요.”
하지만 술김에 말실수를 하진 않았다. 그녀는 빈틈이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추측할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이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틈틈이 질문을 던졌다.
“마공자와는 어떻게 알게 됐죠?”
“우연히 알게 되었소.”
나는 어린 소녀를 데려다 기루를 운영하던 조벽을 통해 암어를 발견하고 이곳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신은 원래도 협객이었군요.”
“협객? 아니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 뿐이오.”
임연정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이럴 때의 그녀는 전혀 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인상과 느낌만으로 누군가를 단정하고 평가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마공자를 알게 되었소?”
“당신보다는 훨씬 시시한 이유에요.”
그녀는 대답 대신 술을 마셨다. 대부분의 내 질문이 그러했듯, 이 역시 대답해 주지 않는 범주의 질문인 것이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다 깔깔 웃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다. 감정을 종잡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근래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대상으로 처음 본 나를 선택한 것을 보니, 그녀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령인을 보면 꽉 차 있는 느낌이다. 그것이 악이든 야망이든 그는 꽉 차 있다. 이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에게선 여백이 느껴진다. 마음의 여백 같은 것이.
술을 세 병이나 비운 후에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경쟁이라도 하듯 술 마시는 데만 열중했기에 시간이 많이 지나진 않았다.
술을 다 마시고 나가려던 그녀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강호에서 나쁜 놈을 사귈 때면 더 나쁜 놈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죠.”
“마공자가 그리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소.”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귀라도 열고 살아요.”
* * *
임연정이 장원으로 돌아왔을 때, 마령인이 그녀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서 잘 노셨소?”
“당신 얼굴을 안보니 술이 절로 넘어가더군요.”
“그렇게라도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마령인이 불쑥 말했다.
“그에게 연구 중인 해약을 복용시킬 거요.”
순간 임연정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의 눈가에 살짝 서글픔이 스쳤다. 완성되지 않은 해약을 복용하면 죽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보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힘으로 폭주하다가 결국 칠
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되는 것이다.
“영리한 자요. 며칠 사이 치료약이 개발되었다면 믿지 않을 거요. 그냥 치료를 위해 일차로 먹어야 되는 약이라고 하시오.”
“내가 싫다면요?”
“그럼 마시든지.”
마령인이 굳이 야비한 협박을 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마령인의 부탁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복용 날짜는?”
“열흘 후, 황금대연 개막식 날.”
“알겠지만 복용시키기 전에 그를 이곳에 데려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
“그 일을 쉽게 처리하려고 술 마신 것 아니오?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알아서 하라는 능구렁이 같은 말에 임연정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마령인이 더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섰다.
“나도 돕겠소. 그러니 계획대로 진행하시오.”
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마령인이 떠보듯 물었다.
“놈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이오?”
“첫눈에 딱 느낌이 오는 사람이 있지요. 당신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난 어떻고, 그는 어떻소?”
“정반대란 것만 아세요.”
“그 사람, 아주 후한 평가를 받았군. 하하하.”
마령인이 방에서 나오려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친구라면서?”
반면 마령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 사람 아니라면서요?”
문을 닫는 손길에 약간의 신경질이 담길 법도 했건만 그는 정중하고 조용히 닫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