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93화 (9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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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와 허위 사이에서(3)

다음날 추도치가 찾아왔을 때, 나는 당당히 요구했다.

“돈이 좀 필요하오.”

“갑자기 무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신들을 만난 것이 길가다 똥 밟은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더란 말이오.”

“이 자식이!”

하지만 추도치는 평소처럼 죽일 듯이 눈을 부릅뜨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죽을 놈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이런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제대로 협객이 되고 싶소.”

“그게 돈과 무슨 상관인가?”

“왜 상관이 없겠소? 좋은 검도 필요하고, 좋은 보의도 필요하고. 번 돈을 흥청망청 기루에 쏟아 붓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소.”

“협객이 아니라 한 몫 잡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래서 얼마가 필요하단 것인가?”

“이만 냥만 주시오.”

“뭣이?”

추도치가 인상을 그었다.

“이런 미친! 이만 냥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는가?”

“아닌 줄 아니까 당신에게 달라는 것 아니오? 가서 내가 한 말 마공자에게 그대로 전하시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면서 추도치가 객잔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불손한 의도에는 마땅히 응징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나를 영웅으로 만든 후 마철군을 죽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 기꺼이 영웅이 되어주마. 대신 합당한 대가는 지불해야지.

미래의 무림맹주 자리가 달린 일이다. 마령인은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황금대연이 열리기까지는 이십여 일이 남아 있었다.

그 전에 지하밀실에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서 어떤 시험이 벌어지는지. 불회마령단은 어떻게 구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만 이후 일을 어떻게 대처할지 계획이 설 테니까 말이다.

* * *

“그 미친놈이 이만 냥을 요구했습니다.”

추도치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히 비슷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던 마령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내주게.”

“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았다.

“그 돈, 내주게.”

뒤늦게 추도치가 화들짝 놀랐다.

“안 됩니다!”

아무리 놈이 필요하다 해도 이만 냥이란 거금을 그냥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무 큰 액수입니다. 정 주실 거면 몇 천 냥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하지만 마령인은 이미 돈을 내주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이런 놈 처음이지 않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물로 삼을 놈이 스스로 몸값을 올리고 있지 않느냐는 말일세.”

마령인은 이것을 운명의 시험이라 생각했다. 무림맹주가 되기 위한 길이다. 그 대업이 스스로 제물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 큰일을 이루려는데 이 정도 투자도 하지 않을 것이냐며.

“그래도 이만 냥은 너무 큰돈입니다.”

추도치는 결사반대였다. 아무리 쌓인 재물이 많다지만, 그래도 이만 냥이라니?

충성을 다해온 자신조차 받아보지 못한 돈이었다. 그런 큰돈을 놈에게 주려니 질투와 분노, 없던 돈 욕심까지 생겼다.

“많이 투자될수록 얻는 것도 많은 법이지. 내어주게.”

내어주란 말에 묵직한 힘이 담겼다.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추도치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뒤에 ‘빌어먹을’이란 말이 생략된 대답이었다.

* * *

다음날 추도치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이만 냥을 내던지듯 전해주고 갔다.

반쯤 깎여서 만 냥 정도 받을 각오까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이만 냥을 다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과연 마령인 그 놈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현상금으로 받은 만육천 냥에 이만 냥까지 삼만육천 냥을 벌었다. 단시간 내에 엄청난 액수를 번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무림맹에서 받은 현상금과 마령인에게 받은 돈이 소액전표가 아니란 점이었다. 다시 말해 추적하려 들면 추적이 가능한, 그래서 무명객은 사용할 수 있어도 벽리단은 사용할 수 없는 돈이었

다.

그렇다면 굳이 이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

나는 곧장 돈을 가지고 흑시 정주지단을 찾았다. 큰 도시답게 정주지단은 산동의 흑시보다 규모가 컸다.

이곳 흑시의 주인장은 예의와 친절을 갖춘 중년인이었다.

“영약을 사러 오셨다고요?”

“그렇소. 쓸 만한 영약이 있소?”

“아쉽지만 본 지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영약은 없소이다. 누가 사재기라도 하는지, 요즘 영약 구하기가 참 어렵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흠칫했다. 근래 영약을 구하기 어려운 시기란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앞서 여러 번 흑시를 이용해 봤으니까.

한데 사재기란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혹시 이놈들이 영약을 사재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하에서의 은밀한 시험을 본 탓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이만 냥을 서슴없이 내 줄 정도의 재력을 지니고 있다.

마령인이 꼬리라면 손발도 있을 테고 몸통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영약을 사들이고 있었다면?

확실하지 않은 추측이었지만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영약 말고 다른 좋은 것들도 많이 있소. 한 번 둘러보시겠소?”

“그럽시다.”

어지간하면 돈을 쓰고 갔으면 해서 난 그를 따라 병장기가 진열된 곳으로 갔다.

규모가 규모이니만치 산동의 흑시보다 무기 종류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난 검은 쳐다보지도 않고 통과했다.

“좋은 검들이 많이 있는데, 왜 보시지 않고?”

“검은 너무 비싸서.”

“하긴. 가장 비싼 것이 검이긴 하지요.”

혹시 살만한 것이 있나 둘러봤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생각해 볼만한 것이 호신갑 정도인데.

“호신갑은 어떤 것들이 있소?”

주인장이 몇 개의 호신갑을 보여주었다.

입고 전쟁터에라도 나가야 할 것 같은 너무 두툼하고 표나는 것이 구천 냥,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은 십사만 냥이었다.

싼 것은 너무 실용성이 없었고, 표 나지 않는 것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십사만 냥이라니? 너무 비싸구려.”

“비싼 만큼 제 값을 하지요.”

“내 목숨은 그만큼 비싸지 않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한 옆에 낚싯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저것은 뭐요?”

“과거 남해어옹(南海漁翁)이 썼던 독문병기라오.”

남해어옹은 십여 년 전에 죽은 사람으로 나와도 제법 친분이 있었던 이였다. 과거 사마외도와 싸울 때, 앞장서서 싸우기도 했던 사람이기도 했고.

“저것도 파는 것이오?”

“팔긴 파는 물건인데 한 가지 미리 알아야 할 것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아쉽게도 낚싯줄이 끊어져서 없소이다. 그래서 원래라면 칠팔만 냥은 받아야 할 물건인데, 지금은 만 냥에 팔고 있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낚싯대를 쳐다보았다.

“손님께서 사신다면 특별히 칠천 냥에 주겠소.”

과거 남해어옹의 명성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낚싯줄이 없는 낚싯대는 거의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원래 낚싯대로 무공을 펼치는 이들의 초식은 대부분이 낚싯줄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좋소. 칠천 냥에 사겠소.”

“오! 잘 생각하셨소.”

주인장은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던 낚싯대를 팔자 아주 기뻐했다.

나는 곧장 또 다른 물건을 하나 더 샀다. 바로 손목보호대였다. 이번에는 전시되어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랐다.

“전대의 권법고수였던 권웅(拳雄)이 차던 호완사(護腕蛇)라는 놈이오. 가볍고 아주 질기답니다.”

나도 호완사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다. 어지간한 도검은 당연히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수라명왕검의 예기를 버틸 정도는 아니었고, 천조검까지는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검강이나 검기가 아닌 검 자체의 예기를 기준으로 말이다.

“가격은?”

“한 쌍에 이만 이천 냥이오.”

“좋소. 이것도 사겠소.”

“잘 생각하셨소!”

주인사내의 입이 함박만 해졌다. 잘 팔리지 않던 낚싯대와 손목보호대를 하루에 팔아치운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보다 더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모르는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객잔으로 돌아온 나는 객방의 문을 잠그고 창문의 휘장을 닫았다.

그리고 곧장 한 가지 작업에 돌입했다.

우선 남해어옹의 낚싯대를 들었다. 내력을 주입해서 손잡이 부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손잡이가 분리되면서 빠져나왔다.

손잡이 안에 낚싯줄이 칭칭 감긴 가는 막대기가 나왔다.

과거 싸움터에서 남해어옹이 이 손잡이에서 낚싯줄을 꺼내 줄을 다시 매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남해어옹의 낚싯줄은 새외의 천잠사(天蠶絲)에 특수한 약품처리까지 해서 굉장히 질겼다. 남해어옹이 한 자루의 낚싯대로 강호의 유명한 고수가 된 것은 이 천잠사 덕분이었다.

나는 그것을 모두 풀어서 호완사에 겹겹이 감았다.

원래도 강하고 질긴 호완사에 다시 천잠사가 여러 겹으로 감겨지자, 정말 강한 보호대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낚싯대를 사고 곧장 호완사를 샀던 이유였다.

“하하하.”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선학비술을 사용하는 내게는 정말 실용적인 보호구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천잠사로 감자 이것은 기존의 호완사로 보이지 않았고, 소매가 좁은 무복 아래에 차서 다른 사람이 이것을 착용했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작업을 마친 후 창가로 가서 다시 휘장을 걷었다.

기분 좋은 햇살을 맞으며 잠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일은 지하밀실에 들어갈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만약 마령인이 여덟 호위를 데리고 외출했을 때, 잠입한다면?

일단 장원까진 찾아갈 수 있고, 지하로 내려가는 기관까지도 어찌어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지하 복도의 그 기관장치였다.

복도에 설치된 기관장치는 넷.

하나라도 발동하면 허사다. 내가 잠입한 것을 들키게 될 테니까.

복도를 날아서 건너간다면?

네 개 중 하나는 발동하지 않을까? 지하로 내려 보내던 기관장치의 움직임이 부드러웠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실력자가 만든 것이 틀림없다. 경공술로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잠입할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 * *

정주는 황금대연 준비로 바빠졌다.

곳곳에 무대들이 만들어졌다. 황금대연이 열리는 열흘 동안에는 갖가지 대회와 행사들이 열렸다. 비무대회에서부터 밤새 물건을 파는 야시장, 중원에서 유명한 악사들이 초대되어 악기를 연주하고, 연희단 패거리

들이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한바탕 축제가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단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공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이곳에서 무림맹주가 연설을 한다더군.”

돌아보니 마령인이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십 보 쯤 떨어진 곳에 여덟 명의 고수가 서 있었다. 가까이서 그들의 기도를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처음 예상한대로 예전에 죽였던 심황 정도의 고수들.

“무림맹주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해야 하지 않소?”

“공사는 구분해야지.”

“서로 정이 없는 것은 아니시고?”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미소를 지은 후 마령인이 화제를 돌렸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돈이 좋긴 하더이다. 일전에 주신 이만 냥은 정말 고마웠소. 솔직히 달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시원스럽게 주실 줄은 몰랐소. 마공자를 다시 봤소.”

내 솔직한 말에 마령인이 씩 웃었다.

“이제라도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군. 하면 그 돈은 어디에 쓸 작정인가?”

“아직은 모르겠소. 내가 일 년 후에 계속 살지도 모르겠고.”

굳이 흑시에 들렀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자넨 살 수 있네.”

한 점 거짓도 없는 눈빛으로 마령인이 말했다.

그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정말 이 표정만으로는 나조차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물론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무공보다는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는 쪽으로 재능이 타고난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사가 진행되는 곳으로 향했다.

“황금대연에 대해 알고 있나?”

“들어본 적은 있소.”

“정말이지 강호의 온갖 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다네.”

“볼만하겠군요.”

황금대연은 십오 일 후에 열린다. 그날 저 단상에 서서 마봉기가 연설을 할 것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울컥한다. 평생을 몸 바친 무림맹이 그런 색정광의 손에 넘어갔다니.

“궁금한 것이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소?”

“물어보게.”

“그 방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소?”

“궁금한가?”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소? 대체 무슨 재료를 구하는지도 궁금하고. 무슨 거창한 대법이라도 펼쳐지고 있는 것이오?”

마령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데 그때 방에 못 들어가게 한 그 사람은 누구요?”

살짝 마령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와의 관계가 아주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왜 묻는가?”

“수장인지 수하인지 궁금해서 물었소.”

“내 수하네.”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대의 취향은 건방진 사람을 좋아하시나보오.”

평소 나와 주고받던 말을 생각하면 한 번쯤 웃어줄 만도 했는데, 그의 표정은 더욱 경직되었다.

내가 모른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은 안 봐도 됐소. 이제 구경거리도 많은데.”

정말 원하는 것이 있으면 오히려 한 발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거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자는 밀어붙이면 더 강해진다. 오히려 한 발 물러나서 스스로 틈을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기관장치를 뚫는 것보다 마령인의 자존심을 건드는 방법을 선택했다.

“전에 당신이 말한 인연에 대해서 나도 생각해 봤소. 남자끼리 이런 말 하는 것 꼴사납긴 하지만, 당신과 나는 분명 어떤 인연이 있는 것 같소.”

경직되었던 그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마공자.”

곧바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이젠 한 번 기다려야 할 때다. 앞서 자존심을 건든 것과 지금 이 말이 어떤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기를.

이봐, 너만 처세술로 사람을 부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네가 독사라면, 나는 온갖 능구렁이들을 상대했던 사람이다.

어떻게든 그 문은 네 손으로 열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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