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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와 허위 사이에서(2)
다음날부터 다시 무명대협의 소문이 강호로 퍼져나갔다. 처음 퍼졌던 소문의 불길이 잦아들 때, 때마침 기름을 부운 것처럼 더 크게 타올랐다.
도살자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음행불은 일반인들에게 위해를 가한 악인이었다. 그것도 약하디 약한 여자들을 겁탈해온 음적이었다.
모두들 무명대협을 칭송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 협행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음행불을 제거하면서 사람들은 그런 의심을 완전히 버렸다.
새 영웅의 탄생에 기뻐했고 또 열광했다.
지금 저녁을 먹고 있는 객잔에서도 모두들 내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또 다른 나인 무명대협에 대해서.
“정말이지 대협의 존안을 한 번이라도 뵈면 소원이 없겠네.”
“천맹주가 돌아가시고 강호에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드디어 나왔군.”
“암, 영웅은 난세에 탄생하는 법인데, 그간 너무 평화로웠지.”
“이번 대협의 협행이 이곳 하남성에서 행해졌으니, 아직 이곳 어딘가에 계실지도 모르네.”
그러면서 사내 하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무심코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곧바로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이렇게 쉽게 무명대협을 만나겠느냐는 생각이겠지만,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이렇게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에 새삼 놀랐다. 보통 하나의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들어야 하는 것.
한데 스스로 퍼져나가는 이 소문의 불길은 순식간에 강호를 불태우고 있었다.
맹주로 있을 때야 갈사량의 보고로만 강호를 보았다. 이제 직접 보고 느끼는 강호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훨씬 더 생동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더 느낀 것은 강호인들이 영웅의 탄생에 애타게 목말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를 마지막 영웅으로 기억해 주는 것이 고마웠고, 나로 인한 평화로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말이 씁쓸했다.
누군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 앞에 앉았다.
“어떤가? 영웅이 된 기분이?”
놀랍게도 그는 마령인이었다. 호위는 밖에 두고, 혼자 객잔으로 들어온 것이다.
“얼떨떨하오. 그깟 놈 하나 죽인 것이 뭔 대수라고? 저들은 내가 무림맹에서 현상금까지 알뜰히 타간 것을 알고 있소?”
“안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네. 그것으로 좋은 일에 쓸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웃기는군.”
“자고로 영웅은 때를 잘 만나야 하는 법이라네. 같은 놈을 죽여도 다른 시기에 죽였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 것이네.”
“그렇겠지요.”
“암튼 축하주 한 잔 해야지. 자넨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니, 내가 상대가 되어 주지.”
그가 점소이를 불러 술을 시켰다.
“덕분에 영웅도 되고 돈도 벌어서 좋습니다만,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이오?”
“선물일세.”
“선물?”
“새 친구를 사귄 기념으로 선물을 주는 것이네. 한데 왜 그런 표정인가?”
“솔직히 말해도 되오?”
“해보게.”
“이 모든 일이 내게 덫을 치는 것만 같소. 당신 같은 대단한 사람이 굳이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도 이상하고.”
“자넨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군.”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를 믿으라고 한 사람치고 정말 믿을만한 사람은 없었소.”
“마지막으로 날 한 번 믿어보게.”
그가 잔을 내밀었지만 나는 건배하지 않고 혼자 마셨다.
객잔을 나온 마령인이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추도치였다. 마차에 타자마자 마령인이 말했다.
“저 자를 위해 한 건 더 터뜨려 주게. 마땅한 건수가 있나?”
“있긴 합니다만.”
“가장 큰 것으로 터뜨리게. 기왕이면 돈도 듬뿍 안겨주도록.”
“네.”
순순히 대답을 했지만 결국 추도치는 치솟는 의구심을 참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이 말씀은 꼭 여쭤야겠습니다. 대체 저 자를 위해 이렇게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네,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입니다.”
“조만간에 알게 될 테니 잠이나 푹 자게. 자, 출발하지.”
나는 객잔 이층의 객방 창문에 서서 마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차가 출발하면서 마령인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창가의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보란 듯이 휘장을 닫아버렸다. 옆에 있던 추도치가 봤다면 ‘저 건방진 자식이!’라면 화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거리감을 두면 둘수록 오히려 나에 대한 의심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일찍 추도치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때마침 객잔 일층에서 밥을 먹던 중이었다.
“식사 안했으면 같이 드십시다.”
“난 됐네.”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오래 산다고 하더이다.”
“오래 살고 싶나?”
“물론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들에게 묶여 있겠소?”
“또 다시 임무가 내려왔네.”
“뭐요?”
바쁘게 음식 사이를 오가던 내 젓가락질이 처음으로 멈췄다.
“나 아직 색마놈 잡고 탄 현상금도 못 썼소.”
“나중에 한꺼번에 쓰게. 이번에도 보상이 두둑하니까.”
내가 그를 노려보았다. 추도치는 그래 봤자 네가 어쩌겠느냐는 태도였다.
“좋소, 미운 놈 일 시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내게 돈벌이는 왜 해주는 거요? 고아 놈 데려다 동냥질 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 콱 죽이고 다 뺏으려는 것 아니요?”
“우리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러겠나?”
“그럼 왜 이러냐고!”
물론 추도치도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말해주지 못하는 그도 짜증이 나겠지.
“자, 이거나 받게.”
그가 내민 종이에 악인의 이름과 위치, 그가 저지른 악행 등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것으로 이들 조직의 성격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기적인 놈들!
이렇게 악인들의 행적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잡지 않는다. 이들은 철저히 자기 조직에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 적힌 악인들보다 너희들이 진짜 악당들이다.
* * *
이번에 잡은 놈은 종백(宗帛)이라는 이름의 전직 살수였는데, 하남에 터를 잡고 암살 일을 하던 자였다.
강호에 널리고 널린 것이 살수들이라지만, 이놈의 문제는 돈이라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고 아이까지 죽이는 잔인한 놈이란 점이었다.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죽어갈 때가 되어서야 그는 나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차렸다.
“……너는 대체 누구냐?”
얼마 남지 않은 생기를 내쉬며 종백이 힘겹게 물었다.
“강호에서 흔히 무명대협이라 부르더군.”
“……어떻게 내 은신을 알아냈지?”
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집 안에 마련된 비밀 벽 뒤에 은신해 있었다.
그가 벽 뒤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맹주 시절, 내가 가장 많이 접한 적이 살수였다. 특히 사마외도와 전쟁을 벌일 때는 하루걸러 한 번씩 살수가 왔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아침저녁으로 살수가 온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살수에 대해서는 보고서를 쓰래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너, 살수였나?”
그것이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아마도 싸우는 내내 살수 특유의 감각으로 느낀 것이리라. 내가 자신에 대해서, 살수에 대해서 꿰뚫고 있다는 것을.
* * *
이번에는 하남성의 무림맹 서평(西平)지부가 발칵 뒤집혀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무명대협이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살수 종백의 시체를 가져온 것이다. 그에게 걸린 현상금은 자그마치 구천 냥이었다.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무명대협의 소문이 강호로 퍼져나갔다.
악인들에게 최후를!
무명대협은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고, 무공을 익히는 아이들의 꿈이 되었다.
마령인이 아니더라도 나는 무명객을 강호의 영웅으로 만들려던 참이었다. 한데 그 덕분에 손쉽게 내 목적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다만 마령인의 목적을 아직 알지 못했다. 바둑으로 따지면 지금은 선수를 내주고 있는 셈, 선수를 찾아와야 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내 손에 감시자가 둘 죽었다. 감시자가 붙는 날이 있었고, 아예 없는 날이 있었다. 내가 감시자를 벤 것에 대해 마령인이나 추도치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암어가 이끌어서 시작된 여정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광두가 걱정하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다들 현명한 이들이었다. 알아서 자신의 일들을 해내고 있을 것이다.
며칠 사이 내가 정보를 얻기 위해 공략한 곳은 정주무관이었다.
정주무관은 하남성에 있는 놈들의 본거지였다. 하남성 곳곳에 몇 곳의 지부나 안가가 있겠지만, 이곳이 중심이 되는 본거지라 확신했다.
우선 무관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적어도 이백 명 이상의 관원이 있었는데, 일반 관원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이들의 수하들일 것이다.
무엇보다 지하밀실이 있는 장원이 이곳 정주에 있었으니, 그곳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주요 거점을 이곳에 삼아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정주무관은 장원에 비해 경계가 훨씬 덜한 곳이다.
그곳에는 주로 추도치가 머물렀다. 나는 감시자가 없는 날이면 정주무관에 잠입해서 추도치를 감시했다. 그의 집무실에서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마령인이 서창문과 동검방을 들른 그날, 그는 이곳에도 일각 정도 들렀었다.
다시 말해 이곳에 다시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만의 대화를 들으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도치를 감시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드디어 마령인이 정주무관을 방문했다.
몇 가지 이야기가 오간 후, 내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무명은 뭐하고 있나?”
“그냥 평소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기루에 가서 놀고, 술 먹고. 싸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를 더 유명하게 해줄 방법을 찾게.”
“공자님, 이젠 말씀해 주십시오. 왜 그 놈에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푸시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네, 꼭 듣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질문은 틀렸네. 나는 놈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윽고 마령인이 지금껏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을 밝혔다.
“내달에 이곳 정주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가?”
“내달이라면? 황금대연(黃金大宴)이 열리지 않습니까?”
“그렇지.”
황금대연은 중원상인연합에서 일 년에 한 번씩 개최하는 상인들의 큰 행사였다. 대형 상단을 여러 개나 거느린 거부들부터 작은 규모의 상인들까지. 그야말로 중원 모든 상인들을 위한 축제였다.
황금대연은 열흘 간 펼쳐지는데, 상인들은 물론이고 무림맹주와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 거기에 강호의 명숙들까지 모두 참가했다.
“그때 형님도 오겠지.”
추도치는 마령인이 말하는 형님이란 바로 마철군을 의미함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눈을 껌벅이던 추도치가 화들짝 놀랐다.
“설, 설마?”
너무 놀라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을 뻔 했다.
그렇게 놀란 것이 무색하게끔, 마령인은 담담히 말했다.
“무명을 보내서 형님을 암살할 것이네.”
추도치가 경악한 채 침만 꿀꺽 삼켰고 마령인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무명은 지금 강호에서 대협이라 불리고 있네. 그런 자가 우리 형님을 죽이면 어떻게 될까?”
이제야 마령인의 진정한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후계구도에 있어 마령인의 가장 큰 적은 누가 뭐래도 마철군이었다. 천도문 내부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대부분 강호인들도 그가 후계자가 될 것을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는다면?
가장 강력한 후계자 후보는 마령인이 될 것이다.
외부에 알려진 것만으로는 나머지가 비슷비슷하게 평가받지만, 마령인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다른 후계자 중에도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추도치가 보기에 마령인을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무명은 실력이 대단한데다 내공까지 비약적으로 늘었지. 어떤가? 한 번 시도해 볼만하지 않나?”
“그렇지만 그가 마철군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마철군의 무공실력은 후계자들 중에서 발군이었다. 게다가 그의 주위에는 대단한 고수들이 많았다.
“설령 암살에 실패해도 상관없네.”
“네?”
“무명대협이 죽이려 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중요하니까. 사람들은 생각할 걸세. 그 정의로운 협객이 왜 형님을 죽이려 했을까? 뭔가 뒤로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아!”
그제야 마령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이 붙잡혀서 실토하면 어쩝니까?”
“놈은 암살을 시도한 날 죽을 것이네.”
“네?”
“우리에겐 그것이 있지 않나?”
‘그것’이란 말에 추도치는 소름이 돋았다.
아마도 마령인은 처음 만나던 그날, 무명대협이란 자를 데리고 간다는 자신의 보고를 받았을 때, 이 모든 것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의 계획에 추도치는 크게 감탄했다.
마령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 영웅을 더 크고 강하게 키우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정녕 이런 이유였단 말이지?
나는 내심 이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나를 어떤 시험의 제물로 삼을 것이라고. 그날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던 그 사내처럼.
하지만 이런 이유라니?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다.
과연 마령인이 말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장원의 지하밀실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빼앗겼던 선수를 되찾으며 내 입가에도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모르는 것이 문제지, 알면 대비할 수 있다.
좋아, 네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