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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와 허위 사이에서(1)
마령인이 도착한 곳은 서창문(西槍門)이었다.
서창문은 하남을 대표하는 두 개의 문파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의 문파는 동검방(東劍幇)이었다. 서창문과 동검방은 아주 오랫동안 경쟁하며 하남성의 대표 문파로 자리매김해왔다.
앞서 마정수가 산동에 내려와서 양소방에 선을 대려 했던 것처럼, 마령인은 이미 서창문과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떠들썩한 술자리가 열렸고, 한 시진 이상이나 계속 되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굳이 들으려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여덟 명이나 되는 호위를 뚫고 들을만한 가치는 없어 보였다.
특히 앞서 묘한 기운을 내뿜는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제지했던 그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마령인 주위에 은신하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는 분명 칠호보다 더 강해보였다. 무공도, 그리고 성정도.
한 시진 후 마령인이 서창문을 나왔다.
마차는 다시 장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곳을 향했다.
이번 역시 멀리서 마차를 미행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내 미행을 눈치 챌 수 없었다.
반 시진을 내리달려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앞서 서창문과 경쟁관계에 있는 동검방이었다.
이 놈! 양쪽을 다 흔들고 있구나!
과연 그곳에서도 떠들썩한 술자리가 한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그가 어떻게 양쪽을 주무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 특유의 어떤 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놈이 나를 대했던 방식을 생각해 보면, 상대를 만난다는 말을 당당히 하면서 양쪽을 이용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홉 개의 진실과 하나의 결정적인 거짓말을 이용해서.
그는 산동에 내려왔던 마정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기량을 지닌 자였다. 예전에 마정수가 그를 평가했던 말이 생각났다.
간사한 마령인이라고.
간사한? 그 정도 표현으로 어찌 저 능구렁이 같은 자를 평가할 수 있을까? 마정수가 잘못봐도 한참 잘못봤다.
동검방을 나온 마차는 이번에는 정주무관을 향했다. 아마 추도치를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 그곳에서는 일각쯤 머물렀다.
추도치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마차가 나왔다.
정말이지 부지런한 놈이다.
날이 밝았는데도 마차는 장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차가 향하는 곳을 보자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내가 묵고 있는 객잔 쪽으로 향한 것이다.
나는 경공술을 발휘해서 그들보다 한 발 먼저 객잔으로 돌아왔다.
이층으로 날아올라 창문을 통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마령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깨웠나?”
“아니오, 아직 자지 못했소.”
나는 굳이 자다가 깬 연기를 하지 않았다.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 들킬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 같은 날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젠 잠이 오지 않더이다. 그나저나 한잔 하셨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자네를 찾아올 걸 그랬네.”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하하. 역시 자네다운 반응이군.”
그는 까칠한 내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기분 좋게 웃었다.
“이대로 세워둘 건가?”
“들어오시오.”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을 둘러보았다. 풀어둔 것이 없으니 봐봤자 알아낼 것은 없을 것이다.
“잠이 안 오면 술이라도 한잔 하지 그랬나?”
“나는 술은 혼자 마시지 않소.”
“그랬군.”
“마령인이란 이름, 어제 기억이 났소. 무림맹주의 아들 중 유력한 후계자중 한 사람이 마령인이었소. 혹시 당신이오?”
“그렇다네. 바로 나라네. 그리고 여섯 후계자가 아니라 다섯 후계자가 되었지.”
“당신은 명문정파인데…….”
“왜 그런 지하에 틀어박혀서 수상한 짓을 하고 있느냐고?”
“그렇소.”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랬다지? 협객과 소인은 종잇장 한 장 차이라고.”
마차에서 추도치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랬소.”
“마찬가지 아니겠나? 명문이나…….”
대체 뭐냐? 너의 비교대상은?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충은 알 것 같소만. 젠장. 아침부터 술이 당기는군.”
그러자 마령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천 냥짜리 전표였다.
“오늘도 잠이 안 오면 기루에 가서 술 한 잔 하게. 계집의 분내를 맡으면 잠이 잘 올 걸세.”
생각지 못한 호의.
이 괴물의 꼬리는 자꾸 나를 보고 흔들어댄다.
내가 히죽 웃으며 전표를 챙겼다.
“고맙소.”
“고맙긴 한가?”
“솔직히 내가 쎈 척 하긴 하지만 밤새 잠을 못 잤소. 그쪽 수하도 여럿 죽였고. 그 불회…… 그건 다시 언급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걱정되고. 한데 내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것이오?”
“좋아. 왜 자네를 특별하게 대하는지 알려주지. 우선 자네는 그 귀한 불회마령인을 세 개나 복용하지 않았나? 같은 효과를 내는 영약보다는 싸지만 하나를 만드는데 상당한 시간과 거금이 들어간다네.”
“그 이유뿐이오?”
“물론 아니네. 내가 자네에게 호의를 느끼는 다른 이유가 있네.”
“그게 뭐요?”
“자넬 보면서 사람 사이의 인연이 존재한다고 새삼 느꼈네.”
“인연? 남자끼리 그 무슨 낯간지러운 말이오?”
“자넬 딱 보는 순간, 이 사람과는 인연이 깊겠구나란 마음이 들었지. 그냥 자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두지.”
내가 아니었다면, 보통의 이삼십 대 나이라면 그의 언변에 녹아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 냥을 턱 하니 내놓으며, 마음에 든다는데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아무튼 고맙소.”
내가 품을 툭툭 건드리며 히죽 웃었다.
“이 돈은 잘 쓰겠소.”
그날은 마령인을 감시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정말 기루에 갔다. 기루에서 가장 예쁜 기녀를 불렀고, 가장 비싼 술과 요리를 시켰다.
그녀와 술을 마시며 낄낄대며 놀았다. 감시자에 대한 경계를 아예 하지 않았다. 왠지 오늘은 그가 나를 감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하루 쉬는 셈 치는 거다.
늦게까지 놀았지만 기녀와 잠자리는 하지 않았다. 흥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진짜 흥청거리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전생의 나는 여러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기녀든, 누구든 잠자리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다만 지금은 아직 파혼을 하지 않은 상태니,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좋아하는 여자 있으시죠?”
기녀가 내게 물었다.
“없는데?”
“아뇨, 분명히 있어요.”
“없다. 엉터리로 넘겨짚지 말거라.”
“여자들에게는 남자의 바람기에 맞서는 직감이란 것이 있답니다.”
“아서라. 이 오라버니는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기녀가 풋하고 웃었다.
“왜 웃느냐?”
“그냥요. 평생을 떠돌며 살았던 사내들은 그러거든요. 이제는 누군가에게 정착하고 싶다고요. 자유는 지긋지긋하다고요.”
“속지 마라. 널 유혹하려는 말이니까. 그런 사람들, 하루만 묶여도 미쳐버리려 할 거다.”
“그럴지도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기녀의 무릎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달을 쳐다보았다.
문득 환한 달 위로 송화린의 얼굴이 겹쳐지며 떠올랐다.
그녀는 잘 있을까? 열심히 수련하고 있겠지? 그녀와 저잣거리를 걷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 참 좋았는데.
그때 나를 내려다보던 기녀가 말했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기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생각했다.”
기녀가 깔깔거리며 창밖의 달을 쳐다보았다.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던 여인도 오늘은 마음이 편안한 기색이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참 곱네요.”
* * *
같은 시각, 송화린도 창가에 서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수란의 물음에 송화린이 대답했다.
“그 사람 생각.”
“네?”
수란이 깜짝 놀랐다.
“설마 벽공자 말씀이세요?”
“왜? 그 사람 생각하면 안 되나?”
너무 태연하게 물어서 수란이 당황했다.
“아뇨. 하지만 한 번도…….”
“그래, 한 번도 그 사람 생각한 적 없었지. 네게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네.”
수란의 당혹감은 곧 걱정이 되었다.
“아가씨, 혹시 무슨 고민 있으신 것은 아니죠?”
“없다. 그냥 네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한 것뿐이야. 그 사람 생각했다고.”
수란은 벽리단에 대한 송화린의 마음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분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잖아요?”
송화린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내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어.”
수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모습을 알면 알수록 그는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지.”
송화린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분명 ‘후회’였다.
이해할 듯 말듯한 표정을 짓던 수란이 힘차게 말했다.
“제겐 아가씨가 최곱니다.”
송화린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녀가 수란을 자신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수란이 다가오자 그녀를 어깨동무하며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 역시 한 번도 없던 행동이었기에 수란은 내심 당황했다.
‘확실히 변하셨어.’
송화린의 깊어진 눈동자에는 달빛이 가득했다.
* * *
다음날 내게 임무가 하나 내려왔다.
음행불(淫行佛)을 제거하라는 명령이었다. 음행불은 본래 하남성의 이름난 사찰의 무승(武僧)이었는데, 주화입마로 색정에 빠져들어 시주를 연속해서 겁탈하고 달아난 음적이었다.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놈은 하남성 일대를 누비며 여러 여인들을 겁탈했다. 이후 잠적을 했는지 소식이 없었는데, 오늘 내게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놈이 마공자의 적이오?”
“아니네.”
“한데 왜?”
“지난 몇 년간 잡지 못하던 음적이라네. 한데 이번에 운 좋게도 놈의 행적을 찾아냈네.”
함정?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설마 차도살인으로 음행불에게 내가 죽기를 바란 것일까? 하지만 왜? 굳이 나를 죽이려 든다면 손쉬운 다른 방법도 여럿 있을 텐데.
게다가 추도치는 한술 더 떴다.
“잡아서 무림맹 지단에 넘기게.”
“현상금까지 붙은 자요?”
“그렇네.”
“현상금은?”
“자네가 가지게.”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만 껌벅였다. 추도치는 나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뭐하자는 짓이오?”
“뭐하자니? 악인을 잡자는 것이잖나?”
“썅! 어디서 개수작이야!”
“입조심하게!”
차분하게 대답하던 추도치가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한발 물러났다.
“좋소. 왜 그를 죽이려는 것이오?”
“아까도 말했듯이 놈은 악인이지 않나?”
“당신도 못지않은 악인 아니오?”
추도치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나도 마공자가 이해가 되지 않네. 왜 자네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보아하니 그 역시 명령을 내린 마령인의 의도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좋소. 일단 잡아오겠소. 놈에게 쌓인 분풀이나 해야겠소.”
일단 이번 일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아직은 이 꼬리를 놓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 * *
이틀 후, 무림맹 정주지단으로 내가 들어섰다.
내 손에 질질 끌려온 자는 음행불이었다. 그는 온몸의 뼈가 박살나서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특히 아랫도리는 시뻘건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나와 싸우면서 가장 먼저 터진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현상금이 걸린 악적을 잡아왔소.”
입구를 지키던 무인들이 놀라서 물었다.
“저 자는 누구요?”
“음행불이오.”
음행불이란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음행불은 하남성의 무림맹 무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숨은 붙여서 데려왔으니 놈인지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거요.”
이후부터 정주지단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보고를 받은 지단주가 수하들과 함께 달려나왔다.
잡혀온 자가 음행불이란 것을 확인한 지단주 팽서(彭徐)는 크게 놀라서 내게 물었다.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시오?”
“강호동도들이 나를 무명객이라 불러주고 있소.”
“오! 무명대협이 바로 대협이셨구려!”
주위에 있던 지단의 무인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도살자 염화를 패죽이고 천도문에게 당당히 경고를 날린 무명대협은 강호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한데 이렇게 음행불까지 붙잡아 왔으니 절로 환호성이 터진 것이다.
현상금이 마련되는 사이, 소문을 듣고 지단 무인들이 내 얼굴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앞서 추가장에서 적들에게 둘러싸인 것이 엊그제 일인데, 이제는 영웅이 되어 군웅들에게 둘러싸인 것이다.
나는 그날 정주지단의 영웅이 되었다.
현상금은 자그마치 칠천 냥이었다. 그만큼 악행을 많이 저지른 자였다. 악인도 처치하고, 칠천 냥이란 거금도 챙겼다. 이번 일은 함정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마령인의 의도였다.
왜 나를 위해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