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어가 이끄는 곳에서(3)
겨눠진 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검 끝을 보지 않고 심황의 눈을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이네. 가져오면 입장시켜 주는 것이 초대장이지.”
그는 바로 추가장주 추도치였다. 앞서 사람들 앞에서 보였던 후덕하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다른 날카로운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성격이 상반된 쌍둥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방갓 좀 벗어보게.”
“싫소.”
내가 단번에 거절하자 검을 겨누고 있던 심황이 꿈틀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내 목을 베고 싶어 했다. 하지만 추도치가 등장한 이상 단독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경고했다.
“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네 무례를 참아주는 인내는 딱 한 번이다. 내게 검을 휘둘렀을 때, 이미 넌 그 기회를 사용했다.”
심황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이런 말에 겁을 먹을 실력이 아니었다.
추도치가 그를 말렸다.
“물러나게.”
심황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몇 발짝 물러선 상태에서도 여전히 나를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추도치가 내게 말했다.
“자네야말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자네 역시 살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뿐이니까.”
내가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암어를 해독한 곳에서 이런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얼굴은 보여주지 않겠다? 미녀도 아닌데 너무 비싸게 구는군.”
“어차피 얼굴 보고 돼지 잡는 것은 아니지 않소?”
추도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하긴 그렇기도 하군. 좋네. 그럼 초대장을 발부한 사람으로서 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겠지. 자네가 가져온 그 초대장의 주인인 조벽은 이미 죽었네. 한데 그의 초대장이 왜 자네에게 있지?”
“내가 죽였으니까.”
“하나만 더, 자넨 누군가?”
“아이를 납치해서 기루를 운영하는 놈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사람 정도라고 해둡시다.”
추도치가 날카롭게 나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완벽하게 내 기도를 제어하고 있었으니까.
“조벽을 죽이고 우연히 초대장을 발견했소. 그리고 여기까지 왔지. 자, 이제 내가 물읍시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오?”
추도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내 생일을 맞아서 손님들을 맞고 있네. 이곳의 자네들은 특별히 선택받은 손님들이고.”
“쉽게 설명하시오.”
“우린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싶은 사람에게 초대장을 돌렸다네.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오기 싫은 사람은 오지 말라고 했지. 이곳에 온 것은 자네들 의지였네. 아, 물론 자네는 호기심에서 온 것 같지만.”
“오늘 초청장을 보낸 사람이 몇이나 되오?”
내 물음에 추도치가 예리한 눈빛을 반짝였다.
“그건 왜 묻나?”
“몇 명인지 대답부터 하시오.”
내가 무슨 의도인지 궁금했는지 추도치가 순순히 대답했다.
“모두 일곱이네.”
“이 자리에 오지 않은 나머지 넷이 걱정되는구려.”
내 말에 추도치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 아마도 지금 이 시간이면 그들은 모두 제거 당했을 것이다. 추도치나 심황, 그리고 그 밖의 사내들의 실력으로 볼 때, 이들은 보통 조직이 아니었다.
추도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라도 자네 예상이 맞다면, 자네들은 운이 아주 좋다고 볼 수 있지. 적어도 자네들은 이렇게 살아 있지 않나?”
내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우릴 겁주는 말이기도 했다.
“우린 이 강호를 새롭게 바꾸려고 하네.”
“어떻게 말이오?”
“정의로운 강호, 협의가 있는 강호 말일세. 그래서 인재를 모으고 있네. 구태(舊態)의 강호인들이 지배하는 강호 말고, 자네들 같은 신진 무인들이 가꿔나가는 새로운 강호 말일세.”
내가 픽하고 웃었다.
“왜 웃나?”
“구태를 논하기에는 당신도 그리 젊어 보이지 않아서 말이오.”
추도치의 한 쪽 볼이 꿈틀거리며 눈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것 아니겠나?”
“우리 솔직해 집시다. 그냥 강호를 지배하고 싶다고.”
“대업을 도모하다보면 오해와 질시가 따르기 마련이지.”
“좋소. 내가 오해했다고 치고. 그래서 그 일에 동참하는 대가로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이오?”
“힘이네.”
추도치가 신호를 보내자 수하 하나가 쇠쟁반을 들고 나왔다.
쟁반 위에 놓인 것은 세 개의 환이었다.
“천공단(天工丹)이네. 단숨에 반갑자의 내공을 얻게 해주는 영약이지.”
다른 두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요즘 같이 영약이 귀한 시대에 반 갑자의 내공은 결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근래 영약을 사봐서 잘 아는 바다.
유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또한 자네들이 익힌 무공보다 더 상급의 무공을 전수해 주겠네.”
추도치가 나를 지목하며 다른 두 사내에게 말했다.
“저 자를 죽이는 사람은 저 자의 천공단도 가질 수 있겠지.”
강력한 유혹이었다. 두 개의 천공단이면 일 갑자에 육박하는 내공을 가질 수 있었다.
두 사내가 잠시 갈등했다. 우선 내 실력을 알 수 없으니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추도치를 여유롭게 대하던 모습은 더욱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유혹이 너무 컸다.
두 사내 중 하나가 튀어 나왔다. 다른 누군가가 먼저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하나는 나올 상황이었다.
사내의 검이 내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살짝 그의 검을 피하며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와 몸이 겹쳐지는 그 순간.
서걱!
어느새 내 손에 들린 비수가 그의 목을 그었다.
“끄으윽.”
사내는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춤을 추듯 주위를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자 남은 사내가 추도치에게 말했다.
“난 내 것만 먹겠소.”
혹시라도 상황이 변할까봐 사내가 성큼성큼 쟁반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천공단을 집으려는 그때, 내가 말했다.
“과연 그것이 진짜 천공단일까?”
내 말에 사내가 흠칫 얼어붙었다.
“한 번 가정해 보자고. 네가 이 강호를 먹고 싶어. 그런데 수중에 천공단이 여러 개 있어. 하면 그것을 네가 처먹어서 내공을 늘이겠어, 아니면 생판 알지도 못하는 놈을 불러다가 먹이겠어?”
사내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추도치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번쩍.
사내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추도치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이 들려 있었다.
정말로 보기 드문 쾌검으로 그는 심황보다 훨씬 강한 고수였다.
“오늘 장사는 망쳤군. 놈도 없애 버려라.”
기다렸다는 듯 심황과 뒤에 선 열 명의 사내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사방에서 압박하며 다가섰다.
쉬이익.
비수를 심황에게 던졌다.
심황은 몸을 틀어 피했다. 물론 그 비수로 심황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비수를 던진 후 곧장 그에게 쇄도했다.
심황이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쉭! 쉭! 쉭! 쉭! 쉭!
그의 검이 눈 깜박할 사이 다섯 군데의 허공을 격했다.
날아들던 내가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서 오른쪽에 있던 사내를 덮쳤다. 애초에 첫 목표는 그였다. 비수를 던지고 심황에게 달려든 것 전체가 허초였던 것이다.
휘이익. 꽈당!
그의 몸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주변의 사내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그냥 뒤로 자빠졌을 뿐인데, 첫 번째 사내는 이미 절명한 후였다. 반면 나는 용수철처럼 뛰어올라 그 옆에서 망설이던 사내를 덮쳤다.
퍼억!
내 주먹이 그의 턱을 강타했다. 턱이 박살난 그를 방패삼아 다음 사내를 향해 밀어붙였다.
쉬이익!
뒤쪽 사내가 다급히 검을 내질렀다.
당황한 사내의 검이 동료를 관통하며 뒤쪽의 나를 노렸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대응이었다. 나는 가볍게 검을 피했고, 그가 다시 검을 뽑기도 전에, 방패가 된 사내를 타고 넘어 무릎으로 상대의 얼굴을 강타했다.
퍼억!
사내의 얼굴이 함몰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내가 바닥에 내려섰을 때, 앞서 내 목표가 되었던 세 사내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황이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고수다! 조심해!”
자신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고수였고, 수법 또한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심한다고 막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고수이겠는가?
나는 양떼 사이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종횡무진 그곳을 누볐다.
다수를 상대할 때 첫 번째로 고려할 일은 우두머리를 죽이는 것.
하지만 다짜고짜 우두머리를 향해 돌진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이 그러했다. 더구나 추도치가 뒤쪽에서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수하들을 먼저 제거했다.
때론 사정없이, 때론 그들을 방패삼아.
퍼억!
내 주먹에 사내하나가 주르륵 밀렸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사내를 걷어차 마무리하며 그대로 도약해서 다른 사내를 향해 쇄도했다.
쉬이이이익!
뒤에서 검기가 날아들었다.
심황이 날린 검기였다.
내가 몸을 낮추며 미끄러졌다. 검기가 내 머리 위를 지나쳐 내가 공격하려던 사내에게 적중했다. 사내의 몸이 잘려나가며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을 미끄러지던 내가 방향을 바꿨다.
쉭!
동시에 내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앞쪽에 있던 사내의 발목에 비수가 박히며 사내가 꼬꾸라졌다.
퍼억!
어느새 나는 그의 머리통을 걷어차며 그대로 뒤쪽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또 다시 등 뒤에서 검기가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나는 공격하던 사내의 시야를 최대한 가리다가 마지막 순간 몸을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쳐지나간 검기가 사내의 얼굴을 자르며 지나갔다.
심황이 ‘젠장’이란 말을 내뱉었을 때, 또 다른 사내가 내 주먹에 늑골이 박살났다.
내 공격을 기다리며 엉거주춤 서 있던 사내들에게 비수가 날아들었다.
피하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평소라면 이 정도 공격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겠지만, 겁을 먹은 몸은 이 생각지 못한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을 때, 날리는 것. 이것이 바로 비수를 보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열 명의 수하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이 새끼! 죽여 버린다!”
심황이 검을 내지르며 날아들었다. 확실히 심황은 고수라 불릴 만 했다.
그의 검은 빠르고 정확하게 내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이 대단한 고수임을 자각했고 그것이 분노와 합쳐져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쉭! 쉭! 쉭! 쉭!
하지만 아무리 사냥개가 화가 났다고, 혼자서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허점이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초식을 뚫고 그에게 파고들었다.
그가 놀라서 눈을 부릅뜨던 그 순간, 나는 그의 옆구리에 팔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반면 초식을 구사하고 있는 나는 더 없이 담담했다. 이 마지막 순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면, 우린 이 강호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겠지.
꽝!
심황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는 즉사했다.
이제 그곳에 남은 사람은 추도치였다.
그는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지, 혹은 다른 대책이 있었는지 달아나지 않고 있었다.
놈이 누군지 궁금했다. 이놈이 수장인지, 혹은 배후에 누군가 더 있는지. 배후가 있다면 그것이 마봉기와 연결된 자인지, 혹은 마봉기의 배후에 있는 자인지. 혹은 전혀 별개인 제 삼의 배후인지.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은 것이 고수라더니. 너 같은 고수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엇.”
그가 화들짝 놀랐다.
“……들어본 적이 있다. 무명대협이란 자가 박투술로 천도문의 도살자를 죽였다더니. 그게 너구나!”
내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무명객임을 확신했다.
“그대라면 아주 특별한 초청장을 보냈을 텐데.”
내가 천천히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천공단을 주워들었다.
냄새를 맡았다. 천공단과 비슷한 향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천공단이 아니었다. 맹주 시절 복용해 봤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때 천공단의 향에 어떤 다른 미세한 향이 섞여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불회마령단(不悔魔靈丹)!
확실히 반 갑자의 내공을 주는 영약이다.
하지만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가혹했다. 복용하면 칠 년 후에는 반드시 죽는, 악마의 영약이라 불리던 약이었다.
두 개를 복용하면 내공은 일 갑자를 얻을 수 있지만 수명은 삼 년이 되고, 세 개를 복용하면 일갑자 반을 얻지만 단 일 년만 살 수 있다. 그 이상은 복용하면 즉사한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회란 말이 붙었는데 과거 혈천신교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아무리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지만 영약은 영약, 제조하기에 막대한 돈과 자원이 들었다.
한데 멸망한 마교의 물건이 왜 여기에?
“어떤가? 자네가 그것을 복용하면 다른 자들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약속하지.”
“당신도 이것을 복용했소?”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그가 흠칫 했다. 어쩌면 놈도 이것을 복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불회마령단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조직이 있을 줄이야.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자네가 아니라도 내공을 준다면 앞뒤 가리지 않는 자들은 널려 있으니까.”
그가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보냈다.
덜컹, 덜컹, 덜컹.
그러자 사방의 문이 일제히 열렸다. 별채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바로 앞서 만났던 축하객들이었다.
백여 명이 넘는 그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모두 한 편이란 것을.
추도치가 앞서 내가 했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린 아는 사람에게만 초청장을 보낸다네.”
애초에 이곳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곳이었다. 아마도 생일연회는 수시로 열릴 것이다. 그때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대사를 하며 축하객 행세를 할 것이고.
살기를 드러낸 그들의 기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추도치까지.
사방에서 집중되는 살기를 느끼며 나는 차갑게 비웃었다.
“새로운 강호 좋아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