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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어가 이끄는 곳에서(1)
무한제일객잔이 저 멀리 보이는 지붕 위에 괴망량이 날렵한 경신술로 내려섰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칠호가 물었다.
“어떻게 됐죠?”
칠호의 물음에 괴망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놓쳤다.”
칠호는 깜짝 놀랐다. 괴망량이 비록 다리는 남들보다 짧았지만 경공실력은 조직 내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일부러 놓아준 것 아닌가요?”
이런 상황에선 의심부터 하라, 마치 그렇게 훈련된 것 같았다.
괴망량이 자조를 띠며 말했다.
“내 실력에 금칠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부끄럽게도 죽도록 따라붙었지만 놓쳤다.”
“그 자는 정말 고수군요.”
“고수 중의 고수다.”
두 사람은 이름 모를 사내가 염화를 죽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권법도 아니었고, 장법(掌法)도 아니었으며 각법(脚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박투술(搏鬪術)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달랐다.
“그런 무공은 내 평생 처음이었다.”
“동감이에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명령권자는 칠호였다.
“규칙대로 일단 돌아가서 보고해야죠.”
“알았다.”
괴망량이 먼저 그곳에서 사라졌다.
칠호가 돌아서려다 다시 한 번 객잔 쪽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앞서 사내의 모습이 뇌리에 남았다.
‘무공이 워낙 대단해서겠지.’
이내 그녀도 몸을 날려 그곳을 떠나갔다.
* * *
무한을 시작으로 무명객에 대한 소문이 전 중원으로 퍼져나갔다.
특히나 암살이 아니라 중인들이 보는 앞에서 천도문의 도살자와 천도사우 중 삼인을 격살한 것이었기에 그 놀람과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강호의 여러 곳들에 비상이 걸렸다. 그 중에서도 무림맹의 정의각은 발칵 뒤집혔다.
무림맹주가 아끼는 무인이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죽음을 당했다.
사마천은 당장 맹주전에 들어가서 마봉기에게 이번 사태에 관해 보고를 해야 했다.
마봉기의 성격상 앞뒤 가리지 않고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흉수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가 사람들에게 무명대협(無名大俠)으로 불린다는 것뿐이었다.
“대체 그 놈이 누구인가?”
사마천의 물음에 늘어서 있던 십여 명의 군사들 중 책임군사가 말했다.
“지금까지 활약한 적이 없던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단 말인가?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것인가?”
그의 불호령에 앞에 늘어선 책임군사는 물론이고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당장 찾아와! 당장!”
군사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그때 사마천이 갈사량을 불러 세웠다.
“갈군사! 자넨 잠시 남게.”
둘만 남자 사마천이 앞서의 노기를 거둔 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요즘 일은 어떤가?”
“할 만 합니다.”
“자네도 흰머리가 많이 늘었네.”
“제 나이도 이제 만만치 않으니까요.”
갈사량이 창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상관을 앞에 두고 실수를 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요 근래 갈사량은 무기력한 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다. 괴롭히려는 의도가 명백한 사마천의 과도한 일거리에 짓눌려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사마천의 경계도 점점 풀어지고 있었다. 괴롭히는 것도 하루 이틀인데다, 갈사량이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니 흥미가 떨어진 것이다.
사마천의 눈에 비친 요 근래 갈사량의 모습은 무기력하게 늙어가는 전직 총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혹시 이번 일, 짐작 가는 사람 있나? 자네라면 짐작 가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그 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 갈사량은 염화를 죽인 사람이 백표라고 생각했다.
풍주점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차에 이런 사건이 터졌으니까.
하지만 백표는 아니었다. 들리는 말로는 맨손으로 염화를 죽였다고 했다.
백표는 검술을 사용했다. 한 번도 권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해도, 염화를 맨손으로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굴까?’
자신의 경험상 이렇게 갑자기 그런 고수가 뚝 떨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 분명 누군가 신분을 감추고 등장한 것이 틀림없다.
갈사량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제 예상으로는 호연세가에서 보낸 자로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떤 사건이든 반드시 동기란 것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특히 이런 큰 사건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사마천이 고개를 끄덕였고 갈사량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염화는 노골적으로 호연세가의 제자들을 죽여 버려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습니다. 게다가 염화가 호연탁의 조모와 여동생을 잡아다 희롱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네, 제가 직접 목격한 이들에게 직접 진술을 받아서 알아낸 사실입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정의각에서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사건이었다. 다들 염화의 죽음과 그를 죽인 흉수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갈사량은 기존 군사들이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과연 다른 자들과는 다르군.’
사마천의 경계심을 높일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갈사량은 너무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도 의심을 살 것이라 판단했다. 오히려 이 정도 실력은 보여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리라 여긴 것이다.
“흉수는 분명 호연세가에서 보낸 자거나 적어도 호연세가와 관련이 있는 자일 겁니다.”
사마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결론이면 충분하다.
지금은 당장 달려가서 맹주에게 답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다.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봉기가 납득할만한 답이면 된다.
사마천은 갈사량을 괴롭히는 일을 잠시 멈추고, 그를 이용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이번 사건조사에 대해 자네에게 전권을 주겠네.”
“총군사님!”
“인원을 꾸려서 책임지고 흉수를 찾아내도록.”
“정말 감사합니다.”
갈사량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도 감격했다. 만약 이번 사건의 조사를 맡으면 근래 풀어진 경계심이 더욱 풀어지면서 숨통이 트일 것이다.
“지금까지 잡스러운 일만 계속 하게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이번 일을 해결하겠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갈사량이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눈빛에는 방안에서 보였던 피곤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무명객이라.’
사마천에게는 호연세가와 관련이 있다고 했지만, 호연세가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호연세가의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갈사량은 느낄 수 있었다.
뭔지 모를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 * *
나는 객잔 주위 공터에 홀로 서서 염화와의 싸움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와의 싸움을 통해 나는 선학비술이 칠성에서 한 단계 성장해서 팔성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익힌 기간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대단한 성과였다. 물론 어떤 무공이든 초반에는 성장이 빠르다.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보통의 경우 가장 큰 고비는 팔성부터 찾아온다.
선학비술이 십성 대성에 이르면 얼마나 더 강해질지 기대되었다.
대성을 이룬 선학비술이 추혼수라검법과 융합을 이룰 수 있을까? 그 과정이 내게 주는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내가 서 있던 그곳으로 광두가 달려왔다.
“도련님!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지만 모른 척 물었다.
“무슨 소식?”
“무명대협요! 무명대협이란 사람이 천도문의 도살자를 한 주먹에 격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천도문이 악행을 저지르면 박살을 내버리겠다고 공언했다고 해요.”
박살내겠다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강호의 소문이란 이렇게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소문이 과장되면 과장될수록 무명객의 이름은 더욱 크게, 널리 퍼질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였다.
“대단하구나.”
“무슨 반응이 이래요?”
“내 반응이 어때서?”
“혹시…….”
광두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녀석이라 혹시 나인 줄 알아차렸나 했는데.
“질투하세요?”
“하하하!”
“그러지 마세요. 도련님은 도련님대로 멋지시고 무명대협은 대협대로…….”
“대협대로?”
대답을 망설이던 광두가 결국 속마음을 말했다.
“굉장하잖아요!”
“멋지다와 굉장하다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광두가 못들은 척 감탄을 자아냈다.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서 당당히 나서는 것, 그게 바로 제가 꿈꾸는 모습입니다.”
광두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제 막 강호에 뛰어든 이들이라면, 어찌 그 소식을 듣고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광두야, 너는 알아야 한다.
그러한 협객의 삶이 밖에서 볼 때는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정작 그 당사자는 숱한 마음의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것을. 협행이 희생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기까지,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초라한 자괴감을 수없이 이
겨내야 한다는 것을.
“참, 그나저나 요즘 백무인이 안보이네요. 가보니까 풍주점도 닫았더라고요. 잠시 사정이 있어 쉬겠다는 내용만 대문에 붙어 있고요.”
“해야 할 일을 하는 중이다.”
“중요한 일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광두도 눈에 힘을 주었다.
“다들 열심이네요. 그럼 저도 수련하러 가겠습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미래의 대협님!”
“하하, 제가 대협은 무슨 대협입니까? 전 영원한 도련님의 백 년 후 칼받이입죠!”
저 멀리 뛰어가는 광두를 보며 피식 웃었다.
혼자 남은 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 수련을 시작했다.
칼받이든 대협이든 실력이 없으면 그냥 훅 가는 것이 이 강호였으니까.
* * *
무명객에 대한 소문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거셌다. 대협이란 말이 붙었을 때 이미 예상된 일이기도 했다.
호연탁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라는 강호의 여론이 들끓었다. 무명객이 그날 군웅들에게 했던 말이 퍼져나가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무림맹에서는 매랑과 호연숙정을 만나겠다고 발표했고, 두 사람을 만난 다음 날 무림맹 차원에서 호연탁의 죽음을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원래의 마봉기라면 여론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호연세가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마도 무명객이 호연세가에서 보낸 사람이라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이에는 이.
그래, 내가 원한 결과였다. 둘이서 박 터지게 싸워라.
호연탁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발표나면서 매랑과 호연숙정이 크게 기뻐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 일의 배후는 쉽게 밝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 일이라면 분명 가주급에서 결정을 내렸을 테니까. 아마 제대로 조사가 들어가면 어느 정도 선에서 꼬리 자르기를 하겠지.
하지만 매랑과 호연숙정에게는 조사가 시작된 것만 해도 큰 의미가 있었고 희망이 될 것이다.
매랑아, 걱정마라. 이 오라버니가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내가 네 손자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마.
* * *
저녁에 공수찬이 찾아왔다.
“태성상단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그가 품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오늘 찾아뵌 것은 그때 주신 장부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그에게 한 번 살펴보라고 장부를 하나 줬었다. 산동야상의 야천이 보관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다행히 장부의 암어가 저희들이 주로 사용하는 암어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장부를 쓰는 이들만의 암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돈이 오간 내역입니다.”
따로 내민 목록을 보니 산동의 몇 몇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산동야상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들이었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산동을 내 것으로 만들 때, 크게 도움이 될 자료였다.
“야천은 개인적으로 중원의 여러 상단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상단들의 수익률을 알아보니 상당히 높았습니다.”
“상계에 어떤 정보통이 있다?”
“네. 제 생각에는 야상들 사이에 통하는 정보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이들 밥상에 젓가락을 얹어 볼까 합니다.”
“우리가 드러나면 안 되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의 상단에 투자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까지도 몰리곤 합니다. 욕심을 내지 않으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하면 어떻게? 이미 야천은 죽었지 않소?”
“야천이 투자할 때마다 항상 함께 투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른 지역의 야상인 듯합니다. 그들의 투자를 주목하면 될 듯 합니다.”
“알겠소. 공총관이 알아서 해주시오.”
“네. 수익도 수익이지만 덕분에 제 투자안목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게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공총관이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잘 부탁하오.”
“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돌아서려는데 그를 내가 불렀다.
“참, 이것 한 번 봐주겠소?”
품에서 꺼낸 것은 화살촉 목걸이였다. 일전에 소녀를 데리고 기루를 운영했던 조벽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이번에 공수찬이 장부의 암어를 해독한 것을 보니, 문득 이것이 생각난 것이다.
화살촉 안에 보관된 종이를 꺼내 공수찬에게 보여주었다.
“이 암어를 해독할 수 있겠소?”
잠시 내용을 살펴보던 공수찬이 고개를 내저었다.
“굉장히 어려운 암어입니다. 미천한 제 실력으로는 무리입니다만 이것을 해독할 수 있을만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요?”
“바로 제 스승님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종총관이? 우리 집의 그 무뚝뚝하고 까칠한 종총관이 이 어려운 암어를 해독할 수 있다고?
공수찬이 확신에 찬 미소로 덧붙여 말했다.
“스승님이시라면 반드시 해독해 내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