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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격필살(2)
숙소로 돌아온 나는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피곤이 싹 풀리는 것만 같았다.
문득 아까 본 칠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정하리만치 무심한 표정과 눈빛.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고 들었어요.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고 대답했을 때, 그녀가 지었던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무한에 온 것일까?
염화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와 관련된 일 때문에 온 것이 틀림없었다.
지난 번 마정수 때처럼 그를 감시하는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염화를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예전과 달랐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진이 와서 보고했다.
“염화가 맹주에게 그날 협상에 나왔던 호연세가의 제자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맹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미친놈이군.”
“그렇습니다.”
이 소문이 퍼진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다시 말해 맹주인 마봉기가 그의 주장을 어느 정도는 묵인해 주고 있다는 뜻. 그렇지 않다면 절대 밖으로 흘러나올 소문이 아니었으니까.
“마봉기의 신뢰를 받고 있군.”
“천도문 시절부터 온갖 일들을 다 처리했으니까요.”
하긴 오죽했으면 도살자란 이름이 붙었겠는가?
“놈을 감시할 때 조심해. 제삼의 조직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다. 그들이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조직임은 확실하다.”
“그 엄청나다는 기준이 어떻게 됩니까?”
“적어도 무림맹과 같거나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진이 깜짝 놀랐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서 내 말이 사실임을 강조했다.
“조심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멀리서 조심해서 감시하겠습니다.”
“그리고 매랑과 호연숙정이란 이들이 무림맹을 방문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알아보고 보고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진이 물러났다.
밥이 반이나 남았지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매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남이라고 모른 척 해버리기에는 오라버니 소리치며 집으로 뛰어 들어오던 꼬맹이가 잊혀 지지 않는다.
* * *
다음날에도 염화는 무한제일객잔의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당연히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장사를 망친 객잔 주인장은 울상을 지었지만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객잔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제 염화가 돈을 뿌린 소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물론 그 일에 대해서 뒤에서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돈으로 인심을 사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객잔 근처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명인을 향한 군웅들의 시선을 즐기는 염화였지만 근래 그의 기분은 좋지 못했다. 호연남에게 기습을 당한 이후 염화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호연남 따위는 기습을 받았다 하더라도 손쉽게 이겨버릴 수 있어야 했다. 한데 까닥 잘못했으면 죽을 뻔 한 것이다.
그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빌어먹을!’
그날 자신이 검에 찔리는 모습을 본 호연세가 놈들의 눈알을 모두 파버리지 않는 한, 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도 알았다. 그 일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님을 강호에 알릴 수 있었다. 만만하게 보이면 온갖 놈들이 다 기어오르는 것이 이 강호 바닥의 생리였으니까.
술을 마시던 염화의 눈에 비어 있는 일우의 자리가 보였다.
“일우가 보이지 않는군.”
염화의 물음에 이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께선 어제 나간 이후로 통 보이질 않습니다.”
“어제?”
염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연락도 없이 날을 지새운 적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어딜 나갔지?”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멍청한!”
염화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세 사내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불호령이 떨어질까 이우가 재빨리 말했다.
“혹시? 어제 그 늙은 년 때문이 아닐까요?”
“호연탁의 할미라는 년?”
“형님은 어제 그 일이 있은 직후에 외출했습니다. 그 이후에 돌아오지 않고 있고요.”
“그것들의 행적은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어제 그 늙은 년이 말하는 것을 볼 때, 뭔가 귀찮은 짓을 저지를 것 같아서 사람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어제 그 길로 가서 맹주님을 뵈려고 했답니다.”
“맹주님을?”
염화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하지만 허가가 나지 않아서 못 뵙고 그냥 돌아왔다고 합니다.”
“개 같은 할망구가.”
염화는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며 고함을 질러대는 매랑의 얼굴이 떠올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보는 눈이 많아서 그냥 놔뒀는데, 고작 하는 짓이라곤.
“일우가 그 년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그년들 데려 와.”
“네!”
사우가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일우의 일 뿐만 아니라, 겁을 줘서 맹주를 보는 것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 호연탁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해대서 자신이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염화가 단숨에 비운 빈 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요즘 재수가 더럽게 없단 말이지.”
* * *
“할머니, 일어나셔서 식사하세요.”
호연숙정의 말에 매랑은 침상에서 등을 돌려 누웠다.
“생각 없다. 너나 가서 먹어라.”
“끼니를 거르시면 안 돼요. 힘을 내셔야죠.”
두 사람은 어제 무림맹을 찾아가서 맹주를 만나고 싶다고 수문장에게 사정했다.
하지만 맹주를 만날 수 없었다. 억울한 일이 있으니 꼭 좀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맹주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도 나올 법 했건만, 그들은 무림맹 수문장 이외에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기록을 남겨 놓으면 정식절차를 거쳐서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보통 한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할머니, 식사하시고 힘내셔야지요. 그래야 다시 찾아가지요.”
여전히 등을 돌린 매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연숙정이 최후의 방법을 썼다. 할머니에게 반드시 통하는 방법이었다.
“그럼 저도 굶을래요.”
과연 그러니 매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얀 년.”
돌아서 침상에서 내려오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자국이 보였다.
호연숙정은 할머니가 오라버니와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호연세가의 핏줄이라 해도 방계였고, 그 중에서도 유난히 힘없고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시고, 그나마 있던 가세도 완전히 기울었다.
이후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두 사람을 키웠다.
성장한 호연탁이 재능을 인정받아 호연남의 제자로 들어갔을 때, 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아직도 그날이 생생했다.
‘할머니.’
무엇보다 매랑의 건강이 너무나 걱정되는 호연숙정이었다.
두 사람이 일층 객잔으로 내려왔다.
자리를 잡고 밥을 시키려는데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소협은? 어제 뵈었던 그 분이시군요?”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해왔다.
우연히 만난 것 같겠지만, 그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이 그들이 이곳에 묵고 있다는 사실과, 맹주를 보려 했다가 거절당한 것까지 알아왔던 것이다.
“매 어르신과 호연낭자시군요.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호연숙정이 매랑을 쳐다보았다. 매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고마움도 있으니, 이 늙은이가 술 한잔 사겠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내 자리에 합석했다.
새로 술과 요리를 시켰다.
답답했는지 매랑이 술을 연거푸 마셨다.
“할머니, 천천히 드세요.”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만 같구나.”
내가 모른 척 물었다.
“외람되지만 어찌된 사정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어제 그녀들을 위해 나서준 것 때문에 나에 대한 경계심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사람이 생겨 반가운 기색이었다.
매랑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촌마을에서 자라다가 우연히 호연세가의 핏줄을 만나 사랑하게 된 이야기부터, 호연세가를 찾아가서 자결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도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
까지.
매랑의 말이 끝나자 호연숙정이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절대 자결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매랑이 취기에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암, 그렇고말고.”
호연탁은 능력도 있고 의지도 강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호연남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 테고.
“하면 이곳에는 왜 오신 겁니까?”
“맹주님을 만나서 오라버니의 죽음이 자결이 아님을 밝히려고 왔어요. 오라버니는…….”
호연숙정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음모에 빠져 죽음을 당했다면, 그 흉수는 호연세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가정이리라.
“걱정마라. 끝까지 안 만나주면 내가 무림맹 정문에 가서 드러누울 작정이다.”
매랑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매랑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쭈글쭈글 깊은 주름에는 손자의 원통한 죽음을 제대로 밝혀주겠다는 고집과 의지만이 가득했다.
운명이 그녀를 내 앞으로 데려왔다.
내 일이 바쁘니 그냥 보내라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이별했다.
하지만 내가 채 객잔을 나서기도 전에 나쁜 일이 벌어졌다.
나를 지나쳐 황급히 걸어간 사우가 매랑과 호연숙정이 앉아 있는 자리에 가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뒈지기 싫으면 조용히 따라오도록.”
* * *
무한제일객잔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세 사람이 걸어왔는데, 매랑과 호연숙정, 그리고 그들을 데려온 사우였다.
어제 두 사람을 봤던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도 노파와 젊은 여인이 끌려왔다는 사실에 다들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그때 이우가 나서서 사방으로 은자를 뿌렸다.
“염대협께서 특별히 내리시는 것이오!”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돈을 줍느라 북새통이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우가 한껏 비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사이 매랑과 호연숙정이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사우가 그들을 염화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혔다.
매랑이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우릴 왜 데려온 것이냐?”
“할망구, 흥분부터 하지 마! 물어볼 것이 있어서 데려온 것이니까?”
“물어볼 것이 있다면 네가 직접 와서 물을 것이지.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이 늙은이를 오라 가라 하느냐?”
염화가 인상을 썼지만 매랑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왜? 이 늙은이를 두들겨 패기라도 하려는 것이냐?”
“난 늙은이는 패지 않는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호연숙정을 힐끗 쳐다보았다.
매랑이 움찔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손녀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일이 있을까봐 무한에도 혼자 오려고 했는데, 기어코 숙정이 따라붙었던 것이다.
“물어볼 것이 무엇이냐?”
매랑이 한풀 꺾인 어조로 물었다.
“어제 누군가 너희를 찾아가지 않았나?”
“누굴 말하는 거냐?”
매랑과 호연숙정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전혀 속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염화가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켰다.
‘젠장! 그렇다면 일우는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저 멀리 무한제일객잔의 모습이 보이는 지붕 위에 칠호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녀 옆에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키가 작고 얼굴도 어려 보여서 얼핏 보면 아이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는 어른이었다. 난쟁이처럼 키 작은 그가 바로 이번 임무를 위해 함께 내려온 괴망량이었다.
괴망량은 조직 내 살수였다.
조직에서 인정한 최고의 살수들은 모두 넷, 괴망량은 그 중 하나였다. 지금껏 그가 누굴 암살했는지는 절대 비밀이었다.
괴망량을 데려가서 일을 처리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은, 상대를 제거하란 뜻이었다.
칠호가 나직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저 자를 제거하세요.”
괴망량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 제거하란 명령이 내려온 거냐?”
“네, 그래요.”
두 사람은 조금 이상한 관계였다.
명령은 칠호가 내리지만, 조직 내 직급은 괴망량이 더 높았다.
“천도문의 도살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역시 우리 조직은 대단해.”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맛있는 사냥감을 앞에 둔 야수처럼 기분 좋게 흥분해 있었다.
괴망량의 시선이 칠호에게서 객잔 쪽을 향했다.
“어라? 그런데 저건 무슨 상황이야?”
칠호의 시선이 그를 따라 객잔을 향했다.
누군가가 객잔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나는 객잔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멈춰라!”
이우가 앞을 막아섰다. 그 어깨 너머로 술을 마시는 염화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매랑과 호연숙정의 모습이 보였다.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목소리 또한 변조했기에 그들은 어제의 나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는 누군데 함부로 들어오려는 것이냐?”
“여기 객잔이지 않소?”
“뭐?”
“혹시 당신들이 통째로 빌렸소?”
내가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주인장은 겁에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우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객잔 밖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며 서서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놈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뒤에서 염화가 말했다.
“들여보내라. 객잔에 손님이 왔는데 받아야지.”
이우가 못마땅한 눈빛을 쏘며 옆으로 비켜섰다.
구경하던 이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한 채 나는 천천히 객잔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