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지 마라(3)
들판에 홀로 선 호연남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우선 송화린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비무를 져서가 아니었다. 이후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내 나이 스물에 욕정을 이기지 못했던 사부를 만나다. 내 인생에 그렇게 기록해 둘 거예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혔다.
말을 마친 그녀가 웃으면서 돌아설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이 여겨졌다.
달려들어서 송화린과 벽리단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은 살의를 느꼈다. 벽리단은 죽여 버리고, 송화린은 이 자리에서 겁탈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내가 저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날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순순히 보내 준 것도 사랑했기 때문인데.
바로 그때 한 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바로 벽리단의 전음이었다.
-염화님께서 그대에게 전하라고 하셨소. 당장 산동에서 물러나시오.
순간 호연남은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멍하게 서 있는 사이에 벽리단과 송화린은 떠나버렸다.
뒤늦게 호연남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찢어죽일 새끼가!”
그제야 이 모든 일이 도살자 염화가 꾸민 짓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랬군, 맞아.”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송화린이 자신을 만나자고 하고, 자신에게 이런 멸시를 줄 리가 없다. 도살자 염화가 뒤에서 그녀를 조종한 것이다.
“나를 망가뜨리기 위해 놈이 수작을 부린 것이다!”
동시에 자기합리화가 이뤄졌다.
‘그래, 화린이가 내게 이럴 리가 없지.’
이성적인 판단력 대신 불같은 증오가 그를 불살랐다.
염화의 전언을 받은 이상, 그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이유도,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호연남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이 새끼, 반드시 죽여 버린다.”
* * *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한 마디 전음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나도 모른다.
그가 올바르게 판단을 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헛소리가 될 테고, 악심을 품는다면 결국 자신을 해치는 칼이 될 것이다.
사흘 전, 기루에 갔던 호연남을 미행하고 난 후 나는 곧장 양소방에 전서를 보내서 이곳으로 세작을 한 명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도착한 세작에게 호연남과 염화를 감시하는 일을 맡겼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다.
내 방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와 백표의 아내인 정영을 만났다.
두 사람은 마치 친자매처럼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 정부인.”
내가 두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정영은 처음 왔을 때보다 표정이 밝았다. 이제 경직되고 긴장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명이는요?”
“글공부 중이에요. 부인께서 좋은 글선생이 계신 학당에 넣어주셨답니다.”
정영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이라 부르지 말고, 언니라고 부르라니까요.”
“……네.”
정영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성격상 조만간에 자매의 연을 맺게 되리라 생각되었다. 정숙하고 차분한 그녀가 어머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럴 때보면 어머니가 새삼 존경스럽다. 잘 돌봐 달라고 내가 부탁했다지만, 지금 어머니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은 단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차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정영 모자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 수 있었다.
이건 나이가 많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생의 난 칠십의 나이에도 이런 따스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내가 정영에게 말하자 그녀 대신 어머니가 슬그머니 말했다.
“난 며느리가 필요하단다.”
내가 못들은 척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뒤에서 두 사람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혼인 이야기로 수다의 꽃이 활짝 피기 시작할 것이다.
* * *
사흘 후, 내가 기다렸던 소식이 들려왔다.
호연남과 염화의 협상 소식이었다. 염화는 그들과 협상하기를 거절했는데, 호연세가 쪽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협상의 자리에서 호연남이 갑자기 검을 빼들고 염화를 공격하는 바람에 협상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했다.
결국 호연남은 그 자리에서 죽고 염화는 검에 찔려서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염화 못지않은 실력에 기습까지 했지만 호연남은 죽고 말았다. 이미 마음의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그가 어린 여제자를 겁탈하려 한 것을 반성했다면, 송화린과 비무가 있던 날 세가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목숨을 잃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형편없는 인간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곧장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산동야상으로 갔다.
그들 역시 협상이 결렬되고 그 자리가 피바다가 되었음을 전해 듣고는 한창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을 것이다.
천도문에서 나왔다고 하자 문을 지키던 사내들은 나를 야천에게로 안내했다.
야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도문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객청에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그들의 소맷자락에 암기통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 정도의 무공수위라면 모르고 당하는 것이 문제지, 이미 알고 있는 암기는 암기가 아니다.
나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감히 우릴 상대로 수작을 부리다니?”
내가 본격적으로 기도를 드러내자, 그 기세가 엄청났다. 간담이 약한 자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찔끔 지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감히 호연세가를 끌어들여 우릴 치려고 해?”
“오해십니다! 저는 단지 중재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호연세가의 늙은 자라새끼가 갑자기 기습하는 바람에 염대협이 크게 부상을 당하셨다.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 너희들 아니더냐?”
“저는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흥!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내가 코웃음을 치자 야천이 다급히 물었다.
“제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여주마.”
장내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야천은 물론이고 사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민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때 성질 급한 구철이 먼저 움직였다.
“개새끼! 네 놈이나 뒈져라!”
푸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구철이 들고 있던 암기통에서 암기가 발출되었다.
차앙!
내가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것을 튕겨냈다. 오히려 되돌아간 암기에 구철이 쓰러졌다.
푸아앙! 푸아앙! 푸앙!
연속해서 암기가 발출되었다.
창! 창! 차앙!
하지만 내가 검을 휘둘러 암기를 튕겨냈고, 암기를 날렸던 사내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마치 자신에게 쏜 암기처럼 여겨졌다.
“으아아아!”
남아 있던 사내들은 암기통을 내던진 손으로 자신들의 머리통을 감싸 쥐고 달아났다.
그들은 달아나게 놔두었다. 천도문에서 벌인 일이라고 소문이 나야 했으니까.
나는 검을 빼든 채 성큼성큼 야천을 향해 걸어갔다.
야천이 그 자리에 엎드리며 소리쳤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가 허공으로 검을 쳐들었다.
“호연세가에 주기로 한 돈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내리치던 검이 그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내 한마디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놈이 자신의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숨겨진 장치를 조작하자 책장이 열렸다.
“가시지요.”
“헛수작 부리면 그 자리에서 죽을 줄 알아라.”
“저는 제 목숨이 가장 중요한 놈입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야천이 나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 비밀창고가 있었다.
“이곳에서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까닥 잘못하면 독연이 뿜어져 나옵니다.”
그가 금고문을 열기위해 뭔가를 조작하던 바로 그때.
철컹!
갑자기 내 주위로 창살이 내려왔다.
창살 사이의 철망은 비수 하나 날릴 수 없을 정도로 촘촘했다. 나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만년한철로 만들어졌음을.
과연 야천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여유만만 했다.
“머저리 같은 새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기어 들어와서 설쳐 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그래?”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놈이 진짜로 금고를 열었다.
고유한 숫자를 넣어야 했고, 발아래의 장치에, 벽에 또 다른 장치까지. 순서에 맞게 이중, 삼중으로 정확히 눌러야 금고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금고 안에는 전표며 금붙이며 여러 서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놈이 한 옆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커다란 혁낭을 가져오며 투덜거렸다.
“젠장! 결국 튀어야 하는구나.”
놈은 산동야상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운 모양이었다.
“한 몇 년 새외에 짱 박혀 지내다 보면 수가 생기겠지.”
전표를 챙기다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것인지 알기나 아느냐? 언젠가 임산부가 남편을 찾으러 왔더군. 돈을 갚지 못해 내게 끌려온 이후에 소식이 없었거든. 애 아빠가 될 사람이니까 제발 풀어달라고 사정을 하더군.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아이를 낳을 때까지 가뒀다가 아이는 아이대로 팔고, 여자는 매음굴에 팔아넘겼어. 남편? 남편은 죽어서 개밥이 된지 오래였지. 이 새끼야, 내가 이렇게 번 돈이야.”
“네 놈에겐 지옥도 과분하겠군.”
나는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병신 새끼! 꼴에 강호인이라고 끝까지 잘난 척은!”
내가 천천히 수라명왕검을 뽑아들었다.
쉬이이익.
까앙!
과연 수라명왕검의 날카로운 날에도 창살은 잘리지 않았다.
놈이 비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개새끼야, 그거 만년한철이야!”
내가 수라명왕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징?
오랜만에 내 내력을 받아들인 수라명왕검이 길게 한 번 울었다.
검이 울자 야천이 흠칫 놀랐다.
내 검에 시퍼런 검강이 서리기 시작했다. 마치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수라명왕검에서 검강을 발출하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이이이잉!
검강으로 만년한철을 썰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아! 검강으로 안 잘려! 그렇게 쉽게 잘리면 그게 만년…….”
야천의 말문이 막히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어? 어?”
스르릉, 스릉.
계속 반복해서 자르자 쇠창살이 잘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썅!”
야천이 부랴부랴 달려가서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철컹.
쇠창살 주위로 철판이 내려와서 사방을 막았다.
치익, 푸하하학.
곧바로 창살 내부의 바닥에서 독연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크크크! 그냥 있었으면 곱게 죽여줬을 텐데. 그 독은 신산절명독(辛酸絶命毒)이다. 온몸의 혈맥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다 죽게 되는 독이지.”
쇠창살 내부가 독연으로 뒤덮였다.
다음 순간 야천이 두 눈을 부릅떴다.
치이이잉!
철판이 갈라지며 검날이 쑥 튀어나온 것이다.
마지막 발악이겠거니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이 움직이며 창살을 썰어대기 시작했다.
스르릉, 스르르르릉!
검날 사이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가 가득한 안에서 수라명왕검이 톱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검만 툭 튀어나와 움직이니까 더 무섭고 기묘해 보였다.
“어어? 어어어?”
야천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만 같았다. 독연 속에서 만년한철을 자르고 있다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으아아악!”
달아나려던 그가 빠르게 돈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벌! 너 뭐야? 귀신이야? 그래? 썅!”
욕설을 내뱉으며 그가 빠르게 돈을 주워 담았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이 돈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철컹.
바닥에 쇳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야천이 두 눈을 부릅떴다.
공포에 질린 그가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당연히 기겁을 할 수 밖에.
만년한철과 철판은 잘려나가 있었고 내가 독연 속에서 걸어 나왔으니까.
귀신을 보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며 야천이 부들부들 떨었다.
“장난이었습니다. 독연이 아니라 그냥 연기였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내가 미소를 짓다가 훅하고 바람을 불었다. 입안에 머물고 있던 독연이 그의 얼굴에 뿜어졌다.
“나도 장난 좋아하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독연을 마신 야천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으아아아아악!”
그가 온몸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처참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체 내가 왜 죽지 않았는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야천은 온몸의 혈맥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한 후 눈을 까뒤집고 절명했다.
놈의 시체를 향한 내 시선은 냉랭했다.
“아까 내게 했던 것처럼, 염왕 앞에서도 지난 죄들을 잘 진술해라.”
놈이 챙기다 만 나머지 전표를 모두 챙겼다. 모두 다 소액전표들이었다. 놈이 평생 축재한 재산이었다. 얼핏 봐도 액수가 수십만 냥에 달했다.
이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을 것이고 죽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제 이 돈은 좋은 사람들을 구하는 데 쓰일 겁니다. 그러니 원한은 잊고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전표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쓸어 담았다. 서류며 상자며 금붙이며, 그냥 다 담았다.
만년한철도 옮길 수 있게 검강을 이용해서 잘랐다. 무게가 상당히 나갔지만 대부분이 철망으로 이뤄져 있었기에 내 내공이라면 충분히 옮길 수 있었다.
한 옆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 서류들은 돈을 빌려주고 받은 차용증들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일 년이 지나면 원금의 몇 배를 갚아야 되는 어처구니없는 계약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남김없이 모두 다 태워버렸다.
오늘 이후, 놈은 죽었다고 알려질 것이고, 계약서가 모두 사라졌으니 돈을 갚지 않아도 될 것이다. 놈에게 돈을 빌려서 고통 받던 사람들은 내일부터 빚지옥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커다란 혁낭과 한철을 짊어지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늘부로 산동야상은 강호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