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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지 마라(2)
야천은 닳고 닳은 사내였다.
온갖 인간군상을 다 겪은 야천은 호연남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명성을 중요시하고, 칭찬 듣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대협께서 나서주신다면 도살자 따윈 푸줏간 고깃덩이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야 붙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호연남은 야천과 같은 자를 싫어했다. 밤의 상인이니 어쩌니 신비한 척 해봤자, 결국 염왕채로 이자나 받아 챙겨서 부를 쌓은 쓰레기인 것이다.
한데 찾아온 야천이 보자마자 납작 엎드리며 정말 존경한다면서 얼굴에 금칠을 해대는 통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상대가 천도문 아닙니까? 대협께서 이번 일을 해내시면 전 중원에 명성이 드높아질 겁니다.”
호연남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마봉기가 맹주가 된 이후, 천도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이때, 그들과 맞서서 좋은 결과를 이루면 그야말로 큰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도살자 염화를 제거해 버리고 싶은 욕심도 그 때문이었다.
그때 야천이 슬그머니 준비해간 혁낭을 한 옆으로 내밀었다.
“제자들을 많이 데리고 내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술이라도 한 잔 하시지요.”
술 한 잔 마실 돈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만 냥이나 넣었으니까.
“왜 이런 쓸 데 없는 짓을!”
호연남이 버럭 화를 냈지만 그렇다고 혁낭을 돌려주진 않았다.
야천이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작은 성의에 불과하니 부디 저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주시기를.”
“크흠.”
호연남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야천이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분위기를 살피고 사람을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난 그였다.
“한데 천도문이 맹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중원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야천은 천도문에 대해 운을 떼며 호연남의 반응을 살폈다. 돈까지 먹였으니 이제 그 값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나도 들었소.”
“특히 이번에 내려온 도살자 염화는 아주 악질적인 자라고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밖에서 호연탁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자 탁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호연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야천을 이곳까지 안내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일처리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말씀드릴까 합니다. 사부님께서 세세한 일들까지 일일이 관여하실 수는 없으니까요.”
“아,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호연탁이 슬쩍 사부의 눈치를 살폈다. 사전에 허락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고, 이렇게 자신이 나서서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부를 화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사부가 염화를 죽이겠다고 약속이라도 할까 걱정되어서 이렇게 나선 것이다.
다행히 호연남은 눈을 지그시 깐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이 나서면 염화 따위는 십초지적에 불과할 것입니다. 놈의 목을 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소 신중해야 할 일입니다. 염화의 뒤에는 결국 무림맹주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과 만나서 협상을 해 볼 생각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원하는지 알아봐야겠지요.”
“당연히 그러셔야겠지요.”
여기까진 야천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호연세가와 천도문이 자신 때문에 생사혈전을 펼칠 리는 없었으니까. 자신을 대신해서 제대로 중재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문제는 호연탁의 다음 말이었다.
“그러려면 야상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 도와야지요.”
“놈들이 돈을 요구할 겁니다. 미리 준비를 해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천은 내심 분통을 터뜨렸다.
‘이것들이 따로 돈을 더 내 놓으란 말이구나!’
호연세가에 줄 돈이 자그마치 이십만 냥이다.
도살자와 협상을 하든, 치고 박고 싸우든 그 이십만 냥으로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 아닌가? 따로 돈을 줘야한다면 왜 굳이 호연세가를 불러들였겠는가?
‘일이 이렇게 풀려서는 안 된다.’
야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나 이번 일로 큰 지출을 해서 금전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일에 관해서는 본가에 직접 말씀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야천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후안무치한 자들을 봤나?’
힘 있는 조직들이 하는 짓이 이렇다. 나는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니 윗선에 이야기를 해봐라, 그쪽에 이야기를 하면 실무진과 이야기를 해봐라, 사람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결국 지쳐서 포기하게 만드는 놈
들이다.
이후 일각쯤 이야기가 더 진행되었다.
야천은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려고 애썼지만, 호연탁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들은 명령에 따를 뿐이라며 발뺌을 하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호연남은 눈을 감은 채 아예 못들은 척 하고 있었다.
결국 야천이 내심 이를 갈며 자리를 떠났다.
호연세가에게 주기로 한 이십만 냥을 안줘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것도 쉽게 선택할 일은 아니었다.
천도문 이외의 적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인데다가, 매파 역할을 해준 강서야상의 입장도 있었다.
‘돈을 다 싸들고 숨어버려야 하나?’
그렇게 되면 산동야상이라는 노다지를 포기하고 평생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야천이 돌아가고 나자 호연남이 혁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너는 따라올 필요 없다.”
호연남이 혁낭을 들고 어둠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호연남의 뒤를 미행했다. 앞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호연남의 무공이 뛰어났기 때문에 아주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지만, 임독양맥 타통 이후 청각이 아주 예민해진 덕분에 적당한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야밤에 돈을 가지고 어딜 가나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호연남이 들어간 곳은 기루였다.
호연세가라는 명문의 이름난 고수가 홀로 기루를 간다? 정말이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최고 기녀들을 모두 불렀다. 만 냥을 모두 써 버릴 작정으로 진탕 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한 시진 후. 나는 기루의 한 방 앞에 기척을 감춘 채 서 있었다.
호연남은 방에서 기녀와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었다.
“헉헉……사부님, 사부님! 제발, 더 해주세요! 더, 더.”
기녀에게 저렇게 말해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듣고 있던 내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사흘 후, 나는 송화린과 함께 들판에 서 있었다.
이곳으로 호연남을 불렀다. 송화린이 직접 서찰을 써서 보냈으니 아마 그는 이곳으로 올 것이다.
기루에서의 놈의 실체를 본 후,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미루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송화린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장 서찰을 보내게 했다.
애초에 내가 이번 일에 개입한 가장 큰 이유는 그녀 때문이었다. 특히 중요한 일은 그녀의 마음에 깊이 남겨진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다.
저 멀리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호연남이었다.
그를 보자 송화린이 긴장했다. 아무리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 년이나 사부로 모셨던 사람이니까.
“준비 됐어?”
내 물음에 그녀가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비무에서 사용할 그 파훼법이라면 충분히 연습했어.”
대화를 하는 사이에 호연남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송화린이 주문을 외듯 혼잣말을 했다.
“사부라고 생각하지 말자. 저 사람은 그냥 내가 오늘 싸워야 할 상대일 뿐이야. 사부가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마지막 충고를 해주었다.
“굳이 네 사부가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저 사람은 네 사부야. 제자에게 욕정을 느낀 형편없는 사내지. 그조차도 술기운을 빌려서 사고를 치려했던 못난 놈이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게 네 사부다.”
내가 이렇게 말해주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너무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반대로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사부가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 때문에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는 말이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네 사부는 그냥 불쌍한 늙은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뒤로 한 걸음 빠졌다.
이제부터는 그녀의 싸움이다.
송화린의 시선이 다시 호연남을 향했다.
처음 사부를 다시 봤을 때, 그녀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온몸이 굳어질 정도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일이 떠오르면서 다시 온몸이 떨려왔다.
이렇게 떨리는데…… 그를 부정하지 말라고?
그녀가 벽리단을 돌아보았다.
벽리단은 그녀의 고민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송화린이 벽리단이 해준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래, 저 사람은 내 사부다. 그래, 망할! 내 사부지.’
호연남이 십여 걸음 떨어진 곳까지 걸어왔다.
송화린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부님.”
“잘 지냈느냐?”
“네.”
호연남의 시선이 그녀 뒤쪽에 서 있는 벽리단을 향했다.
태중언약을 맺은 자와 함께 있더라는 이야기를 호연탁을 통해 들었었다. 그래서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사내가 바로 그 언약자라는 것을. 송화린이 혼자 나올 줄 알고 내심 설렜는데,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벽리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이번 일은 송화린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왜 나를 보자고 했느냐?”
태연한 듯 말했지만 호연남은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반면 송화린은 차분했다.
“비무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호연남은 깜짝 놀랐다.
“비무를?”
“네. 사부님이 제게 가르쳐준 무공으로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사부님도 저도, 그 무공으로요.”
호연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송화린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호연남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하자꾸나.”
“감사합니다, 사부님.”
호연남이 검을 뽑자, 뒤따라 송화린이 검을 뽑아들었다.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송화린이 몸을 날리며 선공을 시작했다.
창창창!
호연남은 자신이 가르쳐 준 무공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비무가 시작된 지금,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다.
이제야 벽리단이 했던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기억해야 한다는, 오늘 믿을 것은 오직 수련을 했던 몸이라는 그 말을.
지난 사흘간 오직 이 초식들만 반복했다.
그래서 파훼법이 들어갈 때도, 특별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바로, 지금이야!
이런 마음조차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초식이 이어졌던 것이다. 자신의 한 수가 사부의 방어를 뚫고 들어간 것을 안 것은 호연남의 비명 때문이었다.
“아앗!”
비명을 내지른 호연남이 몸을 비틀며 좌측으로 돌았다.
벽리단이 알려준 두 가지 경우 중 후자였다. 초식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음을 알고 있는 경우.
두 가지 경우를 가르쳐주면서 벽리단은 말했다.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알고 있다면 더 최악인 거지. 알고서도 가르친 것이니까.”
쉬이이익!
그녀의 몸이 쇄도하며 호연남을 향해 검을 쑥 밀어 넣었다.
앞서 호연남이 지른 비명보다 더 다급하고 큰 비명이 터졌다.
“으헉!”
동시에 그녀의 검이 호연남의 어깨를 베었다.
파앗!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송화린이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자신이 사부를 이겼음을 깨달았다. 물론 사부가 호연세가의 독문무공을 사용했다면 결코 이기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배웠던 무공으로는 이긴 것이다.
호연남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송화린이 차분하게 말했다.
“사부가 가르쳐준 무공은 오늘을 끝으로 돌려드립니다. 앞으로 영원히 이 무공은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뭐?”
“그날의 일도 잊으려 애쓰지 않을 거예요. 내 나이 스물에 욕정을 이기지 못했던 사부를 만나다. 내 인생에 그렇게 기록해 둘 거예요.”
호연남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차라리 욕을 하고 원망을 했으면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송화린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그녀는 오랫동안 가슴에 체한 것처럼 남아 있던 것이 쑥하고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벽리단이 웃으며 서 있었다.
“잘 했다.”
내 한 마디에 그녀가 날아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싸움을 훌륭하게 해냈다. 오늘의 이 싸움은 그녀를 성장시키고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가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함께 걸었다.
뒤에서 호연남의 외침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
스스로의 화를 이기지 못한 고함이었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달려들 것 같은 위협을 느껴 그녀가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돌아보지 마라.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은 돌아보지 마라. 앞만 보고 살아가기에도 힘든 세상이다.”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그녀와 함께 그곳을 떠나갔다.
이대로 끝이냐고?
물론 아니다. 여기까지는 그녀의 복수다.
내 응징은 이제부터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조금 전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