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76화 (76/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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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가지 끝에(4)

송화린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수란이가 가져다 준 꿀물에 냉수를 몇 대접이나 마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아,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그때 문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죽도록 마셨지.”

돌아보니 벽리단이 서 있었다. 그를 안내해온 수란이 뒤에서 벽리단을 한 대 때려주는 시늉을 한 뒤에 사라졌다.

“괜찮아?”

“아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그럼 나를 깨문 것도 기억 안 나겠네?”

“뭐?”

송화린이 눈을 크게 떴다.

“깨물어? 내가? 당신을?”

벽리단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을 물다니? 자신에게 그런 주사가 있을 줄이야?

“다 말해 줘?”

벽리단이 회심의 미소를 짓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다 잊어 줘.”

말하고 나서 그녀가 피식 웃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속은 다 뒤집어졌지만, 후련했다. 정말 후련했다.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그에게 다 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감정이 욱해서 말한

것이었기에 후회가 될 법도 했는데, 후회는 없었다.

벽리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부를 만나러 갈 거야?”

“아니. 싫어.”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벽리단이 다시 말했다.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뭐?”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함께 가 줄게.”

송화린이 고개를 들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벽리단이 맑고 깊은 눈으로 물었다.

“그 늙은이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

송화린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흘러나온 그녀의 결론.

“아니. 사부는…… 형편없는 사람이야.”

제자를 겁탈하려는 마음을 먹은 이상, 실제로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한심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다.

인연의 가지 끝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꽃만 피는 것이 아니다. 때론 썩은 과실도 달릴 수 있는 법.

벽리단이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남길만한 가치가 없는 상처는 기회가 왔을 때 털어내야지.”

빤히 벽리단을 응시하던 송화린이 말했다.

“그 전에 다른 것 먼저 하면 안 될까?”

“뭔데?”

그녀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제발 해장부터. 속 쓰려 죽겠어.”

“하하하.”

벽리단이 크게 웃었다. 송화린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만난 이후, 그녀가 가장 활짝 웃는 순간이었다.

* * *

호연탁이 구가장으로 돌아왔을 때 사부인 호연남은 방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그는 오십대 후반의 나이로 귀밑머리가 허옇게 새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각진 인상이었는데, 얼굴 곳곳에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검을 바라보는 눈빛이 사뭇 공허한 것이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느낌을 주고 있었

다.

“사부님, 다녀왔습니다.”

“어찌 되었느냐?”

호연남은 여전히 검에 시선을 둔 채 질문만 던졌다.

“도살자 염화는 현재 명수장(明秀壯)에 머물고 있습니다. 함께 내려온 수하는 모두 다섯,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는 천도오우(天刀五友)라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무공실력이 만만치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호연탁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번에 사부와 함께 내려온 제자는 모두 열다섯. 비록 수적인 우세에 있다고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제자들도 있었다. 반면 도살자나 천도오우의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난 상태다.

사부가 염화를 맡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천도오우를 상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야상에서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검을 손질하던 손길이 신경질적으로 딱 멈췄다.

“겁이 나느냐?”

호연남의 차가운 질문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아닙니다.”

호연탁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렇게 정색하며 따지고 들 때면 사부가 정말 무서웠다.

“놈들이 다른 고수들을 불러들일 것을 대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 도살자 놈은 남의 힘을 빌리는 자가 아니다. 제 놈이 제일인 줄 알고 있지.”

“제자가 미처 거기까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러자 서릿발 같은 기세가 사그라지면서 호연남이 나직이 물었다.

“내가 왜 이번 일을 자청한 줄 아느냐?”

“왜입니까?”

“마봉기 같은 놈은 맹주가 되어선 안 되었다. 천도문 따위가 이 강호를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호연탁은 사부가 전대 맹주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인으로서의 천하진을 거의 신격화했다.

그런데 천하진이 죽고 마봉기가 맹주가 되었으니 천도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것이다.

이번에 야상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모두들 나서기를 꺼려했는데 호연남이 자청해서 나섰다.

“염화는 내 손으로 없애버릴 거다.”

그 말에 호연탁이 깜짝 놀랐다.

없앤다는 말은 절대 나와선 안 되었다. 원래 자신들이 이곳에 내려온 이유는 천도문과 산동야상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염화를 달래서 돈으로 해결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호연세가 가주인 호연세의 명령 역시 그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염화를 없애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부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이 되는 것은 사부의 실력이 그 자부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가 천하진을 그렇게 좋아한 것도 천하진이라는 인물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사부가 그를 존경한 것은 ‘천하제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부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것, 하지만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강호의 오직 한 자리, 사부가 좋아했던 것은 결국 그 호칭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사부는 평생을 천하진이란 인물을 두고 대리만족을 해왔는지 모른다.

천하진이 죽고 나서 사부는 더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다. 원래도 밝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더 어두워진 것이다.

“사부님, 제자는 걱정이 됩니다. 당연히 사부께서 염화를 없앨 수 있으시겠지만, 배후에 있는 자들은 천도문입니다.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호연세가가 아무리 강호사대세가 중 하나라고 하지만, 무림맹주를 배출한 천도문을 상대하기는 힘든 것이다.

염화를 죽이게 되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사부가 이렇게 나오자 더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가려던 호연탁이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참, 우연히 화린 사매를 보았습니다.”

순간 호연남이 흠칫하며 다시 검을 닦던 손길을 멈췄다.

“잘 있더냐?”

“네, 태중언약을 맺은 벽공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순간 호연남의 눈빛이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을 닦기 시작했다.

호연탁은 왠지 모르게 주위 공기가 더 갑갑해졌음을 느끼며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 * *

송화린과 뜨끈뜨끈한 국밥을 사먹었다.

집에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근처 객잔에 나와서 먹었다.

국밥을 다 비운 그녀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행복해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

덩달아 나도 속이 풀렸다.

“정말 좋네.”

맹주 시절에는 거의 모든 술자리에서 내력으로 주기를 배출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종종 술에 취한다. 광두와도, 백표와도, 그리고 그녀와의 술자리에서도.

“그럼 나를 업고 돌아간 거였어?”

“응.”

그녀의 양 볼에 살짝 홍조가 들었다.

“너도 술 많이 마셨잖아? 힘들었겠다.”

“긴장하고 마셔서 그런지 별로 안 취했어.”

“왜 긴장했는데?”

“네가 막 마셔대니까,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어젠 고마웠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이래저래 새삼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게다가 눈물까지 흘렸으니까.

“엄마가 돌아가신 날 이후에…… 어제 처음 운 것 같아.”

“후련하지?”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끄덕였다.

“전에 네가 물었지? 맹주를 왜 싫어하느냐고?”

“네가 싫어하던 사람이 맹주를 좋아한다고…… 아, 설마?”

“맞아. 사부가 맹주를 좋아했어.”

“그랬었구나.”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런 놈이 좋아했다니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내 기분과는 별개로 이번에도 또 느꼈다. 벽리단의 삶이 또 다시 전생의 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녀가 여전히 두렵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부를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날 일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지. 정식으로, 아주 제대로.”

“그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말을 하고 안 하고, 사과를 받고 안 받고. 별 것 아닌 것 같겠지만 큰 차이가 있다.

“과연 사부가 사과를 할까?”

“만나보면 알겠지.”

물론 사과를 받게 하려는 것은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목적이다.

나는 나대로 그를 조사할 작정이다. 만약 그가 화린이에게 저지르려고 했던 일과 별개로, 다른 악행으로 죽어 마땅한 자라면, 그녀에게 사과를 하게 한 후 내가 죽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시시한 늙은이라면, 어차피 이래저래 흘러갈 사람이고.

“사부와 만날 시기는 내가 잡을게. 괜찮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뭐?”

“잠시 나갈까?”

그녀를 데리고 객잔을 나왔다. 산책을 하듯 걸어서 객잔 뒤편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검을 뽑았다.

“무슨 뜻이야?”

“한판 붙자고.”

“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헉! 설마 또 나를 패고 싶어진 거야?”

“하하하.”

“웃을 일 아닌 것 같은데?”

“미안.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해.”

그제야 그녀의 표정에서 숨겨두었던 장난기가 스쳤다.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경계가 무너졌음이 느껴진다. 그 담 너머에 있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하나씩 보게 된다.

“왜 비무를 하자는 거야?”

“네 사부를 만나기 전에 파훼법을 완벽하게 보완해야 하니까.”

그녀가 왜 그래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가 깜짝 놀랐다.

“설마?”

“그래, 그에게 배운 무공으로 그를 이기는 거다.”

“불가능해!”

“가능해!”

“대체 어떻게?”

“잊었어? 네가 배운 무공의 초식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그 무공으로 비무를 하자고 하는 거다.”

“아!”

그녀의 사부가 제대로 사과를 할 것 같지도 않지만, 단지 사과를 받는다고 그녀가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확실히 벗어나려면 무공으로 눌러버려야 한다. 한 마디로 패버려야 한다는 뜻, 그것도 그녀가 직접. 그럴 때 진정으로 그녀는 자신의 사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에 네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들어줬으면 한다.”

내 말에 그녀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와의 비무가 끝나면 네가 배운 무공은 버려.”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을 테니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애초에 파훼법이 존재하는 무공이 어찌 완벽한 무공이었겠어?”

“하지만!”

“오 년이나 배웠는데 어떻게 버리느냐고? 그래도 버려!”

내 어조는 단호했다.

“그 무공을 배우는 오 년 동안 아마 송가장에서 많은 돈을 보내줬을 거야.”

이름 있는 문파에서 돈을 버는 방법이기도 했다.

문파의 이름난 고수들이 여러 속가 제자들을 키운다. 나중에 자신들이 필요할 때 불러서 쓸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네가 배운 그 무공, 호연세가의 독문무공이 아니지?”

다시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무공은 평생을 바칠만한 가치가 없다. 어디서 그럴 듯한 무공을 가져와서 가르친 거지. 물론 산동의 이름 없는 이류 무인들이나 상대하려면 계속 배워도 돼.”

물론 이 기준은 내 기준이었다. 아버지나 송우경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녀의 무공은 상당히 괜찮은 무공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되니까 호연세가란 이름을 걸고 가르치는 것이고.

하지만 내가 개입한 이상, 그 무공은 버리게 하고 싶다.

송화린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자신의 지난 삶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부를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 그래, 나도 그에게 배운 무공 버리고 싶어. 한데 무공까지 버리면…… 나는 지난 오 년을 낭비한 것이 돼.”

“그래서 포기하지 못하면 그 오 년은 십 년이 되고, 이십 년이 되고…… 평생이 되겠지.”

아픈 진실이었기에 그녀의 마음에 검이 박히는 느낌일 것이다.

“좋아, 내가 버린다고 쳐.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지?”

“버릴 거야, 말 거야. 확실히 해.”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버려.”

이제 그녀는 전적으로 나를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믿음에 보답을 해야겠지.

“진정 포기했을 때,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새롭게 얻는 그것은 이전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할 거야.”

내가 알고 있는 무공 중에 여인이 익히기에 적합한 무공이 있다. 물론 그녀가 익힌 무공보다 훨씬 나은 무공이었다.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 그녀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근래 아무리 변하고 믿음을 줬다지만, 내가 자신의 사부보다 더 무공이 뛰어날 것이라곤 생각지 않을 테니까.

“린아.”

“응.”

여러 말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 한 마디만 했다.

“날 믿어라.”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여졌다.

“그래, 믿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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