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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가지 끝에(3)
여인과 관련해서 전생의 난 숙맥이 아니었다.
바람둥이처럼 여자를 후리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위에 여자가 많았다.
당시의 난 천하제일인이었고, 속된말로 정말 많은 여자들이 들이댔으니까.
전에 말했듯이, 당시 천하제일미와도 사귀어 보았다. 물론 당사자인 그녀보다 나를 이용해서 권력을 차지하려고 설쳐대는 그녀의 가문 때문에 관계가 끝나 버리고 말았지만.
중원사대미인이며, 어디 제일미, 어디 제일미, 제일미들도 숱하게 만나 보았고. 이게 사랑인지, 욕정인지, 그냥 그렇고 그런 관계인지, 지금도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여러 여자들을 만나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고 헤어지면, 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고 싶었고, 다음에는 더 아름다운. 그렇게 더, 더…….
만약 그때 무림맹주가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쪽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탐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쾌락의 늪이야 말로 가장 깊고 위험한 늪이었
고,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댈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었을 테니까.
“무슨 생각해?”
송화린의 말에 내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옛 여자들? 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으니.
“그냥. 예전에 춤 잘 추던 여자가 생각나서.”
“누구?”
“아무것도 아니야. 자, 한 잔.”
내가 술잔을 들었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다시 건배했다.
무희들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다시 장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렀다.
그녀가 내려놓는 내 빈 잔을 빤히 쳐다보기에 내가 물었다.
“한잔 할래?”
“아니.”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산동무림에 대한 이야기부터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까지.
“어머니 정말 좋은 분이시더라.”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 그런 마음이 들 것이다.
“네가 우리 어머니 주먹에 안 맞아 봐서 그래.”
“설마? 정말 품위 있으시던데.”
“후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 품위 뒤에 감춰진 한 방을!”
내가 주먹을 들어보이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와의 술자리는 이곳의 분위기만큼이나 좋았다. 술 한 병을 다 비우고도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다.
송화린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와의 자리가 지루하진 않았다.
“즐거웠어.”
내 말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녀는 확실히 웃는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때 주점 앞길로 일단의 무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갔다.
같은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무인들이었는데, 선두에 서서 달리고 있는 사내의 기세가 제법이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데도 그것이 느껴졌다.
우리를 지나쳐 달려가던 말들이 일제히 멈췄다.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말에서 내리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사내를 확인한 송화린이 경직되는 것을.
사내가 송화린을 보며 놀란 얼굴로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맞구나. 사매! 사매 맞지?”
사매란 말에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사형.”
송화린의 호칭에 두 사람이 사형제간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인사도 없이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다니?”
“그냥 그렇게 됐어요.”
송화린이 사내를 소개했다.
“여긴 호연세가(呼延世家)의 호연탁(呼延卓) 사형, 이쪽은…….”
나는 그녀가 내 소개로 망설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저는 화린이의 약혼자인 벽리단이라고 합니다.”
“아, 태중언약을 하셨다는?”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에서야 뵙는군요. 저는 린이의 사형인 탁입니다.”
밝고 시원시원해 보이는 성격이었다. 송화린을 보는 눈빛도 사형 이상의 감정도 없어보였고.
“우리 사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건 제가 드려야 할 말씀입니다.”
송화린이 호연탁에게 물었다.
“한데 이곳은 어쩐 일이죠?”
“산동에서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서 사부님과 함께 내려왔다.”
사부님이란 말에 송화린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사부님도 함께 오셨나요?”
“그래. 이번에 함께 오셨다. 너를 보면 좋아하실 거다. 꼭 찾아오너라. 우린 추성의 구가장(具家壯)에 묵고 있다. 나는 바빠서 가봐야 하니 꼭 찾아오너라.”
“네.”
호연탁이 내게도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소.”
“그럽시다.”
호연탁이 일행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의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음을 느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갈까?”
먼저 돌아서는데 그녀가 내 소맷자락을 잡았다.
“한 잔 해. 이번에는 진짜로.”
* * *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허름한 주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송화린은 지금까지 참았던 술을 한꺼번에 다 마셔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단숨에 몇 잔의 술을 연속해서 들이켰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송화린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의 사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사부에게 무공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이 열다섯 살이었어. 호연세가의 고수를 스승으로 구하게 되어서 아버지는 정말 기뻐하셨지.”
호연세가는 강호사대세가 중 하나로 중원오세 다음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어. 정말 사부는 나를 잘 대해주셨지. 한데 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부의 눈빛이 달라졌어. 그래도 설마했지.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셨던 분이니까. 내가 스무 살이 되고 어느 날 밤, 눈
을 떴을 때 사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술 냄새가 진동했지. 눈빛에서 알 수 있었지. 나를 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사부는 망설이고 있었던 거야. 나를 덮칠까 말까. 난 벌떡 일어나서 사부의 뺨을 때렸어. 머릿속
이 하얘져서 아무 정신이 없었지. 그 길로 곧장 사문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왔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왜 술을 싫어하는지.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그녀였는데. 내가 술에 취해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으니. 정말 벽리단 놈을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절이라고 하고픈 심정이다.
그녀가 왜 외모가 아닌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외모만 보고 달려드는 사내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어. 그냥 무공수련이 끝나서 돌아온 것이라고 둘러댔지. 그날 이후 난 매일 악몽에 시달렸어. 지금도 그날의 꿈을 꾸고 있어. 다 지나간 일이라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스스
로를 위로해도 소용이 없어.”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표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다들 악몽까지 꾸며 각자의 상처에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난 후 그녀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후에 사부에게 연락이 왔어?”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어. 이제 완전히 인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악몽을 계속 꾼다면서? 그럼 아직 끝난 일이 아니지.”
“아니. 다 끝난 일이야. 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녀가 빈 술잔을 들었고, 내가 잔을 채워주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면 나도 함께 마셔주었다. 따로 위로를 하진 않았다. 별다른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내로서, 미안할 뿐이다.
그래, 이렇게라도 풀 수 있다면 풀어라.
술 마시고, 화내고.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치고, 욕을 하고 싶으면 욕을 해라.
별 일 아닌 것도 마음속에서 자꾸 키우면 말똥구리가 굴리던 손톱만한 것이 나중에는 태산처럼 커지기도 한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말똥은 그냥 말똥에서 끝내야 한다.
* * *
그녀를 업고 집으로 돌아갔다.
등에 업힌 채 그녀가 중얼중얼 뭐라고 말했다.
“…… 너무 나 싫어하지 마. 나도 노력하고 있잖아.”
“안 싫어해.”
“정말?”
“그래.”
꽉.
송화린이 내 어깨를 사정없이 깨물었다.
“아얏!”
“거짓말! 싫어하면서.”
이 자식이!
화를 내려고 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새근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어이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그녀의 행동이 밉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여자로서 정말 하기 힘든 말을 내게 털어 놓았다. 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 것이다.
그나저나 여자에게 물려본 것도 처음이네.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송가장은 비상이 걸려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차분했다.
수란이 매섭게 쏘아보긴 했지만, 송화린이 무사한 것에 안도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와 함께 나갔다니, 걱정하지 않았네.”
송우경의 변함없는 믿음에 그녀를 업고 온 노고가 눈 녹듯 녹았다.
물론 걱정했을 것이다. 천금 같은 딸이 다 큰 사내와 나가서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데 어찌 걱정이 안 되었겠는가?
하지만 이제라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굳이 걱정한 것을 표하지 않는 것이리라.
“죄송합니다. 둘이 놀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한데 화린이가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다니? 혹시?”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분 좋게 마셨습니다.”
“그렇다면 됐네. 피곤할 텐데 어서 돌아가서 쉬게. 무사히 잘 데려와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굳이 송우경을 걱정시킬 생각은 없었다. 송화린 역시 원하는 바는 아닐 테고.
내가 알았으니 그 사부란 놈은 내 선에서 처리를 하면 된다.
진짜 죽어야할 색광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욕정의 시험대에 오른 불쌍한 늙은이인지.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럼 밝은 날 정식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꼭 오게.”
송우경의 흡족한 미소에는 한 번이라도 송화린을 더 보게 하려는 그의 본심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돌아서려는데 수란의 등에 업혀있던 송화린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야! 벽리단!”
다들 화들짝 놀란 가운데, 그녀가 눈 풀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 년 누구야? 춤 잘 춘다는 그 년 누구냐고!”
처음 보는 송화린의 모습에 송우경과 수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못들은 척 후다닥 그곳을 나왔다.
맙소사!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니! 송화린도 여자는 여자였다.
* * *
다음날 곧바로 호연세가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다.
송화린의 사부는 호연남(呼延南).
호연세가의 가주 호연세(呼延世)의 셋째 동생으로 강호에서 상당한 명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여기까진 그냥 쉽게 알아볼 수 있었고, 그가 왜 이곳 산동에 왔는지가 중요했는데, 뜻밖에 그것은 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산동무림이 심상치 않다.”
“무슨 일입니까?”
“일전에 내려왔던 천도문의 마정수를 기억하느냐?”
“물론입니다.”
“그가 그냥 물러간 줄 알았지만, 사실은 죽었던 모양이다.”
내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헉! 대체 누구 짓입니까?”
“산동의 야상이 그들을 죽였다는 소문이다.”
“그렇군요.”
다행히 내가 의도한 대로 소문이 난 것이다.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천도문에서 염화(廉華)라는 인물이 내려왔다.”
절삭검(切削劍) 염화.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천도문 내에서 도살자(屠殺者)라 불리는 자였다. 천도문에서 상대를 제거하려 할 때, 그가 나선다.
암살자는 아니었다. 누군가를 힘으로 눌러야 할 때, 그가 나서는 것이다. 어쨌든 그를 내려 보냈다는 것은 천도문에서 강수를 뒀다는 의미다. 협상이 아니라 복수를 하겠다는 뜻.
“야상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야상은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조직이다. 전 중원에 야상이 있지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엮여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들 역시 그냥 당하지 않으려고 조력자를 불렀다.”
설마?
“이번 일을 중재하기 위해 호연세가의 고수가 산동에 왔다고 들었다.”
이제야 왜 호연남이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산동야상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다.
호연세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 야상이 염왕채나 굴리는 곳이 아니란 뜻이다.
결국 양쪽이 피터지게 싸울 것이다.
천도문과 야상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로선 호연세가조차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송화린 문제도 있고, 야상과 손을 잡은 것도 그렇고.
자,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야한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뭔가 얻어낼 것이 있으면 최대한 많이 얻어낼 것이다.
적들의 분열은 곧 내게 기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