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연의 가지 끝에(2)
다음 날, 나는 소검대를 소집했다.
못 본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변화가 느껴졌다.
“잘 지냈나?”
“네!”
검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무인은 자신을 말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지냈는지 행동으로 보여 다오!”
검대원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가운데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섯 명씩 앞으로 나와 각자의 실력을 발휘했다. 초식을 펼치는 모습만 봐도 그들의 성취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소검대는 성장해 있었다.
그 괄목상대의 중심에는 관휘가 있었다.
체력도 많이 좋아졌고, 초식은 훨씬 더 강하고 정확하게 발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비도술 역시 많이 늘어서 이제는 삼십 보 떨어진 곳에서 연속해서 세 번 이상 적중시켰다.
“약속대로 내력을 주입해서 비수를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마.”
“감사합니다.”
관휘가 날아갈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비도술을 연마하던 이들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관휘에게만 내력을 운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직 실력이 되지 않는데 어설프게 내력을 주입했다가 사고를 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관휘가 시범을 보였다.
쇄액!
내력을 주입해서 던지니 날아가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지켜보던 검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껏 상기된 관휘에게 내가 차분히 말했다.
“내력을 주입해서 비수를 날리는 것이 무조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검술을 사용하는 이가 비수를 사용해야 할 때는 위급한 상황에서다. 급한 마음에 무리하다가 검술의 내력운용과 충돌해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수련이 충분하면 그때그때 자유롭게 내력을 조절할 수 있겠지.”
관휘가 씩 웃었다. 녀석은 당연히 수련이 충분한 쪽으로 갈 것이다.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나?”
“조금은 천천히 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면 역효과가 난다고.”
“그래, 잊지 않았으면 됐다.”
관휘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자극을 주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더 큰 보상이 돌아가는 것.
나는 조직에 이런 자극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광두와 관휘를 경쟁시킨 것도 그런 측면이었고.
“내년 봄에 새로 검대원을 받을 생각이다.”
새 인원이 들어온다는 말에 모두들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원래 계획대로 이개 조를 더 늘여서 사십 명을 확충하려는 생각이었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열심히 수련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검대원들의 자세를 하나하나 봐주었다.
잠깐 잠깐의 지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경우에 따라 한 단계 무공의 성취를 얻을 정도로 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었다.
녀석들아, 어서 강해져라!
* * *
회합은 길어지고 있었다.
송가장 객청의 구석자리에 송화린도 참석하고 있었다.
오늘은 동검장(東劍壯)과의 일을 처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 송가장의 일을 배우기 시작한지 두 달째. 매일 여러 일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회의를 해야 하는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무력을 써서 상대를 제압해야 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하나의 문파를 꾸려나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눈치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했던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상대측이 부리는 억지에 송화린은 정말 답답했지만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럴 때면 아버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었다면 몇 번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참을성 있게 그들과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달래기도 하고, 강하게 나가기도 하고.
외동딸이니 언젠가 가업을 이어받아서 이 일을 자신이 해야 할 것이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아버지처럼 저렇게 화를 내지 않고 대화를 풀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이후 반시진이 더 지나서야 회합이 끝이 났다. 다행히 송가장에 불리하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객청 밖으로 나왔을 때, 송우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힘들었지?”
“저야 앉아만 있었는걸요. 아버지가 힘드셨죠. 고생하셨어요.”
“하하. 네가 있어줘서 든든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아버지는 자신에게 일을 가르치는 목적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요즘 외로워하고 있었다.
누군가 함께 해줬으면 하는 마음, 딸이기에 알 수 있는 본질적인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제 아버지도 늙으시나?’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서글퍼진다.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수란이 와서 보고했다.
“벽공자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밖에 나가자 벽리단이 화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왔어?”
“조금 전에.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호북에서 이제 돌아온 거야?”
“며칠 있다가 다시 가야 해.”
“바쁘구나.”
다시 간다는 말에 그녀는 울컥 섭섭함이 치밀었다. 그리고 자신이 섭섭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녀가 잠시 벽리단을 응시했다. 어떤 사내도 자신을 저런 담담한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데.
“너는 볼 때 마다 느낌이 달라지네.”
송화린의 말에 벽리단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더 강해졌다. 몸은 더 단단해져 보였고, 눈빛은 투명하리만치 깊어졌다. 분명 무공실력도 향상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벽리단에게 끌린다.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크게 반가웠고, 그의 얼굴을 보자 앞서 회합의 피곤함이 싹 가셨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입으로 먼저 파혼하자고 했는데,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괜히 마음을 들킬까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검이 두 자루네?”
그녀의 시선이 내 검을 향했다.
나는 허리에 두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다.
한 자루는 천조검이었고, 다른 한 자루는 수라명왕검이었다.
수라명왕검을 개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래도 튀지 않는 검이라서 그냥 얼핏 봐선 이것이 수라명왕검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손잡이에 짙은 색 천을 감았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손잡이에 거친 질감의 천을 감아 다니는 무인들이 있었기에 그리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수라명왕검을 선학봉의 비동에 보관해 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검이 스스로 나를 찾았으니, 언제나 내 곁에 둘 것이다.
선학비술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기에 수라명왕검을 뽑을 일은 거의 없었다. 만약 수라명왕검을 뽑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어차피 난리난 상황일 것이다.
또 굳이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었기에 조만간에 개조한 천조검은 누굴 줄 생각이다.
내가 수라명왕검을 툭 치며 말했다.
“괜찮은 검을 구해서. 우리 좀 걸을까?”
“좋아.”
그녀와 함께 뒷마당을 걸었다.
겨울 공기가 찼다. 하지만 찬만큼 기분도 상쾌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이 겨울이었는데, 다시 겨울이 되었다.
지난 일 년 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도, 그녀도 많이 변했다.
“내가 없을 때 어머니를 잘 챙겨줘서 고맙다.”
“고맙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참 지난번에 그 초식은 어떻게 되었지?”
그녀는 치명적인 파훼법이 존재하는 자신의 초식을 고치는 중이었다.
“계속 노력중이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생각보다 쉽지 않네. 제대로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되면 보여줄게. 그때 한 번 확인해 줄래?”
“물론이지.”
여전히 혼자 힘으로 찾아내려는 그녀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실력이 많이 늘 것이다.
“술 한 잔 할까?”
무심코 말했다가, 뒤늦게 아차했다.
“아, 미안. 술 안마시지?”
그러자 그녀가 뜻밖의 말을 던졌다.
“한 잔해. 술 대신 분위기에 취하면 되지. 내가 살게.”
* * *
우리가 함께 간 주점의 이름은 봉황(鳳凰)이었다.
이 특별한 이름의 주점은 곡부와 추성의 중간쯤에 있었다. 분위기 좋은 곳이 있다며 그녀가 그곳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제법 먼 길을 왔지만, 와서 보니 후회되지 않았다.
보통 주점이라 하면 주방에서 소리치는 숙수, 바쁘게 뛰어다니는 점소이들, 술을 마시며 강호 이야기를 나누는 장사치들과 무인들. 시끌벅적 떠들썩한, 어디를 가나 비슷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밝고 깨끗하게 꾸며진 그곳에는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를 하고 있었고, 한 옆에는 무대도 있었다. 마치 연회장 분위기의 주점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며 그녀가 말했다.
“왜 그래? 처음 온 것처럼.”
“처음이야.”
“여기서 자주 여자들이랑 술 마신 것, 다 알고 있어.”
하긴. 망나니 같았던 벽리단 놈이 이런 곳을 안 와 봤을 리 없지.
과연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손님들은 대부분 남녀들이었다.
안내하는 점소이를 따라, 우린 한 옆 자리에 앉았다.
술과 요리를 시켰고 그녀를 위해 차도 시켰다.
“언제 와 봤어?”
“처음에 돌아와서 네가 이곳에 자주 온다는 말을 듣고…… 한 번 왔었어. 어떤 곳인가 궁금했거든.”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이유였다.
잠시 후 술과 요리가 나왔다. 보통 주점보다 두 배쯤 값이 비쌌는데, 맛이 특별하다기 보단 이곳은 분위기로 승부하는 곳이었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시니 묘한 흥취가 났다.
“요즘 송가장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어.”
마정수를 태운 마차를 타고 가다 송우경과 송화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송가장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던 모양이다.
“일이 생각보다 어렵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나도 그래.”
“그래도 너는 잘 하고 있잖아? 솔직히 네 소검대가 자극이 되었어. 나도 저렇게 잘해보자는 마음이 들었거든. 한데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는데 어렵기만 하네.”
그녀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술을 마시듯 차를 들이켰다.
이제 스물한 살이 된 그녀다.
어렵지. 어렵지 않으면 어찌 스물한 살의 청춘이겠는가? 때론 나조차도 이 강호는 너무나 버겁게 느껴지는데.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그러다보면 잘 할 수 있겠지.”
“그럴까?”
“그럼.”
내가 잔을 들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서 건배했다.
“우리 힘내자.”
무대 위로 무희들이 올라왔다. 잔잔하던 음악이 빠른 음악으로 바뀌었다.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우린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춤 잘 추는 사람 보면 부러워. 어떻게 저렇게 잘 추지?”
그녀의 말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잘 출 것 같은데.”
그러자 송화린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완전 통나무야.”
“하하.”
춤 이야기를 하니 예전 사파의 절대고수 환락여제(歡樂女帝)가 생각난다.
그녀의 독문무공이 바로 사신무(死神舞)였다. 춤에 빠져든 사람들의 내공을 빨아먹는 죽음의 춤이었다.
정말이지 춤 하나는 끝내줬는데.
물론 그녀는 마지막 비기로 나신이 되면서까지 유혹의 춤을 췄지만, 결국 내 검에 찢겨 죽었다.
송화린이 무희들에게 박수를 쳤다.
“아, 멋지다.”
나도 함께 박수를 보냈다.
“정말 잘 추는구나.”
무희들의 춤을 보면서 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숱한 연회에서 무희들의 춤을 수없이 봐왔지만 한 번도 그 춤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었음을.
항상 바빴다. 연회장에서는 언제나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에도 바빴다. 무희들의 춤을 그냥 배경처럼 여겼다. 벽에 걸린 그림처럼. 그냥 연회장이니까 당연히 무희가 있는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이곳 주점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함께 와보지 않았다면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칠십 생을 살았기에 강호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굴고 있지만, 이 강호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해보지 않은 일들이 있는 것이다.
마차에서 칠호와의 깨달음도 이런 것이었다.
별 것 아니게 툭 뱉어진 말, 하지만 내가 한 번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들.
나는 심검지경에 들기 위해 하루에 많은 시간을 명상에 잠겼고, 온갖 어려운 무공서와 경전을 읽었다. 현자들의 뜻이 담긴 책을 읽었고, 학자들과 화공과 악사들이 남긴 책도 읽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심검지경에 들지 못했다.
이제는 느낀다.
큰 진리는 오히려 큰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 말에, 무희의 춤에, 땅강아지나 개미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 세상을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막연히 다른 직업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닐 진데.
세상을 다시 새롭게 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볼 때, 비로소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 길의 끝에 심검지경이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우연히도 이번 생애의 두 번의 깨달음을 무공수련에서 얻지 않고, 일상에서 얻고 있었다. 그것도 여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거 심검지경에 이르려면 여인들을 막 만나고 다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