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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72화 (7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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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눈이 내리면(4)

감춰두었던 검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백표는 크게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놀랐으니 백표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놀람을 가장 크게 표현한 사람은 광두였다.

“우아아아아아아!”

광두는 검이 스스로 우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내가 서둘러 백표에게 말했다.

“우린 이만 가겠습니다.”

광두를 잡아끌면서 돌아섰다. 백표를 생각하면 어서 물러나 주는 것이 맞았다.

내가 돌아서자 검이 다시 울었다.

징―

마치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 같은 그 울음에 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울음의 깊이가 달라졌다. 내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돌아서자 백표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역시도 검이 내게 반응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내가 천천히 검을 향해 걸어갔다.

징―

검의 울음소리가 깊어졌다.

내가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검의 울음소리가 거칠어졌다.

분명 검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백표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백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저 검에 가까이 가도 되느냐고.

나와 수라명왕검을 번갈아 바라보던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이 나를 부르는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천천히 검을 향해 다가갔다.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마치 으르렁대던 야수가 얌전해지는 그런 상황처럼 보였다.

내 손길이 닿자 수라명왕검이 울음을 완전히 그쳤다.

벽에 걸려 있던 수라명왕검을 내렸다.

일 년 만에 잡아보는 수라명왕검에 내 마음도 함께 격동했다.

샤캉!

그 어떤 검을 뽑았을 때보다 시원하고 경쾌한 특유의 발검소리.

수라명왕검이 다시 울었다.

지이이잉―!

지금까지보다 더 깊고 맑은 울음으로 재회의 기쁨을 표했다. 그 울음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맹주님.’

그래, 오랜만이다.

나는 비로소 수라명왕검과 감정적인 교감을 느꼈다. 지난 칠십 평생에서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라명왕검이 조용해졌다.

잠시 장내는 침묵에 휩싸였다.

나도, 백표도, 광두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백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마도 이 순간 백표는 강력한 운명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풍주점을 처음 열던 날, 내가 찾아왔다. 전생의 내가 항상 앉던 자리에서, 같은 술과 요리를 시켰다. 자신의 가족을 구해줬으며, 첫눈을 보며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했고, 수라명왕검이 나를 알아보며 울었다.

내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벽씨검문의 후계자 벽리단입니다.”

백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도 평생 혼자서는 울지 않았던 검이 오늘 울었다는 것은 하늘이 내게 말하는 것이리라. 백표와의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나는 기꺼이 그 운명을 따르려 한다.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 강호는 앞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겁니다.”

백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맹주가 잘못 뽑혔다는 것을.

“저는 그 일을 막으려고 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선 너무나도 망설였던 말을 드디어 말했다.

“그 일을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 * *

다음날 아침, 광두가 객방의 탁자를 닦고 있었다. 정말 윤이 나게 싹싹 닦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객잔을 청소하는 손님도 있습니까?”

돌아보니 공수찬이 미소를 지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우리 입 싼 배신자분께서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공자님을 뵈었는데, 마침 광무인을 찾았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려고 했는데 왠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광두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잘하셨습니다.”

때마침 벽리단이 와서 오히려 자신이 원했던 대로 일이 풀렸으니까. 물론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한데 왜 청소를 하고 계신 겁니까?”

“저는 초조하면 청소를 합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면 마음이 좀 안정되거든요.”

“그 심정은 저도 이해가 갑니다. 제 경우에는 이것저것 마구 계산을 하지요.”

“계산요? 무슨 계산을 하십니까?”

“그냥 이것저것 생각나는대로 합니다. 산동에 있는 상단들이 일 년에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될까, 저 객잔의 하루 수입은 얼마나 될까…….”

“왜 그런 골치 아픈 짓을? 설마 저의 이 청소가 그 계산과 같은 해결책이란 말씀인 겁니까?”

“전 제 방식이 더 정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맙소사!”

공수찬이 미소를 지었고 광두가 뒤따라 웃었다. 무한에 와서 두 사람은 좀 더 친해졌다. 역시 사람이 친해지려면 함께해야 한다.

“그래서 사고를 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수찬의 물음에 광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쌓인 눈에 세상이 깨끗해져 있었다.

“결과는…… 기다려봐야 알 것 같습니다.”

* * *

백표는 마당에 서서 눈 위를 뛰어노는 명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 정영이 다가왔다. 그녀는 마루에 세워진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보았다. 한 자루는 남편의 검이었고, 다른 한 자루는 처음 보는 검이었다. 물론 그 검은 바로 수라명왕검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장사를 시작한 이래 남편이 검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눈이 내리는 순간을 보셨나요?”

백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영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미신임을 알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믿음을 믿었다. 아마도 강호인을 남편으로 둔 모든 여인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다시 강호로 가자고 했소.”

“누가요?”

“멀리 산동에 있는 가문의 후계자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오.”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표정으로 백표가 정영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이렇게 고민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랬다. 분명 벽리단은 처음 봤을 때부터 끌리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 권유한다 하더라도, 천하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새로 모실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한데 수라명왕검이 운 것이 결정적이었다.

백표는 알고 있다. 수라명왕검과 같은 명검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는 것을. 분명 수라명왕검은 벽리단을 주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천하진의 검이 새 주인을 선택했다는 것이 백표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벽리단과는 그 이상의 인연이 있었다.

벽리단을 보면 천하진이 떠오른다.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러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것만 해도 크나큰 은혜였다.

“그는 이 강호가 혼란에 빠질 것으로 보고 있소. 이 강호를 지키고 싶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가만히 남편을 응시하던 정영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가세요.”

“여보?”

“그거 아세요? 어제 당신은 악몽을 꾸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매일같이 꾼 악몽을 어제 꾸지 않은 것이다.

정영은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있어야 할 곳은 주점이 아니라 강호라는 것을. 이제 남편을 보내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악몽과 싸울 것이 아니라 진짜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만약 망설여지는 이유가 저와 명이 때문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가세요. 명이는 제가 지켜낼 수 있어요. 전대 맹주님 때문이라도 가세요. 당신을 통해 들었던 전대 맹주님은 묵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새 꿈을 포기

하게 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여보.”

“만약 정말 그 사람 말이 맞다면, 그래서 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면 당신이 가서 막으세요. 당신이야말로 정의를 지키고 악을 막아내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뛰어놀고 있는 명이를 향했다.

“명이를 위해서 막으세요. 그래서 저 아이가 자라날 이 세상을 지켜주세요.”

* * *

뽀드득, 뽀드륵.

새하얀 눈을 밟으며 백표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와 함께 객잔 뒤쪽 숲속 공터에 마주섰다.

백표는 허리에는 자신의 검을 차고 있었고, 등에는 수라명왕검을 차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그가 큰 결심을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벽공자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를 수하로 두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백표가 검을 뽑아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저는 아무나 모시지 않습니다.”

백표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나와 함께 전쟁터를 누빌 때 볼 수 있었던 그 눈빛이다.

“이 대결로 제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를 데려갈 생각이 있습니까?”

백표는 진심이었다.

앞으로 나서며 내가 말했다.

“나 역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소.”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백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와 반대쪽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백표의 무공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

그의 강점과 약점은 하나였다. 그의 검이 살검(殺劍)이 아니라 수호검(守護劍)이란 점. 지켜주는 검이라서 약했고, 지켜주는 검이라서 강했다.

환생한 이후 가장 강한 고수를 상대하는 순간이었다.

“가겠습니다, 조심하시오.”

백표가 경고를 한 후에 검을 날렸다.

쉭!

백표의 검이 내 팔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빠르고 깔끔한 공격이었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 검을 피했다.

연속해서 검이 날아들었다. 팔과 다리, 허벅지. 치명적인 부위를 피한 공격이었다.

나는 그의 공격을 피하고 막고, 흘려냈다.

처음에는 백표도 살살 하려고 했을 것이다. 설마 내가 자신보다 강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붙어보니 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점점 더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나는 선학비술로 백표를 상대했다. 수라명왕검이 나를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추혼수라검술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물론 언젠가는 내 무공을 보여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맹주에게 직접 배웠다는 말은 믿지 않겠지. 스물이라는 내 나이를 생각하면, 내가 맹주에게 우연히 무공을 전수받을 시기쯤에는 백표는 항상 내 옆을 따라다

녔으니까.

천하진의 스승이나 사형제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것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내 개인사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쉭쉭쉭쉭쉭!

백표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고, 내 보법은 절대 피할 수 없을 공격의 사각을 찾아냈다.

나는 검을 맨손으로 상대했다. 그것도 검날을 손등이나 팔로 쳐내는 초식들이 이어졌다.

누군가 보면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음에도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니까 초식들이 더욱 진가를 드러내며 상대적으로 나는 더 편해졌다.

하지만 굳이 위험한 비무를 백표와 계속할 이유는 없었다.

날아드는 검을 피하며 백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휘리리릭.

백표의 신형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쿵.

바닥에 드러누운 채 백표가 눈을 껌벅였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내가 제대로 힘을 실었다면 지금 이 한 수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내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백표가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자신을 이길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져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강호에서, 특히 수장과 수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인격적인 신뢰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기본이 되는 것은 실력이다. 강한 주인을 모시는 것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있다.

나는 일부러 보여주었다. 백표를 완전히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점에서 나는 전생의 나와 싸워야 한다.

마지막 결정을 앞두고 백표가 물었다.

“만약 저들과 싸워야 할 순간이 오면 싸울 겁니까?”

그가 의미하는 적은 마봉기 일파였다.

“네, 싸울 겁니다.”

“전 강호와 싸워야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다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왜 싸우려는 겁니까?”

“나쁜 놈이니까요. 나쁜 놈이 강호를 지배하면 안 되지 않소?”

그 단순한 진실에 잠시 나를 응시하던 백표의 눈에 결단이 스쳤다.

백표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 맹호단주이자 풍아검술(風鴉劍術) 제 십이 대 전수자 백표, 벽공자를 주인으로 모시며 이 한 몸 바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그리고 등에 매고 있던 수라명왕검을 바쳤다.

“이 검은 전대맹주님의 독문병기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검입니다. 검이 벽공자를 선택했으니 이 검을 공자께 바칩니다.

“그래도 되는 것이오?”

“이 검을 맡긴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대로 처분해선 안 되는 검입니다. 하지만 이 검은 벽공자를 선택했습니다. 수라명왕검이 벽공자를 선택했을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제게

검을 맡긴 분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수라명왕검을 받아서 허리에 찼다.

비로소 주인을 만난 수라명왕검이 다시 울었다.

징―

그 울음에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한 주인을 찾아줬음을 마지막으로 확신한 것이다.

내가 백표의 손을 먼저 잡았다.

백표가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을 바라보며 손을 맞잡자 마음이 울컥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가 얼마나 나를 위해 헌신하였던가?

그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던가?

이제 다시 그와의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삶과 죽음을 함께 합시다.”

내 말에 백표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는 내 마음의 격동을 느끼고 있었다.

“삶도 죽음도 주군과 함께 하겠습니다.”

이 순간 나는 하늘에 감사했다. 그와 나를 이어준 운명에 감사했다.

첫눈이 내린 다음날, 나는 천군만마보다 든든한 백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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