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69화 (69/304)

=======================================

다시 첫눈이 내리면(1)

다음날 기다렸던 사람들이 도착했다.

“도련니이이이임!”

마치 수십 년만의 재회인 듯 광두가 나를 향해 들소처럼 달려왔다.

내가 살짝 피한 후 뒤따라오던 공수찬을 향해 걸어갔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잘 지내셨습니까?”

내가 공수찬부터 챙기자 광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헐. 돈부터 챙기시는군요.”

“오호, 너는 우리 공총관을 돈으로 여기는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광두에게 공수찬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아니라고요!”

“저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사를 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라는데 왜 이래요? 우리 같이 오면서 분위기 좋았잖아요? 네?”

역시 광두가 오니 분위기가 밝아진다. 광두만이 주는 활력이 있다.

광두가 내 옆으로 와서 넌지시 말했다.

“공총관부터 챙기신 것 전 이해해요. 맛있는 것은 아껴서 맨 나중에 드시는 취향이신 거죠?”

“미안하지만 나는 아끼면 똥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다.”

입을 삐죽 내미는 광두를 못 본 척 하며 객잔으로 먼저 들어갔다.

“먼 길 오느라 수고들 했다. 시장할 테니 우선 밥부터 먹자.”

호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에 광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다리 부러지게 시켜준 것이다.

“와! 정말 맛있어요. 역시 무한은 무한이군요. 곡부 촌구석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실컷 먹어라! 모자라면 더 시켜주마.”

“역시! 우리 도련님 밖에 없다니까요!”

그렇게 든든하게 배를 채워준 후 비로소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님은 평안하시냐?”

“잘 지내고 계십니다.”

“나 안 보고 싶어 하시고?”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요.”

“흐음. 그럴 리가?”

“도련님이 아직 젊으셔서 잘 모르시나본데요, 부모들도 나이 들면 자식들이 이만 좀 나가줬으면 싶답니다. 언제까지 자식이 마냥 귀엽기만 하겠습니까? 도련님, 가끔씩 동경도 들여다보시라고요.”

“하하하.”

공격을 받았으니 되돌려줘야지. 아직은 잘 통할 한 방이 있었다.

“도순이는 잘 있고?”

“아, 잊을 만하면 사정없이 후벼 파시는군요.”

“첫사랑을 어찌 잊어?”

“첫사랑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옆에 있던 공수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그도 내기가 걸리면 첫사랑이란데 돈을 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도련님, 송소저 안보고 싶어요?”

“잘 있지?”

“더 아름다워졌더군요.”

“어떻게 알아?”

“얼마 전에 대부인을 뵈러 한 번 더 왔어요.”

그녀에게 다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을 비우고 있을 때여서 더 고마웠다.

나는 안다. 그녀의 행동이 내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님을.

그녀 역시 삶에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심하게 여겼던 부분인데, 이제는 그게 중요하게 와 닿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를 챙기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하나가 제대로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그렇게 산동의 소식들을 다 듣고 난 후, 내가 그들을 부른 이유를 꺼냈다.

“우리 상단을 하나 만듭시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공수찬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이곳까지 부르시기에 왠지 이 말씀을 하실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시겠지만 상단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막대한 돈이 들어갑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 처음부터 큰 상단이 아니라 소규모의 상단부터 시작합시다. 대신 반드시 확장성을 염두에 둬주시오.”

“확장성이라 하시면?”

“이 상단이 앞으로 중원 곳곳으로 뻗어나가게 될 겁니다. 규모는 작게 시작하지만 이 시작이 거목의 뿌리가 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마구잡이로 만들지 말고 앞으로 크게 키워나갈 것을 예상해서 만들자는 말입

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빠르게 조직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숙고하던 공수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공수찬의 두 눈에서는 기대에 찬 빛이 났다. 어쩌면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한과 산동을 잇는 연락소를 구축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돈은 얼마나 필요하겠소?”

“소규모 상단이라도 시작하려면 최소 오만 냥은 있어야 할 겁니다. 일단 제가 운용하는 자금을 아껴서…….”

내가 그에게 전표를 내밀었다. 전장에서 미리 찾아둔 돈이었다.

“십만 냥이오. 이 돈으로 제대로 시작해주시오.”

공수찬이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광두도 눈을 크게 떴다.

“저 한 번만 만져 볼게요.”

광두가 부들부들 떨면서 전표를 쓰다듬었다.

악인들에게 빼앗은 돈으로 사업을 일으킨다는 것, 전생의 나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협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체면과 명성에 얽매여 살아온 지난 삶을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협객이라 불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명성보다는 현실에 더 신경을 쓸 것이다.

악에서 흘러나왔지만 이 돈의 시작점은 결코 악하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착취의 결과물일 뿐.

나는 이 돈이 내 손을 거쳐 다시 선한 곳으로 흘러가기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호에서 내가 어떻게 불리던 아무 상관없다.

“이 돈이면 충분합니다. 말씀하신 상단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돈이 더 필요하면 말씀하시고 사람이 더 필요하면 알아서 더 뽑으시오. 이번 일은 전적으로 공총관에게 맡기겠소.”

“맡겨주십시오.”

내가 광두를 보며 말했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네가 공총관의 호위를 맡아라.”

“네, 알겠습니다.”

광두가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큰일을 하는데 자신이 거들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었다.

공수찬이 당장 시작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시작하시오.”

“아닙니다. 일을 미뤄두고는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아서요.”

공수찬이 광두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저희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객잔을 나섰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나는 무한에서 쌓였던 피로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 저녁에 광두를 데리고 풍주점에 갔다.

가는 길에 저 멀리 걸어가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일행들 가운데 선 사내가 바로 마철군이었다.

예전 맹주시절에 그를 본 적이 있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다. 마봉기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나 했던 기억이 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니 똑똑했고 성격도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그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살면서 첫인상에 속는 일이 어디 한두 번 겪는 일이었던가?

어쨌든 그는 마봉기가 맹주가 되면서 공석이 된 천도문의 임시문주직을 맡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곳에는 어쩐 일일까?

그 옆에 차분한 인상의 노인이 한 명 있었고, 그 뒤를 일곱 명의 사내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는데 나는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도문주를 호위한다는 일곱 명의 고수인 천룡칠검(天龍七劍)이었다. 원래는 마봉기를 호위했던 그들이었는데, 이젠 임시문주인 마철군을 호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사내였다.

감정 없는 차가운 눈빛. 사내를 보자 나는 곧장 칠호를 떠올렸다.

그들이군.

같은 조직에서 훈련받은 자가 틀림없었다.

마정수에게 붙였으니 다른 후계자들에게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철군에게까지도 사람을 붙인 것을 보니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지고 볶고,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나대로 강해질 테니까.

“왜 그러세요?”

광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주 잠시 내 표정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아니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면 제게 먼저 말씀해 주셔야 해요.”

녀석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오냐,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너부터 떠올리마.”

당황한 광두를 뒤로 한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니, 꼭 그러실 필요는 없으시고요, 적당히 위험한 일도 많잖아요…….”

* * *

백표에게 광두를 이렇게 소개했다.

“여긴 제 수하인 광두입니다. 제가 가장 믿는 사람입니다.”

전생에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환생해서 가장 믿는 사람을 소개해주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성격이야 완전히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뜻밖에 감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믿는다는 말에 한껏 기분이 부풀어 오른 광두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동안 저희 부족한 도련님을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두에게는 이곳에 와서 새로 사귄 주점 주인장이라고만 소개했다. 첫날이니 가볍게 인사만 시킨 것이다.

함께 장난을 칠 수는 없었기에 백표가 손사래를 쳤다.

“부족하다니요? 벽공자님 덕분에 요 근래 아주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매상도 많이 올랐고요.”

나는 광두를 데리고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서 술과 요리를 시켰다.

“와! 술맛이 정말 끝내주는데요?”

광두의 감탄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술에서 바람 맛이 나지 않느냐?”

그러자 광두가 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주인장에게 돈이라도 빌리신 겁니까?”

듣고 있던 백표가 껄껄 웃었다.

이번에 무한에 와서 백표에게 느낀 것은 그가 참 웃음이 많다는 점이었다. 맹호단주 시절에는 그가 웃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날 밤, 객잔으로 돌아와서 광두와 한 잔 더 했다.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올라와서 이층 객방 창가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우린 술을 마시며 한참동안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비틀거리는 취객의 구슬픈 노랫소리, 검을 찬 채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무인들,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

분이 묘했다.

제법 긴 침묵을 깬 것은 광두였다.

“도련님이 왜 풍주점의 주인장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더냐?”

내가 내심 깜짝 놀랐다. 오늘은 그냥 두 사람 소개만 해주고, 간단히 한 잔 하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가요?”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그냥 평범한 주점 주인 같지 않았어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봐온 주점 주인들과는 많이 달랐지요.”

나는 너무 오랫동안 봐와서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본 광두는 백표라는 사람이 주는 안정감을 느낀 것이다.

나는 광두에게 백표에 대해 알려주었다.

무림맹의 전직 맹호단주였고, 이번에 어려운 일에 처했는데 내가 은밀히 도와줬다고.

광두를 속이고 싶지 않았고, 아직 백표에 대해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솔직히 백표를 데려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고 감복시켜서 내 수하로 거두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내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이 될지 알지 못하기에, 과연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고민이 되었다.

물론 내 결심과는 무관하게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쉽게 다른 사람을 섬기려 하지 않을 테니까.

눈치 빠른 광두는 어느새 내 마음을 엿본 모양이다.

“그 분에게 알려야죠. 도련님이 도와줬다는 것을요. 가족을 구해줬다고요.”

“왜?”

“왜라니요?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죠.”

“빚쟁이냐? 주면 받아야하게.”

“말 안하면 모른다고요. 못 본 것을 어떻게 알아요?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아냐고요? 도련님이 생색내는 것 싫어하는 것 알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요. 말 안하면 정말 모른다고요.”

녀석이 살면서 직접 느꼈던 부분이리라.

“내입으로 하는 것보다 나중에 네가 말해주면 더 멋있겠네.”

“그럼 그렇지. 나를 부른 목적이 있었어.”

“하하하.”

내가 잔을 내밀었고 광두가 잔을 부딪쳤다.

“도련님.”

“왜?”

“솔직히 다 말하고 그 분께 말씀하세요. 함께 하고 싶다고. 도련님이 아까 그 분을 보는 눈빛을 봤습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그렇게 좋은 느낌으로 쳐다보시는 것 처음이었습니다.”

“너를 볼 때보다도?”

“그건 저는 모르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광두 입장에서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백표가 함께 하면 자신의 자리가 좁아들 수 있음을 모를 리 없었으니.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과 애정을 나눠줘야 한다는 것도.

그럼에도 광두는 내게 말해주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오냐, 생각해 보마.”

광두가 비운 마음의 질투처럼, 녀석의 술잔도 비었다.

“하세요. 꼭.”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이 이제 겨울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술자리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건너편 침상의 광두 역시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이 들지 못했다. 녀석도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문득 수십 명의 강적과 싸울 때보다, 이런 일을 결정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 많은 밤이 지나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