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라명왕(4)
반서정은 무림맹 내원 깊숙한 곳에 잘 꾸며진 객청으로 안내되었다.
그녀를 따라 왔던 빙노대는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었기에 밖에서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
객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어서 오시오, 반회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사마군사님.”
“자, 앉으시지요.”
미리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상대가 여인임을 뻔히 알면서 첫 만남에 미리 술상을 차려놓은 것은 결례라 할 수 있었다.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그것이 공식적인 첫 만남이라면 차를 마시다가 술을 한 잔 하겠냐고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하외다.”
“아닙니다. 당연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지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구려. 자, 한 잔 받으시오.”
그녀는 그것이 비록 첫 만남이라도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술 한 잔 할 수 있다.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남녀의 구분은 넘어선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사마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천도문 일파에 붙어서 온갖 부패한 일을 도맡았던 인물이었다. 무림맹의 총군사라는 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군사라기보다는 권모술수에 능한 정
치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어쨌든 속마음과는 별개로 반서정의 표정에는 그런 불편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호의적이지 않은 상대일수록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이 그녀의 처세술이었다.
좋은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해도 될 것이다. 화가 나면 이러이러해서 화가 난다고 말해도 된다. 적어도 그것을 곡해해서 앙심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적이라 여겨지는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일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그것이 분노라면 더욱 그렇다. 그 순간에는 상대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 같겠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에게 한
것이 되고 마니까.
그때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사마천의 부름에 도착한 사람은 바로 갈사량이었다.
그곳에 반서정이 있는 것을 보고 갈사량이 흠칫 놀랐다. 반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곳에서 갈사량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알고 있는 사이겠구먼.”
그는 마치 모르고 불렀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갈사량도, 반서정도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이 만남을 주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반서정이 먼저 인사하자 갈사량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반서정은 그 대답에서 서글픈 감정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주군을 잃은 제가 어찌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갈사량이 들고 온 서류를 사마천에게 내밀었다.
“여기 부탁하신 서류입니다.”
“하하, 고맙네. 온 김에 술 한 잔 하고 가시게.”
“아직 근무 중이라서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생하시게.”
사마천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있다는 것까진 알지 못했다.
오늘 이 자리에 갈사량을 부른 것은 그녀 앞에서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일개 군사가 되어서 잡다한 심부름이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모욕적인 일이 될 테니까.
사마천은 끊임없이 갈사량의 정신을 파괴해서 바닥으로 추락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악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갈사량이 방을 나섰다. 문이 채 닫히기 전에 사마천이 말했다.
“참으로 유능한 사람이었지요.”
일부러 과거형으로 갈사량이 들으라고 한 소리였고, 동시에 그를 어떻게 여기는지 반서정을 떠 보는 말이기도 했다.
반서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호에 유능한 사람은 많답니다. 하지만 시대가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마음에 없는 말이었지만, 사마천의 귀에는 마치 시대가 원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달콤한 말처럼 들렸다.
사마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맛이지.’
이게 바로 권력의 맛이었다. 자신이 총군사가 아니라면 천망회의 회주가 따라주는 술을 어찌 마실 것이며, 술보다 달콤한 저런 말을 어찌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무림맹 총군사가 되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천망회주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천도문 똥구멍을 열심히 닦아준 보람을 요 근래 제대로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랬기에 이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고 이제 그녀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럽시다.”
일어서기 전에 반서정이 품에서 뭔가를 내밀었다.
“최근에 본회에 들어온 정보입니다. 오늘 군사님과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사마천이 그것을 펼쳐보았다.
내용을 읽은 사마천이 깜짝 놀랐다.
“정말 전대맹주가 남긴 글이오?”
“그렇습니다. 친필임은 이미 저희 쪽에서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이 글을 입수했소?”
그러자 반서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강호의 정보는 자연의 이치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법이지요. 어떻게 여름이 왔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마천이 더는 묻지 못했다. 정보조직끼리는 그 정보의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은 불문율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정보는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사실 반서정은 이 정보를 흘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갈사량을 위해서는 흘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여러 가지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이 갈사량을 이곳에 불러 모욕감을 주는 것을 보고 정보를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가 먼저 객청을 떠났고 사마천 역시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 * *
“뭔가 수상합니다.”
사마천의 부름에 달려온 조벽은 반서정과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장 의심부터 했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너무 공교롭습니다.”
“맹주가 직접 쓴 것으로 밝혀졌다지 않나?”
“필적은 위조할 수 있습니다.”
“맹주만이 아는 추혼수라검술에 관한 내용도 적혀 있었네. 그건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맹주가 아니라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일단 기다려보세. 우리 쪽에서도 필적감식 중이니까.”
무림맹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감식관에게 맡겼다.
“만약 자네 추측대로 그것이 위조된 것이라면 천망회주가 나를 대적한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맞선다는 것은 곧 무림맹과 맞선다는 뜻, 다시 말해 조직의 생사를 걸었다는 뜻이다.
“이런 일로 천망회가 목숨을 건다?”
사마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누군가 그들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 전 맹호단주가?”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백표였다. 지금 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의심받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날 본 느낌이나, 그의 과거 이력으로 볼 때 그는 이런 일을 꾸밀만한 사람이 아니었네.”
조벽 역시 그 의견에는 동감했다.
“갈사량이 꾸몄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갈사량에게는 감시를 붙여둔 상태였다. 만약 천망회와 접촉했다면 자신에게 연락이 왔을 터,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이니, 감시를 피해 천망회주와 접선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를 보며 깜짝 놀랐다. 꾸며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집무실로 수하가 들어와서 보고했다.
“필적감식 결과 전대 맹주가 쓴 글이 확실하답니다.”
“확실한가?”
“네, 확실하다고 합니다.”
“위조 가능성은?”
“전혀 없답니다. 감식관 말로는 전대 맹주께서 돌아가시기 몇 달 전쯤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답니다. 무공을 언급한 부분 역시 원로원의 노고수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맹주님이 쓰신 것처럼 보인다는 대답을 들었습
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도록.”
수하가 물러나자 사마천이 조벽을 쳐다보았다.
조벽은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이것이 진짜라 하더라도 공교롭게 이 시점에 풀린 것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풀었다면 백표나 갈사량의 짓이겠지. 맹주의 유품을 보관하고 있을만한 사람은 그들 두 사람 뿐이니까. 한데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중요한 것은 이제 이 세상에 수라명왕검은 없
다는 점이네.”
사마천이 수라명왕검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마봉기에게 바쳐서 신임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검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관심도 함께 사라졌다.
“백표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게. 우리가 해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많네.”
사마천은 강호인들이 원하는 것은 관심이 없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듯 여전히 마봉기가 원하는 것을 찾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나는 잠시 엄마 심부름을 온 백표의 아들 명이를 만날 수 있었다.
“인사해야지. 벽공자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명이라고 합니다.”
일곱 살이 된 백표의 아들이었다. 똘똘한 눈망울에 일곱 살 치고는 예의가 발랐다. 하긴 누구 아들인데 바르지 않겠는가?
“누굴 닮아 이렇게 잘 생긴 겁니까? 형수님이 아주 미인이실 것 같습니다.”
형수란 말에 백표가 당황했다. 자신이야 주점의 주인에 불과하지만 나는 손님이자, 벽씨검문의 후계자였으니까.
내가 편한 미소를 짓자 이내 백표도 긴장을 풀었다. 나를 향한 눈빛에 감격이 스쳤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감격한 것이다.
전생에도 이러했어야 한다. 이런 말 한마디, 작은 배려 하나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인데. 그깟 맹주의 권위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 빡빡하게 살았던 것일까?
“명아,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명이에게 동전 하나를 쥐어주니 아이는 백표를 쳐다보며 받아도 되는지를 물었다.
백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맙다며 인사를 꾸벅하고는 쪼르르 뒷문으로 달려갔다.
명이를 향한 백표의 눈빛이 깊어졌다.
“요즘은 저 놈 키우는 재미로 삽니다.”
백표는 나를 지켜주며 청춘을 보냈다.
나와 함께 온갖 전장을 떠돌며, 정말이지 미친 듯이 싸웠다.
그 과정에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몸에 난 수십 개의 상처보다 그의 마음에 난 상처가 더욱 깊을 것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들.
그리고 무림맹을 떠난 백표는 이제 내 검을 지키고 있다.
평생을 나와, 나와 관계된 것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삶을 생각한다면…… 권위에 찬 늙은이의 목숨이 뭐가 그리 중요했다고. 저깟 검이 무엇이라고.
그러니 백표야, 이젠 행복해도 된다. 마음껏 행복을 누려라.
이제는 내가 지켜주마.
* * *
세 사내가 무한 외곽의 한 장원으로 들어섰다.
각기 다른 체형과 나이를 지녔는데, 각기 특징들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는 털북숭이 사내였다. 구레나룻이 얼굴을 덮었고, 손등과 팔에도 털이 수북했다. 또 다른 사내는 엄청난 거구였는데, 그의 팔뚝이 보통 사람 허리 두께는 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사내는 얼
굴이 메주를 으깨어 놓은 것처럼 정말 못생긴 사내였다.
이렇듯 저마다 특징이 분명했는데 한 가지는 비슷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살기가 충만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인 후 그 옆에서 식사를 할 것만 같은 그런 만성적인 살기였다.
이들이 바로 조벽의 세 그림자, 삼영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조벽이었다.
“왔느냐?”
“저희 셋을 다 부르시고.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아쉽지만 너희가 필요한 임무는 취소되었다.”
삼영이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벽이 백 냥짜리 전표를 서너 장 꺼내서 그들에게 주었다.
“한동안 계집이나 품으면서 쉬고 있어라.”
삼영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진 무한을 떠나지 않도록.”
조벽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사마천은 이번 일에서 손을 뗐지만, 자신은 여전히 찝찝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 뭔가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은밀히 백표에게서 뭔가를 더 알아낼 생각이었다. 물론 사마천에게는 결과를 보고 하지 않을 작정이다.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돌아서 나가려던 삼영 중 하나가 넌지시 물었다.
“한데 원래 우리 목표는 누구였습니까?”
“전직 맹호단주.”
“제법 강하겠군요.”
“강한 정도가 아니지. 너희 셋이 합공해도 놈을 죽이진 못할 거다.”
“그 정도입니까?”
“넌 무림맹 맹호단을 뭐라 생각하느냐? 맹주를 지키는 자들이다. 맹호단주는 그런 자들의 수장이고. 나조차도 정면승부로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걱정 마라. 놈에게 마누라와 아들이 있다. 언제든지 무릎을 꿇릴
수 있지.”
네 사내의 표정에 동시에 야비함이 스쳤다.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었고, 살아남은 방법이기도 했다.
“형님 살생부에 올랐으니, 맹호단주가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지요.”
자신들과 얽혀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아무리 고수라도 어떻게 해서든 약점을 찾아내서 죽였으니까.
그들이 떠난 그곳에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한으로 오고 있던 삼영의 행적에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나였다.
나는 기척을 감춘 채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명령이 취소되었다는 말에 내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었다. 저 조벽은 아직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것이다. 삼영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놈이 백표 가족에 대해 언급하는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저 넷을 모조리 없애버리기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다. 가족을 건들고, 무공을 모르는 사람을 해치는 것. 그런데 그것이 백표의 가족이라면?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다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애써 수라명왕검을 내가 없앤 것으로 믿게 했는데, 굳이 또 사마천에게 의심 살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시간차를 두고 이번 일과 전혀 다른 일에 엮어서 없앨 것이다.
너희는 내 살생부에 올랐다.
너희 살생부에는 유언이나 남겨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