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60화 (60/304)

=======================================

기연은 어디에서 오는가?(3)

나는 천문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에 호북에 갈 일이 있을 때 들를까 잠시 고민했는데, 그냥 기회가 되었을 때 가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거리도 멀거니와 거기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디를 가려고?”

“호북에 다녀오겠습니다.”

“호북에는 왜?”

“간 김에 무림맹 본단도 들러보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보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넓은 세상을 알아야지.”

아버지는 전적으로 나를 믿어주었다. 근래 내 변화도 변화였지만 결정적으로 나를 신뢰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소검대의 무인들이 나를 진심으로 따른다는 것을 서중이 아버지에게 전해준 것이다.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다.

아버지는 무공을 상승시키는 것보다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때도 아버지는 나를 불러서 전에 해줬던 충고를 또 해주었다.

“아랫사람이라도 항상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여라.”

나는 아쉬웠다. 내가 맹주가 되던 그 무렵, 아버지가 내 옆에서 이런 충고를 반복해서 해주었다면, 나의 전생은 또 달랐을 것이다. 사람관계에서 권위가 최우선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인가가 그 자리를 메웠으리라.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어머니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네가 없을 때 린이가 다녀갔다.”

“무슨 일로요?”

“그냥 내게 인사차 왔더라. 린이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단다.”

그녀가 어머니를 보러 왔다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송화린이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그 아이에 대한 네 진짜 속마음은 어떠하냐?”

“예전에 드렸던 말씀과 같습니다. 지금은 혼인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

지금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사랑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땐 내 심장이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게 새로운 여인이 될 수도, 혹은 송화린이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뀔 수 있는 일이니까.

마정수에게 한 방 먹이던 송화린의 모습에 나는 그녀에게 감격했다. 연못을 내려다보던 칠호의 모습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이렇듯 관계를 바꾸는 것은 어떤 ‘계기’다. 그것이 작거나 크거나 상관없다. 적시에 제대로 발생하면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하는 일이 네가 원하는 일이더냐?”

“네.”

좋은 배필을 만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에는 아마도 자식이 외로운 삶을 살아서 불행해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클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어머니, 저 요즘 많이 행복합니다.”

그제야 어머니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떠나기 전에 잠시 송가장에 들르겠습니다.”

“나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아들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어머니에게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한 번 가려고 했었습니다.”

내가 없을 때 어머니를 보러 와준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들겨 팬 일로 송화린을 자주 만나라는 벌을 내린 송우경도 마음에 걸렸고.

* * *

“하하하. 잘 왔네.”

내 방문에 송우경이 크게 기뻐했다.

벌을 줬는데 받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자, 인사는 됐으니 어서 린이에게 가보게.”

“알겠습니다.”

송우경이 나를 떠밀 듯 내보냈다. 그가 너무나 흡족해 하는 모습을 보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란이 송화린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나를 향한 그녀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나는 모른 척했다.

연무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수란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런 말씀 외람되지만 딱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하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는 마음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그런 일 없을 거요.”

“고맙습니다.”

그녀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얼핏 생각하면 까칠하고 무례해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수란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화린을 위하는 마음에 기꺼이 용기를 낸 것이다. 껄끄러운 일을 기꺼이 하는 것이 진짜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녀 옆에 수란이 있어서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송화린은 연무장에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늘씬한 그녀가 초식을 펼치자 정말 아름다웠다. 거기에 땀까지 흠뻑 젖어서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을 보자 정말 보기에 좋았다.

그녀는 내가 지적해준 그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도 약점을 없애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벽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수란의 말에 송화린이 수련을 멈추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왔어?”

“수련에 방해가 됐군. 미안해.”

“아니. 이제 끝내려고 하던 참이었어.”

부은 얼굴은 이제 다 가라앉아서 거의 표가 나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그녀는 오히려 전보다 좀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우리 집에 왔었다고?”

“어머니를 뵙고 왔어.”

그러고 보니 송화린의 모친은 그녀가 어렸을 때 죽었다고 했다. 전생의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녀는 아버지 손에서 자란 것이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내 초식 한 번 봐줄래?”

“얼마든지.”

그녀가 지난번의 그 초식을 펼쳐보였다.

“그때 네가 이쪽으로 피하면서 내 초식을 파훼했어.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이 이거야.”

그녀가 자신의 초식을 약간 변형해서 펼쳤다. 확실히 앞서의 약점을 보완한 한 수였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에 제법 괜찮은 해법을 찾아낸 것이다.

내가 검을 뽑지 않고 손으로 방향만 잡아서 한 방향으로 쭉 뻗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공격을 하면?”

그러자 송화린이 ‘아’하며 짤막하게 탄성을 내뱉었다. 초식을 바꾸면서 기존에는 없던 약점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찾은 방법이 해답이 아니었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다시 생각해 볼게.”

초식을 완벽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법도 했는데, 그녀는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혼자서 해내고 싶은 것이다.

“한데 어쩐 일이야?”

“벌이야.”

“뭐?”

지난 번 송우경이 와서 했던 말을 전해주었다.

“참, 아버지도.”

그녀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좀 더 편해져서인지 이제 대화는 부드럽게 잘 이어졌다.

우린 일각 쯤 대화를 나눈 후 작별인사를 했다.

“호북에 간다고 했지? 잘 다녀와.”

“고맙다.”

돌아서 걸어가는데 멀리서 그녀가 혼잣말을 했다.

“다음에는 벌 말고…… 그냥 와.”

당연히 안 들릴 줄 알고 말했겠지만 청각이 예민한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못들은 척 그곳을 나섰다.

* * *

엿새 후. 나는 천문산 인근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천문산을 끼고 여러 마을이 있었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선학봉 근처 마을이었다. 젊은 시절 비무를 하러 와본 곳이지만 처음 와 본 것처럼 낯설었다.

나는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단지 오래전 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열 번을 왔어도 여전히 낯선 곳일 것이다. 그때는 경치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오직 상대만 보던 시절이었다.

이제 이곳에 다시 오니 그것이 얼마나 급급한 마음이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이곳에 오기만 했을 뿐인데, 이 여정은 벌써부터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그래, 여유를 가지자.

다른 삶을 살 때만이 다른 결과도 낼 것이다.

마을에 작은 객잔이 하나 있었다.

손님이 많이 없는 관계로 주인은 농사일을 병행하면서 객잔을 운영한다고 했다.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내 기억이 맞았다. 선학봉이 천문산의 주봉이었고, 너무 높고 험해서 약초꾼들조차도 쉽게 오르지 못한다고 했다.

객방을 빌린 후 그날 하루는 여독을 풀고 푹 쉬었다.

다음날 새벽 산을 올랐다.

대체 이 산에 무엇이 있을까?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일단 나는 정상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상자에 남겨진 내용으로 볼 때,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 어딘가에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산세는 아주 험했다. 무공을 익힌 나도 쉽게 오르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적이 없다보니 길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이쪽 길인가 싶어 가다보면 산 아래로 향하기도 했고, 또 저쪽 길인가 싶어 열심히 오르다보면 막다른 곳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경신법으로 무작정 날아오르지는 않았다.

내가 이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 산꼭대기에 꽂힌 깃발은 아닐 테니까.

첫날이니 느긋한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결국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왔다.

다음날도 새벽 일찍 산을 올랐다.

이미 어제 한 번 헤매본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은 좀 더 쉽고 빠르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보다 좀 더 올라갔을 때, 역시 길을 잃었다.

물론 경신술을 발휘해서 이 구간을 넘어버리면 되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왔던 길을 내려가서 분기점이 될 만한 지점에서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한참을 더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느 정도 더 올라가니 길이 끊어져 있었다. 이 길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길을 찾으면서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객잔에서 술을 마셨다.

안주를 가져다주며 주인장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이 작은 마을에는 어인 일로 오신 겁니까?”

“선학봉을 오르려고 합니다.”

“선학봉을요?”

“네. 친우가 선학봉의 풍경이 대단하다고 하도 자랑을 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맞습니다. 선학봉은 정말 절경을 지닌  산이지요. 정상의 바위가 두루미를 닮아서 선학봉이라 불린답니다. 하지만 워낙 길이 험해서 보통 사람은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지요.”

“과연 힘들더군요. 마을에 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마을 약초꾼이 잘 알고 있지요, 한데 지금은 다른 산에 약초를 캐러 나가 있습니다. 한 달은 있어야 돌아올 듯합니다만.”

“그렇군요.”

아쉬워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내 힘으로 길을 찾을 생각이었으니까.

“예로부터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강호인들이 들어와서 수련을 하곤 했었다고 하지요. 오래 전에는 아주 유명한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저도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인지라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답니다. 아주 대단한 고수였다는 말씀만 기억납니다.”

“아, 그러시군요.”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상자의 낡은 종이만큼이나 그것을 남긴 사람 역시 오래전 사람이었다.

“자, 이것 드시고 힘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창밖 저 멀리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술보다는 산골마을의 정취에 취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나는 기어코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냈다.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대신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까마득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에 혼자만 살아남은 고독감마저 들었다.

정말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었지만 종이가 남긴 것이 이 경치는 아닐 것이다.

내 힘으로 길을 찾아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정상에 서서 기분 좋게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아아압!”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은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사람이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었는데,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을 위치에 있었다.

눈에 힘을 줘봤지만 컴컴한 어둠속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막상 들어가려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독사가 득실댈지, 독충이 버글댈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작은 동물이 살고 있는 동굴일 수도 있었다.

설마 여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 동굴은 절대 강호인이 찾을 수 없는 동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신술을 사용할 수 있는데, 며칠이나 헤매며 굳이 이런 수고를 하진 않을 테니까.

스스로 길을 찾아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동굴.

어쩌면 그것이 일차 시험이 아니었을까?

그래, 들어가 보자.

동굴은 좁고 비좁았다.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고 지독한 냄새까지 났다. 나조차도 다시 돌아갈까 몇 번이나 망설였으니, 이곳을 계속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뱀이나 독충은 없었다.

한참을 기어가니 동굴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고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저 앞에 환한 빛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나갔을 때.

“헉!”

나는 깜짝 놀랐다. 발 하나를 둘 수 있는 정도만 있었고 아래는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저 위쪽이 정상이었다. 두루미의 꼬리가 뒤로 나온 부분이었는데, 꼬리처럼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 작은 동굴이 보였다.

정상에서도 그 아래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설령 아래를 내려 보려고 해도 바위가 아래로 비스듬히 있어서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오직 이 절벽난간에서만 그 동굴의 입구가 보이는 것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상자 속에 든 종이가 이끈 장소가 바로 저 동굴임을.

정말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산을 올라오는 길을 찾아내고, 정말이지 여긴 아닐 것 같은 작은 동굴을 통과해야 하며, 이 위험천만한 절벽의 발 하나 디딜 난간에서 위를 살펴볼 용기가 있어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하

나 더. 이 천장절벽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저 위로 몸을 날릴 수 있어야 한다.

저 입구를 잡지 못하면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경신법을 써야만 했는데, 그것도 상당한 실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힘차게 몸을 도약하며 날아올랐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허리와 손을 쭉 뻗었다.

꽉.

절벽에 매달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통로에 도달한 것이다. 천천히 팔에 힘을 주며 위로 올라갔다. 동굴 입구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컸다. 적어도 서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