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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57화 (57/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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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은 소리 없이(3)

제남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계약을 체결하러 갔다.

공사를 맡기로 한 사람은 두종(頭從)이란 사내로 제남에서 집을 잘 짓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마공자께서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평생을 억센 인부들을 상대해온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 계약을 파기한 것 때문에 보복이라도 하러 온 것이 아닌가 불안한 것이다.

“본 공자가 직접 행차하지 않으니 헛소문이 돌더군요.”

두종이 당황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본래 공사판에 나오는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일정에 맞춰 진행되지 않으면…….”

마정수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변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오.”

차가운 한마디에 두종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데다가 계약을 파기한 일이 있었기에 조심스러운 것이다.

마정수가 전표를 올렸다.

“자, 여기 계약금 이만 냥이오. 원래 계약금보다 만 냥 더 올렸으니 더는 소문에 휩쓸리지 말고 공사에 열중하시오.”

“지금은…….”

곤란하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마정수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두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행 중인 다른 공사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하하. 잘 생각하셨소.”

“우선 계약서부터 작성하시지요.”

두종이 사람을 불러 계약서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마 가까운 전장에 전표를 맡기러 간 것이리라. 이만 냥은 전체 공사대금의 오분지 일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마정수가 직인을 찍고 수결을 했다. 앞서 야상에서 계약할 때 내키지 않아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기쁜 모습이었다.

잠시 후 두종이 돌아왔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오셨소?”

그가 마정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무슨 말이오?”

“주신 전표가…… 가짜입니다.”

“뭐요?”

마정수가 화들짝 놀랐다. 나도 덩달아 놀라는 척하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두종이 나와 마정수를 번갈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모르시는 일입니까?”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 분이 누구신데 가짜 전표를 사용하겠소? 게다가  이렇게 금방 밝혀질 일을 저지르겠소? 이 일은 천도문의 명예에 큰 누가 갈 일이오.”

두종이 안심하며 말했다. 혹시나 계약을 파기한 일로 화가 나서 가짜 전표를 가져와서 행패를 부리려는 것일까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가셔서 확인해 보시죠.”

우리가 두종을 따라 나섰다.

가까운 대륙전장에 가서 전표가 가짜임을 확인했다.

이천 냥을 제외한 나머지 만팔천 냥이 가짜임이 밝혀졌다. 확인을 할까봐 위에 넣어두었던 이천 냥만 진짜였던 것이다.

마정수가 두종을 닦달했다.

“당신이 바꿔치기 한 것이지?”

“어이쿠!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두종이 살려달라며 제자리에 엎드렸다.

내가 마정수에게 말했다.

“저자가 어찌 알고 미리 가짜 전표를 마련해 두었겠습니까?”

그러자 의심의 눈초리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십니까?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나는 한 점 부끄럼 없다는 표정으로 마정수를 쳐다보았다.

이내 마정수가 의심을 거뒀다. 내가 바꿔치기 했다고 하기에는 내 태도가 너무 당당했고, 이렇게 뻔히 밝혀질 일인데 제남까지 함께 따라올 리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설마 야상 놈들이 가짜를 내준 것인가?”

“그렇겠지요.”

“이렇게 곧장 밝혀질 일인데? 감히 내게 사기를 쳤단 말인가?”

“놈들만의 소행이 아니겠지요. 다른 후계자들이 도련님 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렇군. 이것들이!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 구나!”

마정수는 시곤을 죽인 자가 야상과 공모했다고 여긴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혹시라도 두종 일가에게 해를 끼칠까봐 마정수에게 말했다.

“이걸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십만 냥을 갚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뭐?”

“차용증에 직인을 찍고 수결까지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당장 돌아가서 남은 전표부터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착오가 있었다면 바로잡아야 할 테고요.”

* * *

우린 서둘러 다시 양소방으로 돌아왔다.

금고의 남은 전표를 전장에 가져가서 확인했지만, 전표는 모두 가짜였다.

마정수는 다시 한 번 책상을 부수고 발작했다.

“난 절대 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다. 산동의 야상을 단 한 놈도 살려주지 않을 거야!”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본문에서 나를 도울 사람들을 모두 불러올 것이다. 후계자 시험 따윈 다 때려치우라고 해!”

저 분노의 중심에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라고. 너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상대를 무시하고 살아왔다고. 그 무시들이 비로소 네게로 되돌아 온 것이라고.

물론 말해준다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겠지만.

“술 가져와! 술!”

내가 술을 가져다주었다. 잔뜩 가져다주었다.

“그 개 같은 년은 어디에 있어? 어디야?”

“오늘은 못 봤습니다.”

“흥! 쥐새끼 같은 년! 귀신처럼 숨었군.”

마정수가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마셨다.

안주를 가져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복도에 있었다. 앞서 술을 가져올 때도 그녀를 만났다.

“왜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죠?”

“그냥…… 보다시피 마대협의 상태가 좋지 않소.”

여인의 눈빛에 고마움이 스쳤다.

고맙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제남으로 가면서 큰 깨달음을 준 것을 생각하면 이런 것은 보답 축에도 들지 못했으니까.

* * *

그리고 그날 밤.

술에 취한 마정수가 어딘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송가장이었다. 취기가 오르자 송화린이 떠올랐고 그녀를 범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한 번 들기 시작한 욕정은 계속 커져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나지 않았고 아랫도리에 몰린 피가 풀리지 않았다.

결국 저질러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근래에 일어난 분노와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거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크게 작용했다. 이대로라면 후계자 선정에서 떨어질 것은 자명할 일이었다. 어차피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새로 후계자가 된 놈에게 죽게 되거나, 더 끔찍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결국 해서는 안 될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계획은 세웠다. 아무리 천도문의 후예라도 송가장주의 딸을 범했다가는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복면을 쓰고 침입해서 그녀를 범할 것이다. 항상 가지고 다니던 음약(淫藥)을 먹일 생각이다. 가루로 만들어져서 잘 때 살짝 뿌리기만 하면 되는 약이었다.

이 더러운 결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망할 년! 내가 후회하게 해준댔지?”

제남으로 가는 길에 그녀가 했던 말에 품었던 앙심을 핑계로 사용하는 것이다.

“건방진 년! 약에 취해서도 네가 어떻게 나오나 보자!”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누군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누구냐?”

마정수는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새 면구를 쓰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를 향해 싸늘히 말했다.

“이 강호에는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있지.”

우리 아버지를 의미했고, 송화린을 의미했고, 산동 강호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앞서 억지로 계약을 해야 했던 두종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에게 짓밟혀 온 모든 사람들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알아야 했다.

“야상의 돈을 건들고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다.”

어디선가 그 여인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개 같은 놈! 가짜 전표를 내 준 것도 모자라 나를 찾아 와? 이 새끼, 너 잘 걸렸다!”

마정수가 살기를 내뿜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놈은 확실히 고수였다. 술에 취하고, 색정에 취한 스물다섯의 어린놈이 저 정도 기도를 뿜어내다니, 감탄스러울 정도다.

중원오세의 저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나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더 빨리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지켜보고 있을 눈을 의식했다.

창창창창창!

그와 팽팽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나는 추혼수라검술도, 백월검술도 사용하지 않았다.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놈을 상대했다. 전생에 내가 상대해 왔던 적들 중에, 살수들이 주로 사용하던 검술을 흉내 내서 사용했다.

일체의 화려함도 없는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초식이었다.

순식간에 오십여 수가 지나가고.

이쯤이면 되겠다 싶었을 바로 그 때, 내가 제대로 검에 힘과 속도를 실었다.

두 개의 검이 교차했다.

마정수의 검은 허공을 찔렀지만, 내 검은 녀석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우우욱!

“으으으으으윽!”

놈이 눈을 부릅뜨며 가슴을 관통한 검을 내려다보았다. 아픈 것은 둘째였다. 놈은 공포심에 휩싸였다. 사람을 찌르기만 했지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검에 찔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뭐야?”

내가 모질게 검을 비틀었다.

“으아아아악!”

마정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아파! 제발! 그만!”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회의 눈물이라면 좋겠지만,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억울함의 눈물이었다.

“제발…… 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너는 억울할 필요 없다. 네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이니까.

그런 말을 하고 싶겠지.

천도문 시비의 혈육으로 태어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모든 사람이 환경에 지배당해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핑계에 불과하다. 자신의 악행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사아아악.

빠르게 검을 뽑아낸 내 검이 다시 놈의 목을 찔렀다.

푸욱!

마정수가 목에서 피를 뿜어냈다.

사아아악.

푹!

사아악.

푸우욱!

빠르게 여러 차례 검을 뽑아 찔렀다. 이미 두 번째 검에 절명했지만 나는 여러 번 그를 찔렀다. 이게 야상의 방식이었으니까.

마정수가 볏단처럼 쿵하고 쓰러졌다. 금방 피웅덩이가 생겨났다.

검을 회수하고 돌아섰을 때, 과연 저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서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눈빛. 예리한 기세.

확실히 그녀는 강했다. 어쩌면 시곤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마정수와 싸움이 벌어졌을 때, 개입했었겠지.

그녀를 보며 내가 차갑게 경고했다.

“우릴 건들면 반드시 죽는다.”

그 말을 남긴 후 나는 곧장 그곳을 떠났다.

여인은 나를 뒤쫓지 않았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철저히 방관자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마정수의 시체를 옆구리에 들면서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짓는 것을.

곧바로 내 방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원래의 인피면구를 착용했다.

왠지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나를 찾아올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과연 일각쯤 지났을 때,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톡.

창가에 작은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창문을 열자 그녀가 마당에 서 있었다. 시체는 담장 밖 어딘가에 둔 모양이다.

이별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어서일까?

그녀는 조금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떠난다는 말도, 마정수가 죽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내 이름은…… 칠(七)호에요.”

그녀가 어떤 조직의 비밀병기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칠호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도 여자가. 하지만 그녀는 저 이름 이외에는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하겠지.

가슴이 울컥하면서 먹먹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이름이오.”

그녀의 이름은 칠호고 정체를 알 수 없다. 갈표라는 내 이름 역시 가짜고, 이 얼굴도 가짜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이전의 그 어떤 것보다 인상적이었고 강렬한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렇게 한마디 작별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잠깐.”

걸어가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리 연못을 보고 있었소?”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고 들었어요. 정말 그런가요?”

그녀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잉어도, 연못에 비친 달도 아닌 바로 연꽃이었다.

“그렇다고 들었소.”

“정말 그렇군요.”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의 모습 중에 가장 기분 좋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녀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과연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칠호라는 이름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밤하늘을 꽉 채운 가을달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별채 문 앞에서 정여가 나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방주도 고생하셨소.

이것으로 마정수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던 풍파가 끝이 났다.

나는 안다. 마정수 따위는 진짜 불어올 태풍에 비하면 소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더 강해져야 한다.

앞으로 더 강하고 독한 놈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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