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55화 (5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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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은 소리 없이(1)

장원은 스산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수백 명이 병장기를 꼬나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오히려 상대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정수가 방문한다고 미리 연락을 했지만, 그들의 대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놈들이 확실히 보통 놈들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시곤이 당하지도 않았겠지.

사내 하나가 나와서 우릴 대청으로 안내했다.

대청 가운데 야천이 앉아 있었고 그 주위로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늘어서 서 있었다. 이곳 야상 무인들 중 제일 강한 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눈빛은 확실히 일반 무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것이 무서워 보이는 것은 그 독기와 분노가 강호인에 대한 어떤 경멸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사방 기둥 곳곳에 사내들이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눈빛이 빛났다. 하나하나의 무공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저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이미 봤던 나였다. 무공은 별 것 아닌데, 문제는 암기였다. 그것도 독이 발린 암기여서 아주 조심해야 한다.

마정수 역시 매복을 느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야천에게서 십여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당당히 걸어간 후에 마정수를 소개했다.

“천도문의 후계자이신 마정수 대협이시오. 예를 갖춰 인사하시오.”

그러자 야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하찮은 것들의 주인인 야천이라고 합니다. 귀하신 분들께서 이 누추한 곳은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마정수가 포권하며 간단히 자신을 밝혔다.

이후 일은 앞서 마차에서 말한대로 내가 나섰다.

“이곳에 올 일이 뭐가 있겠소?”

야천 역시 바짝 긴장하고 있었기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놈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혹시 시곤의 죽음과 관련해서 찾아온 것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겠지.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대협께서는 그대에게 돈을 빌리러 왔소.”

그 말에 야천이 흠칫 놀랐다. 설마 마정수가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그대가 주로 하는 일이지 않소?”

“물론이오만, 귀하신 분이 이 하찮은 사람에게 돈을 빌리려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말입니다.”

“귀한 분에게도 돈은 필요한 법이지요.”

그제야 야천이 안도했다. 적어도 복수를 하러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천이 조금 느긋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시오?”

“십만 냥.”

풀어지던 야천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엄청난 액수도 액수이지만 상대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돈을 빌리러 온 것인지, 아니면 십만 냥을 받고 시곤을 죽인 일을 덮어주겠다는 것인지.

내가 은밀히 야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도문 사람을 죽였으니 이 정도 대가는 치러야하지 않겠나?

야천이 꿈틀했다.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반응이었다.

난 빠르게 전음을 이었다.

-그대의 운을 시험해 보든지. 과연 천도문의 후계자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수 있을지. 우리가 아무 대책 없이 이곳에 왔을까? 십만 냥을 빌려주면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해주지. 물론 이자도 주고 돈도 갚을 거다.

야천이 전음을 보냈다.

-왜 전음으로 말하는 거요?

-우리 입으로 시곤의 죽음을 언급하는 순간, 우리는 너희들을 다 없애버려야 하니까. 우리가 원치 않아도 일은 그렇게 진행될 것이다. 알지 않나? 우린 목숨보다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임을.

그렇게 날카로운 어조로 전음을 보낸 후, 이번에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소식을 들었겠지만 앞으로 마대협이 산동에서 기반을 다지게 될 것이오. 이번 거래가 그대들의 앞날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소.”

은근한 협박이 깃든 말이기도 했다.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반대의 경우가 될 테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그러시오.”

야천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시곤의 행방을 알린 자들이 저 마정수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눈엣가시 같은 수하를 제거하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이다. 돈도 빌리고, 수하도 없애고. 야천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다.

‘개 같은 놈들!’

더럽고 치사하기가 자신들보다 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십만 냥이 자신의 전재산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데 목숨을 걸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주고 나서 후일이든 복수든 모색해야 할 상황이었다.

야천이 눈을 뜨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좋소, 돈을 빌려 드리리다.”

“내일까지!”

“그러지요.”

“고맙소. 오늘의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전액 소액전표로, 내일 풍산에 있는 사당에서 봅시다.”

당장에 계약서를 작성했다.

마정수가 직접 직인을 찍고 수결까지 했다.

그는 계약서를 꼭 써야 하느냐고 내키지 않아 했지만, 내가 좋게 설득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오히려 저런 놈들을 상대할 때는 정확한 것이 좋다고.

내키지는 않겠지만 마정수가 받아들였다. 당장은 십만 냥이 급했으니까.

이것은 나중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누군가 이번 일을 조사를 했을 때, 돈을 빌렸던 증거까지 확실히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계약서를 쓰고 우린 장원을 떠났다.

우리가 떠난 그곳에 분노가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터져 나온 분노는 구철의 것이었다.

“건방진 새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서! 당장이라도 쳐 죽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내들도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반면 야천은 느긋했다.

“죽이는 것은 나중에 죽여도 된다.”

야천은 구철이 시곤을 죽인 후 본격적으로 마정수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정수는 어려서부터 독하고 잔인해서 시비며 수하 무인을 대수롭지 않게 죽인 자였다.

야천도 악인이라면 나름 빠지지 않는 악인이었는데, 눈살이 찌푸려는 사건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희생자들은 상대적 약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죽음이 대부분 밝혀지지 않고 묻혔다.

“이런 더러운 놈에게 정말 십만 냥을 내주시게요?”

야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은 죄가 있으니 일단 두고 보자고.”

“하지만 너무 큰돈입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라.”

야천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산동상회의 돈을 놈이 가로챈 것이 확실하다면, 놈에게는 돈이 아주 많겠지?”

“그렇겠지요.”

“일단 이자는 충분히 낼 수 있겠군.”

“네? 그 말씀은?”

“그럼 그냥 주는 것인 줄 알았느냐? 우리가 누구냐? 천도문이 아니라 천도문 할애비라도 이자에 원금까지 다 받아내야지. 어떻게든 받아낼 것이다. 거기에 우릴 가지고 장난질 친 대가까지.”

* * *

나와 마정수가 탄 마차가 장원을 벗어나자 마정수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정말 자네 대단하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야, 아주 훌륭했어.”

그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일처리를 잘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이제 내일 돈을 찾으면 됩니다. 이후 일은 마대협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내 역할은 다 끝이 났다는 듯 말했다. 돈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 일도 자네에게 맡기지.”

마정수는 아직도 야상을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돈을 빌리는 과정에 함정을 파고 자신을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연히 마정수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돈을 받아서 나오겠습니다.”

혼자 가서 찾아 오겠다가 아니라, 밖에서 기다리란 말을 했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자 마정수는 더욱 기뻐했다.

“하하하. 좋아.”

마정수와 야천을 속이는 데는 성공했다.

일은 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생을 살아오면서 온갖 산전수전 다 겪었다.

사파와 마교를 상대한 무인으로서의 경험들이 있다. 어마어마한 고수들과 싸워봤다. 온갖 종류의 싸움도 경험해 봤다. 거기에 권력 암투를 이겨낸 맹주로서의 경험이 있다.

이것들이 합쳐지자 마정수와 야천 정도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굴릴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철혈의 맹주, 징벌의 맹주라 불리던 사람이다. 악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살아왔다. 내게 걸린 것이 천벌인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아직 정체모를 여인이 있었으니까.

과연 저 십만 냥을 차지하고, 마정수를 죽인 후에 그 책임을 야상에 떠넘길 수 있느냐는, 그 여인을 속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번 일의 핵심은 뺏고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 후에 어떻게 내가 이 사건에서 감쪽같이 빠져나가느냐다.

* * *

그날 밤 연못가에서 여인을 만났다. 일부러 그녀를 만나러 나간 것이다.

“당신 주인을 말려야 할 것 같소.”

여인이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가 야상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냈소.”

우리가 야상에 간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괜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야 어쩔 수 없이 도왔지만…… 아시다시피 야상은 아주 지독하고 무서운 자들이오.”

마정수가 그들과 위험하게 얽히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흘릴 필요가 있다. 마정수는 야상의 손에 제거된 것으로 처리할 작정이니까.

이렇게 정보를 흘리는 것도 여인과 마정수가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내 주인이 아니에요.”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 아닌,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한 말이었다. 그녀는 정중히 말했다. 물론 정중하다고 그것이 친절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말려요.”

그녀가 돌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마정수가 죽더라도 그녀는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오히려 그녀는 마정수가 파멸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마정수와의 일도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 * *

“함께 가시겠습니까?”

풍산 아래에서 내가 물었다.

“괜찮네. 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그는 야상의 매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만 보내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기적이고 치사한 놈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날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내 의도적인 노력으로 나에 대한 신뢰가 쌓였고, 설령 내가 돈을 가지고 달아난다 하더라도, 나를 소개한 양소방주에게 받아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큰 혁낭이 필요하겠나?”

“소액전표로 받아야 하니까요.”

“그래야 하는 이유는?”

“어둡고 더러운 돈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역시 꼼꼼하군.”

꼼꼼해서이겠나? 내가 이 돈이 필요해서지.

“네, 다녀오겠습니다.”

커다란 혁낭을 짊어지고 산을 올랐다.

사당 안에서 구철이 몇 명의 사내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야천에게 단단히 단속을 받았는지 그리 사나운 기세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이 가져온 오십 냥, 백 냥짜리 소액전표들을 혁낭에 가득 채웠다.

“안 세 봐도 되겠지?”

구철이 싸늘하게 말했다.

“언젠가 우릴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나는 피식 웃어준 후 밖으로 나왔다.

언젠가 너희는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아니, 그것은 잘못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응징이리라. 그들이 바르게 살아온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마정수와 엮지 않았을 테니까.

혁낭을 지고 산을 내려오던 내가 주위를 살폈다.

기감을 끌어올려 주위에 누가 있나 살핀 후에야 오솔길 옆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정여였다. 그가 내가 매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혁낭을 내밀었다. 그 혁낭에도 전표가 가득 들어 있었다. 맨 위에 몇 천 냥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 전표였다.

장소를 내가 정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계획을 짤 때 이 근처에 사람이 숨어 있기 좋은 곳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지금의 십만 냥까지 더하면 내가 이번에 얻은 야상의 돈은 자그마치 이십만 냥. 내 힘을 키울 자본이었다. 이 돈은 영약이 될 수도, 검대원이 될 수도, 혹은 또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 내 힘을 강화시킬 것이다.

더 멋진 일은 이 돈에 내가 개입된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짜 전표가 가득 든 혁낭을 매고 산을 내려왔다.

산 아래에서 마정수가 기쁜 얼굴로 나를 반겼다. 혁낭 속 전표를 보고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도 나를 계속 도와주게.”

“물론입니다.”

나도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가짜 전표가 밝혀지면 야상의 소행이 될 것이다. 내가 바꿔치기 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테니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니까.

과거의 죄를 묻지 않더라도 그는 내게 충분한 죄를 지었다. 아들 앞에서 아버지를 모욕했고, 한 남자의 여자를 뺏으려 했다. 산동의 힘없는 문파들을 억압하고 돈을 뺏었다. 이 모든 것이 천도문을 등에 업고 약자

들에게 저지른 짓이다.

나는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제 대롱을 뽑고, 그 자리에 검을 박아 넣을 때가 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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