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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이(3)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
과연 잠이나 잘까 싶을 정도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어쩌면 잠을 자지 않고 운기조식으로 짧은 밤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추측이 들 정도였다.
일찍 일어나서는 뒷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마도 수련을 하고 오는 듯 했다.
정여를 통해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온 후 아침수련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사실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정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의 신변을 지키려 했다면 ‘호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호위가 아닌 ‘관찰’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관찰하듯이 말이다.
마정수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나로서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어떤 수련을 하나 미행을 해볼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 내 존재를 들키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었기에, 괜히 무리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무공에 관해서는 대충만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기도를 드러낼 수 있다면 그녀의 수위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철저히 내 자신을 감춘 상태였다. 병장기가 없는 것으로 봐서 권법을 사용하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걸음걸이나 기도로 봤을 때, 상당한 실력이었다.
시곤과 비슷하거나 살짝 아래가 아닐까? 그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것은 대단한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무공실력과 그녀의 분위기.
어떤 비밀조직에서 키워낸 비밀병기일지도 모른다는 첫 느낌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어쨌든 그녀가 누구든 그녀를 이용해야 한다.
마정수가 야상의 손에 제거 당했다는 것을 돌아가서 보고해야 하니까. 그런 점에서 그녀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다.
다음 날 밤에는 내가 연못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운 백련(白蓮)이 물빛에 아롱졌고 가을바람에 연꽃 향기가 몰려왔다. 못에는 몇 마리의 잉어가 있었는데, 밤이 깊어서인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왜 이것을 그리 쳐다보고 있었을까? 잉어들을 구해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죽이고 싶었던 것일까?
문득 물에 비친 달을 보았다.
어쩌면 그녀는 잉어가 아니라 이 달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보다가 돌아서는데 저 멀리 건물 앞에서 그녀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그냥 돌아서 들어가 버릴 것 같았는데, 그녀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가 걸어와서 내 옆에 섰다.
나는 없는 사람인 듯 인사 한 마디 없이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소?”
내 말에 그녀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뻔히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 거요.”
그녀가 다시 연못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녀의 첫마디였다.
이번에는 내가 짤막하게 말했다.
“하긴.”
그러자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긴’이란 말을 왜 했는지를 묻는 표정이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평생인데, 사람들하고 안 얽히고 혼자 사는 게 속편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오.”
그녀가 다시 연못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 안 가르쳐 줄 거요?”
잠시 연꽃을 바라보던 그녀가 불쑥 말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
혼잣말처럼 했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제대로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이름보단 사람이 중요하겠지. 하지만 뭐라도 불러야 할 것이 있어야 하잖소? 어이, 거기, 이렇게 부를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내가 다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좋소. 어차피 아는 척도 하지 않는데,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소? 당신을 연못이라 부르던, 잉어라고 부르던, 어차피 당신은 당신인데.”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연못을 바라볼 뿐이었다.
왠지 그녀의 고독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아마 지난 내 삶 역시 깊은 고독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서 일 것이다.
“괜한 소리를 했다면 미안하오.”
내 사과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달싹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갈무인.”
마정수가 건물 앞에서 나를 손짓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여인에게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네.”
큰소리로 대답한 후 그를 향해 달려갔다.
마정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물어봤는데 대답하지 않더군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저 여인은 신경 쓰지 말라고!”
그의 말에 짜증이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우연히 만나서…….”
“이따가 내 방으로 오게.”
“네.”
마정수가 건물로 들어갔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 *
마정수의 방으로 갔을 때, 그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리 와서 한잔 받게.”
앞서의 신경질적인 태도가 한 풀 꺾인 상태였다.
그가 주는 술을 받았다.
“한 잔 쭉 마시게.”
“네.”
망설이지 않고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내가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독과 관련한 일이었다.
전생의 나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랬기에 술이고, 음식이고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벽리단의 몸은 그렇지 않았다.
만독불침이 가능하려면 체질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독이 들어오면 운기로 그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독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독불침이 되어 봤기에 당연히 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일단 강력한 독물(毒物)이 있어야 한다. 그냥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독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아주 강력한 독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강력한 독이라도 인위적으로 제조된 독은 안 된다.
다시 말해 강호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무형지독(無形之毒)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기에 안 된다는 뜻이다. 독사의 내단이나 독초처럼 천연의 독이어야 하고, 중요한 것은 복용 당시 그것이 살
아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만 있어서는 안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해약이 있어야 한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중독되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해독해야 하는 것이다. 까닥 잘못했다간 해약을 먹고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절망적인 사실은 그렇게 살아난다고 만독불침이 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아주 낮은 확률로 만독불침이 되는 것이다.
대담한 용기도 필요하고 천운도 따라야 한다.
나는 한 번 만독불침을 이룬 경험이 있기 때문에 준비물이 갖춰진다면 한 번 시도해 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독물과 해약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기연이라 불러야 할 만큼 쉽지 않다.
“정방주가 자넬 많이 칭찬하던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자, 한 잔 더 마시게.”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셨다.
그가 먼저 아까 그 여인에 대해 말을 꺼냈다.
“자네가 젊다보니 여인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이해하네. 하지만 저런 여자 말고 좋은 여자를 구하게.”
“아주 나쁜 여자인가 봅니다.”
농담처럼 웃으며 물었는데 마정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 이상이네. 뱀처럼 위험한 년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남자는 여자를 잘못 만나면 인생 망치는 법이라네.”
“네, 알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 짜증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를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는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굳이 그 일로 주목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윽고 마정수가 날 부른 용건을 꺼냈다.
“내가 돈이 좀 필요한데…….”
“본방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단 정여가 그에게 만 냥을 주었다. 어차피 다 회수할 작정이기에 아끼지 않고 주라고 했다.
“그 돈으론 부족하다네.”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십만 냥.”
나는 깜짝 놀라는 척 했다. 곧이어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필요하신 겁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늦어도 닷새 이내에 구해야 하네.”
“닷새 내에 십만 냥이라니?”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뭔가?”
“혹시 야상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야상? 당연히 알고 있네. 비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자들 아닌가? 아주 지독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되도록 상종해선 안 될 자들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오히려 조금 더 강조했다.
“더럽고 치사하고 독한 놈들입니다. 한 번 앙심을 품으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는 자들입니다. 강호에서 금지된 암기도 거침없이 사용하는 자들이지요.”
무림맹에서는 무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기관으로 발사하는 암기의 사용을 금지했다. 독이 발린 암기 역시 마찬가지로 금지하고 있었다. 쓰다가 걸리면 뇌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강호에는 맹령을 어기는 이들이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야상도 그런 부류 중 하나이다.
“그런 자들에게 돈을 빌리란 말인가?”
“닷새 내에 십만 냥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이 십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가지고 있나?”
“제가 듣기로 야상들은 지역 상회와의 은밀한 거래로 엄청난 부를 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십만 냥을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좋네. 자네말대로 돈이 있다고 치고. 과연 그들이 순순히 십만 냥이란 거금을 빌려줄까? 나는 담보도 없는데?”
“담보가 왜 없습니까?”
“무슨 말인가?”
“마대협 자신이 가장 훌륭한 담보신데요.”
“내가 담보다?”
“마대협께선 천도문의 후계자이십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담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정수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 요즘 같이 궁지에 몰렸을 때, 이 간지러운 칭찬은 그에게 한 줄기 단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정수는 망설였다. 아무래도 야상이란 존재가 주는 거부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밀어붙이면 안 된다.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효과적이다.
“죄송합니다, 괜한 말씀을 드린 모양입니다. 못들은 것으로 하시지요.”
“아니네. 분명 고려해 볼만한 방법이네.”
궁지에 몰린 그가 단 며칠 내로 돈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그들과 연결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고민하던 마정수가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들에게 연락하게.”
“네.”
나는 남아 있던 술을 시원하게 비웠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에게 박은 대롱은 아직 뽑지 않았다.
* * *
야상에 한 가지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정수가 우릴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왔네.”
야천의 말에 구철이 깜짝 놀랐다.
“설마 우리가 시곤을 죽인 일을 알아차린 것일까요?”
“그럴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마정수가 직접 찾아올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일단 피하십시오!”
“피하면?”
“제가 책임지고 놈을 만나보겠습니다.”
“멍청이! 네가 뭘 어쩌겠다고!”
“죄송합니다.”
야천이 버럭 소리는 질렀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성질 더럽고 급한 놈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충성을 다하는 구철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어떤 일로 오는지 확실하지도 않는데 지레 겁먹고 달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기반을 버릴 수도 없었고, 수하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될 일이었다.
야상의 칼잡이들은 거칠고 잔인하다. 그런 놈들을 수하로 다스리려면 독기와 깡다구를 보여야 한다. 설령 뒈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야천이 눈에 힘을 주며 일전을 각오했다.
“배짱 좋고 실력 있는 애들로 다 끌어 모아라. 최대한 암기를 많이 준비하고. 만약 허튼짓 하려면 다 죽여 버려야지. 달아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 * *
다음날, 우린 마차를 타고 야상의 본거지를 향했다.
마차에 탄 사람은 나와 마정수였다.
신비여인은 우리가 출발하는 모습을 봤지만, 함께 동행하지는 않았다. 아마 따로 뒤따르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아마도 마정수에게 추종향(追從香)같은 것을 발라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놈이 돈을 빌려주려고 할까?”
아무래도 마정수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시곤과 화선노대가 함께 있었다면 기고만장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당연히 위축되겠지.
“강하게 나가셔야 합니다.”
“강하게?”
“음지에 사는 놈들의 특징은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합니다. 야상이 강호에서 악명을 떨치고는 있지만 그 본질은 염왕채나 굴리는 파락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가는 곳은 산동 촌
구석의 야상입니다. 두려워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정수가 내 말에 용기를 얻은 듯 했다.
“그대가 있어 아주 든든하네.”
“별말씀을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게 맡겨주십시오.”
눈에 힘을 주며 강력한 공명심을 내비쳤다.
“그렇게 하지.”
마정수는 다행이라 여길 것이다. 어차피 일이 잘못 풀리면 내게 책임을 떠넘기고 빠져나가면 그만일 테니까.
그렇게 마차가 야상의 본거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