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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없다(2)
산동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정수가 산동상회와 손을 잡는다는 소문에 모두들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관을 짓는 것도 모자라 큰 상회와 손까지 잡는다면, 그가 산동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질 것이다.
소문을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도 크게 걱정했다.
“그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려.”
“그러게 말이에요. 혹시 산동을 통째로 집어 삼키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에요.”
내막을 다 아는 나는 태평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산동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잖습니까?”
두 분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저 합작은 양쪽의 발버둥임을. 막다른 길에서의 발악이라고.
부모님을 뵙고 난 후 나는 곧장 공수찬을 찾아갔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소.”
눈치 빠른 그는 내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혹 산동상회에 관해서입니까?”
“맞소. 산동상회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주시오.”
“근래 마정수와의 소문은 들으셨을 테고. 그 소문 때문에 산동상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하북상회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천도문이란 이름이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공수찬이 산동상회의 내부 사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못했다.
“공총관이 보는 산동상회의 약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오?”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대답은 금방 나왔다.
“고순경입니다.”
의외로 그는 산동상회의 회주를 지목했다.
“그는 산동상회를 중원제일상회로 키우려는 야망이 있습니다. 사업을 공격적으로 펼쳐온 이유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빚도 많이 지고, 적도 많이 생겼습니다.”
단적인 예로 하북상회와 석가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그는 분명 그런 꿈을 꿀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상계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더 빨라지고, 새로워지고, 젊어졌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공수찬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참, 그리고 산동상회에서 손을 잡는 대가로 마정수에게 십만 냥을 주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십만 냥!”
생각보다 큰돈이었다.
“산동상회의 사정이 어려운데 그 돈을 마련할 수 있겠소?”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면?”
“제 생각에는 야상에서 돈을 끌어올 것 같습니다.”
야상! 나도 아는 조직이었다. 그야말로 어두운 돈을 움직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주 위험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웬만하면 상종하지 않는 것이 좋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산동상회에게 돈을 빌려줄 곳은 그들뿐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소. 고맙소.”
“별말씀을요.”
산동상회와 야상에 대해 공수찬에게 알아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위험한 일을 그에게 맡길 필요는 없다.
이제 이런 일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곧바로 정여에게 전서를 날렸다.
산동상회가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는지, 만약 야상에서 돈을 끌어들인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돈을 빌리는지 자세히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반드시 알아내라는 명령을 덧붙였다.
답이 온 것은 사흘 후였다.
* * *
다시 이틀 후, 마정수가 불쑥 나를 찾아왔다.
예고도 없었던 방문이었지만 나는 그가 찾아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여가 한 발 먼저 그의 움직임을 보고한 것이다.
“하하하. 동생, 잘 지냈는가?”
호형호제하기로 한 적도 없었는데, 그는 동생 대하듯 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과연 그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산동상회에서 십만 냥을 받기로 해서일 것이다.
“한데 어인일이십니까?”
“지나가는 길에 들렀네.”
“잘 오셨습니다. 자, 들어가시지요.”
“그러지 말고 우리 나가세.”
“네?”
“전에 약속하지 않았나? 자네 약혼자를 보여주기로. 지금쯤이면 다친 상처도 다 나았을 테고. 이 우형에게 산동제일미를 볼 기회를 주게나.”
화선노대의 일로 정신이 없어야 할 시점인데, 이 와중에도 송화린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욕정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면 직접 송화린을 만날 구실을 찾았겠지. 한데 나를 찾아와서 함께 가자는 것은 내게서 빼앗고 싶은 것이다. 그 과정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파혼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더 쉽다고 생각하겠지. 추잡스러운 놈 같으니.
“자자, 어서 가자고. 자네가 찾아가면 그녀도 좋아할 거야.”
그가 막무가내로 내 옷자락을 당겼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는 것은…….”
내가 주저하자 옆에 있던 시곤이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 기세에 눌리는 척 움찔했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못이기는 척 집을 나섰을 때, 그때 무인 하나가 달려와서 시곤에게 서찰을 전했다.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시곤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마정수에게 다시 귓속말을 했다.
“산동상회에서 급하게 기별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시곤이 나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벽공자는 잠시 들어가서 기다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내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 탁월한 청각에, 그들 딴에는 속삭인다고 했지만 다소 흥분된 대화여서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다 들렸다.
“산동상회에서 약속한 십만 냥을 보내지 못한답니다.”
“뭐라고? 대체 왜?”
“어제 밤에 돈을 운반하다가 누군가에게 강탈당한 모양입니다.”
“그 무슨 병신 같은 말이오?”
마정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시곤에게 화를 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마는 그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산동상회도 지금 비상이 걸린 모양입니다.”
문 안에서 나는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십만 냥은 내 수중에 있다.
산동상회의 총관과 호위 무인들이 야상에게서 돈을 빌려서 돌아가는 중간에 그것을 강탈한 것이다. 물론 인피면구와 복면까지 착용했고, 상회의 무인들은 죽이지 않았다. 크게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그들 딴에는 상회 내에서 가장 믿을만하고 실력 좋은 이들을 동원했지만, 내 상대는 되지 못했다. 더구나 일의 성격상 많은 숫자를 동원할 수도 없었기에 일은 더 쉬웠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한 거래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여는 이 정보를 사는데 이만 냥이나 썼다고 했다. 단일 정보치고는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십만 냥.
그것도 야상에서 내준 돈은 증거가 남지 않는 소액전표였다.
다시 말해 내가 마음대로 써도 되는 돈이란 뜻이다. 물론 당장 이 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마정수의 일을 다 처리하고, 뒤탈이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쓸 작정이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야상의 더러운 돈이었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고, 산동상회를 엿 먹인데다가, 마정수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밖에서 나직한 대화가 계속 들려왔다.
“그 늙은이 짓이 틀림없습니다.”
“설마 화선노대를 말씀하시는 거요?”
“그자가 아니면 감히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우리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미친 늙은이가!”
시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자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년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소. 다시 말해 이번 일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보고된다는 말이오. 아시다시피 산동의 일은 시험이오. 후계자를 선정하는 시험이란 말이오!”
문 뒤의 내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래, 저 욕심 많은 놈이 그 시험에서 가장 먼저 탈락하고 싶지는 않겠지.
그래, 계속 욕심을 부려라. 그래야 내 계획이 성공할 테니까.
“반드시 우리 손으로 해내야 하오.”
“어쨌든 오늘은 일단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산동상회와 만나서 이번 일을 상의하셔야 합니다. 며칠 내로 제남으로 대금을 보내지 못하면 무관설립 계약이 파기될 겁니다.”
“젠장!”
마정수가 내뱉은 아쉬움 가득한 탄식이 내게는 너무 달콤하게 들렸다.
곧이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정수가 말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가 봐야할 것 같네.”
“아, 그러시군요.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오십시오.”
“그러겠네.”
마정수가 시곤과 함께 다급히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내가 웃고 있었다.
산동상회가 야상을 끌어들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하나의 계획이 떠올랐다. 마정수를 깨끗하게 처리해 버릴 수 있는 방법이. 놈들의 돈을 강탈한 것이 그 계획의 시작이었다.
마정수에게 이 말을 해주지 못해 아쉽다.
네게 다음은 없다.
* * *
마정수는 산동상회와 다시 접촉했다.
고순경은 다시 돈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지금 당장 구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오히려 고순경은 도움을 청했다. 반드시 돈을 마련해 줄 테니, 합작은 계속 진행하자고.
그러고 싶으면 돈부터 가져오라고 냉정하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병신 같은 놈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내리막길은 끝날 줄을 몰랐다.
시곤이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와서 우려했던 소식을 전한 것이다.
“무관공사를 맡은 쪽에서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감히 대금 지급일을 연기해 달라는 내 부탁을 거절했단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이 새끼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마정수가 살기에 찬 눈을 희번덕거렸다.
“누가 소문을 낸 모양입니다.”
“뭐라고?”
시곤이 대답을 망설였다.
“어서 대답하시오!”
“공자께서 파산했다는 소문입니다.”
“뭐요?”
무엇이라도 하나 박살날 줄 알았다.
한데 마정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군! 누구 짓인지 알겠어.”
소문을 낸다는 것은 그냥 객잔 몇 군데 돌면서 이야기를 퍼뜨리면 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의 소문을 내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나지 않아야
할 소문이 날 때는 더욱이.
“화선노대가 이렇게 조직적이고 과감할 수는 없소. 아마 내 빌어먹을 형제들 중 누군가의 짓이 틀림없소.”
이제 화선노대의 이해할 수 없는 배신도 이해가 된다. 다른 후계자들 중 하나에게 포섭당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 애초에 포섭당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접근해 온 것일 수도 있다.
시곤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외부의 인사인 화선노대를 끌어들인 이유는 솔직히 내부의 사람을 믿지 못해서였다. 한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꽝!
결국 애꿎은 책상이 또 박살났다.
마정수는 살아오면서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증오를 품고 살았다. 자신이 꽤 똑똑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병신처럼 이용만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마정수를 지배하는 것은 살의(殺意)였다.
화선노대를 찾아 죽이고 싶다는 생각, 그를 포섭한 자를 찾아내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
하지만 그것은 나중일이 되어야 한다. 우선은 이 일부터 수습해야 한다.
“그래,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내면 되는 일이지.”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시키면 아버지의 눈에 더욱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가서 돈을 구해오시오.”
“제가 어떻게?”
“썅! 어떻게든 구해오라고! 병신처럼 거기 서서 한심한 소식만 전하지 말고 밥값을 하란 말이오! 훔치든지 협박을 해서 뺏든지, 당장!”
비록 시곤이 호위를 맡고 있지만, 나이나 천도문 내에서의 배분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런 폭언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시곤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 * *
시곤은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시간이 늦어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객잔에는 혼자만 남아 있었다.
앞서 마정수의 행동에 크게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이해되기도 했다.
궁지에 몰릴 대로 몰렸으니까.
오후 내내 여기저기를 다니며 돈을 구했다. 산동상회가 아닌 다른 상회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나쁜 소문이 날만큼 나버렸는지 모두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아예 자리에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빌어먹을 장사꾼 놈들!”
돈이 개입되니까 목숨도 아깝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자신에게는 이런 일을 처리할 요령이 없었다. 평생 검이나 휘두르고 살아온 인생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상인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평소 잘 술을 마시지 않는 그였는데, 오늘은 과음하고 있었다.
“여기 술 더 가져와!”
“네.”
점소이가 하품을 하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상해 있으니 그 모습도 꼴 보기 싫었다. 확 가서 패버리고 싶었다.
자고로 줄을 잘 서야 하는데…… 자신은 실패했다.
상대적으로 인재가 가장 적은 마정수를 선택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오히려 마정수가 성공하면 그 모든 공을 자신이 얻게 될 것이라고. 경쟁자가 적었으니까 단숨에 이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 그 때문에 마정수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해서는 안 될 온갖 더러운 짓들
을 다 했었는데.
“제기랄.”
그가 남아 있던 마지막 술을 비웠다.
능력이 모자란 것은 참을 수 있었다. 애초에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사람을 모욕할 때면 좀처럼 참기 힘들었다.
마정수의 독기가 다른 경쟁자를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었건만, 위기에 몰리자 그 독기는 천박함이 되었다.
그렇다고 마정수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서 누가 자신을 받아주겠는가?
“이 자식아! 빨리 술 안 가져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퍼억!
얼굴에 주먹을 맞는 순간 알았다. 그때 금고 앞에서 맞았던 바로 그 주먹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