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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50화 (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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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없다(1)

늦은 밤, 정여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좋소.”

나에 대한 예의가 깍듯한 그가 이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리라.

나를 따르느냐, 양소방의 방주로 남느냐.

생각보다 빨리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어떤 쪽일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술을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그가 말을 하는 쪽이고 내가 듣는 쪽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강호에 뛰어들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꼬맹이 시절 어떤 강호인이 녹림을 죽이고 가족을 구해주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강호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후 그가 겪은 여러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술병이 다 비었을 때쯤, 그는 지난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마쳤다.

“보시다시피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니, 오히려 평범에서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하다 보니 양소방의 부방주까지 되었지만 토사구팽 당하는 신세에 몰렸었고, 그때 벽공자를 만나 이렇게 방주까지 되었지요.”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이런 저라도 좋습니까?”

나는 다른 긴말은 하지 않았다.

“좋소.”

“끝으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벽공자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심검지경이었다.

심검지경에 이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순수한 염원이었다. 전생 내내 가슴에 걸려 있었던 체증이었고 목에 가시였다.

물론 그 이외에도 이루고 싶은 것은 많다.

우선 내가 암살당한 것이 확실하다면 복수를 할 것이다. 몰랐으면 모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다 잡아 죽일 것이다. 내가 죽고 갈사량에게서 돌아선 자들이 그 일과 연관이 있다면 그들 역시 응징할 것이다.

벽씨검문을 일으켜 천하제일가문으로 만들 것이다. 물론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싶다. 광두와 검대를 멋진 강호인으로 키워내고 싶고, 당연히 갈사량과 백표도 다시 데려오고 싶다.

그러고 보니 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구나.

정여는 궁극적인 목표를 묻고 있으니 하나의 대답을 해야 한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그때 불쑥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난 행복해지고 싶소.”

앞서의 목표를 모두 이루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도 행복해지고 내 주변 사람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소.”

멍하게 나를 쳐다보던 정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내 그가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소. 한데 무슨 대답을 기대했소?”

“천하일통이란 말이 나올까봐 내심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시대를 준비하는 잠룡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천하일통을 이미 이뤄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방금 말한 것들도 천하일통만큼이나 어려운 것들이라 생각한다.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하오.”

머쓱한 내 대답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여가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주군을 뵙습니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내 대답이 천하일통이란 대답보다 그의 가슴에 더 와 닿았음을.

내가 그의 두 손을 굳게 잡으며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 그대를 가족이라 생각하겠소. 부디 이 부족한 사람을 도와주길 바라오.”

“이 한 목숨 다 바치겠습니다.”

“나 역시 오늘 그대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소.”

“부디 저도 주군과 함께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기뻤다. 애초에 그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은원을 내세우고, 힘으로 찍어 눌러서 그를 얻었다면 이렇게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

이다.

그는 진심으로 나란 인간에게 감복했고,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광두와 소검대, 공수찬에 이어 정여라는 충직한 수하를 얻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 갈 것이다.

이들의 충성심은 내일 변할 수 있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충성심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 사라질 수도 있고, 천 마디 욕설에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이 가변성을 인정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어갈 것이다.

어떤 인간관계도 완성은 없다는 대전제를 두고서 말이다.

* * *

나는 집에 돌아왔다.

마정수를 정신없이 밀어붙였으니 이제 잠시 쉬면서 집안을 단속해야 할 때라고 판단해서였다.

당분간 양소방은 독자적으로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정여는 지금 당장이라도 양소방을 바치고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여러 조직들을 독자적으로 키운 후,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로 합칠 것이다.

나는 이 강호에서 가장 큰 조직을 운영해 본 사람이다. 양소방과 같은 조직 수백 개가 내 밑에 있었다.

대신 정여에게 두 가지 일을 맡겼다.

우선 마정수에게 실력 좋은 세작을 붙였다. 특히 송화린과 관련된 어떤 움직임이 보이면 당장 연락하라고 했다.

둘째로 정여와의 긴밀한 연락체계를 위해 전서응을 도입했다. 물론 우리 집안에 직접 전서응을 두진 않았다.

집 근처에 작은 연락소를 따로 둔 것이다. 정여 역시 양소방 내부가 아닌 외부에 따로 연락소를 두었다. 양소방 내에 마정수 일당들이 있었기에 조심하는 차원이었다.

또한 연락소의 무인들은 믿을만한 사람들로 뽑게 했다. 무림조직에 있어 정보와 관련된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거기에 안전장치를 하나 더 갖췄다.

정여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어를 정한 것이다. 무림맹에는 여러 암어체계가 있다. 단순한 암어부터 외부에서는 해독이 불가한 고난이도의 암어까지.

물론 나는 최고 등급의 암어를 사용했다. 정의각에서 사용하는 암어를 변형한 것이다. 남들이 봐선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암어였다.

내가 그런 고급 암어체계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정여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렇게 수하에게는 믿음을 줘야 한다.

나중에는 이게 정인지, 충성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부대끼며 살아간다 치더라도, 지금은 끊임없이 능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

광두에게 화선노대의 죽음을 전했다.

“아! 정말 잘하셨습니다.”

광두는 자신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렇게 기쁘냐?”

“그럼요. 아이도, 어르신도 저 세상에서나마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정말 마음 같아선 고향을 떠났다는 그 땅주인에게도 연락을 해주고 싶네요. 당신네 원수를 갚았다고.”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그럴까요?”

“당연히. 그 일을 어찌 잊겠느냐? 잊지 않는 한 그 일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강호에 정의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알려주고 싶지만, 그건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 것은 나중 일이 될 것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광두야.”

“네, 도련님.”

“강해져라.”

많은 것이 내포된 한 마디였고, 광두 역시 제대로 그 뜻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검대원들의 훈련을 봐주었다.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나?”

“네!”

대답에 바짝 기합이 들어 있었고 눈빛은 반짝였다.

개인수련에, 검대수련에, 비도술 수련까지 더해져 많이 힘들 텐데, 훈련하는 내내 누구 하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더 가기 마련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노력한다면 나 역시 최선을 다하마.

그 동안 열심히 수련을 한 덕분에 다들 많은 성과를 얻은 상태였다.

특히 관휘를 비롯한 몇몇의 성과는 굉장한 것이어서 모두의 앞에서 칭찬해 주었다.

수련이 끝나고 관휘가 남았다.

“대주님. 제 무공에 관해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녀석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가득했다. 방금까지도 그렇게 힘든 수련에 땀을 흘렸으면서, 마치자마자 또 다시 무공에 관해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초식을 구사할 때, 자꾸 중심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초식을 보여주었다.

시범을 본 후에 내가 말했다.

“다리에 들어가는 힘이 잘못되어서 그렇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면서 펼치는 초식인데 너는 오히려 왼쪽 발에 힘을 더 주고 있지?”

“네, 맞습니다. 이 초식은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당연히 오른발에 힘이 더 들어갈 테니, 의식적으로 왼발에 힘을 더 주고 있습니다.”

“그게 오히려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 자연스럽게 오른발에 힘을 더 주되, 균형을 잡는 것은 상체의 움직임으로 보완하면 된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선 안 되는 이유는?”

“언제나 중심을 잡는 것은 하체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녀석이 배운 무공은 관훈검술(館訓劍術)로 주로 무관에서 가르치는 검술이었다. 가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검술이 아니라 중원 각지의 무관에서 배울 수 있는 공개된 검술인 것이다.

검술 자체는 훌륭했다. 그래서 많은 무관에서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고.

반면 관훈검술은 어떤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관원들을 가르치는 검술이다보니 격식에 얽매이는 면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관휘는 제대로 검술을 배웠다.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나중에 한계도 확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아직은 그런 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아직은 이 격식 내에서도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었으니까.

“무공에 있어서 ‘언제나’란 개념은 없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변해야만 하는 것이 무공이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사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이다. 말한 그대로의 뜻 이면에 또 다른 깊은 무학의 정수가 담겨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굳은살로 거칠어진 녀석의 손에서 고된 수련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내 말을 철석처럼 믿고 세월에 노력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했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해주었다.

“휘야.”

“네, 대주님.”

“조금은 천천히 가도 된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무리하면 역효과가 날 테니까. 조금 전의 네 초식처럼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관휘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후 돌아서 달려갔다. 내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할 것이다.

어쩌면 조금 전의 그 말은 내 자신에게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스물 셋 관휘는 모를지라도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에는 천천히 갈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 * *

“이번 합작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습니다.”

산동상회의 내총관 백중(栢仲)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시지요.”

회주인 고순경은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안락한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백중은 오랫동안 고순경을 봐왔기에 지금 그가 자신의 직언을 마뜩치 않게 여기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이라면 그냥 물러났겠지만 이번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볼 때 마정수는 위험한 자입니다. 회주님, 바라옵건대 늑대를 쫓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백중의 간곡한 말에 고순경이 눈을 떴다.

“지금 당장 늑대에게 물려죽을 판인데, 호랑이가 방에 들어오는 게 무슨 대수이겠나?”

백중이 흠칫 놀랐다.

“그만큼 심각한 상황입니까?”

“그렇다네. 지난 번 일로 하북상회와 석가장이 단단히 앙갚음을 하는 중이네.”

산동상회는 양소방을 끌어들여서 하북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고 하북상회와 석가장은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지난번에 송가장을 끌어들이지 못한 사실을 알고는 더욱 우릴 몰아붙이고 있네.”

하북상회는 산동상회를 궁지에 몰아붙이고 있었다.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밀어붙이니 산동상회의 금전적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상계만큼 소문이 빠른 곳이 없다. 산동상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돌자, 돈줄은 더욱 막히고 기존의 거래처들마저 돌아서고 있었다.

백중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부 살림을 담당하는 총관이었기에 외부 사정이 그렇게까지 나빠졌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에 십만 냥이란 거액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대체 어쩌시려고 그들과 합작을 약속하신 겁니까?”

“야상(夜商)에게 돈을 빌릴 작정이네.”

순간 백중이 깜짝 놀랐다.

야상은 밤의 상인들이란 뜻으로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거래를 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주로 큰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거나, 의뢰를 받고 상회 간의 합병 등을 주도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더 없이 위험한 거래였다. 비싼 이자도 이자지만,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받아내는 자들이었다.

“야상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알고 있네.”

“아니, 모르십니다. 알고 계시면 그들과 얽힐 생각은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백중은 간곡하게 말을 이었다.

“야상의 칼잡이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무공이 뛰어나서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놈들은 잔인하고 지독합니다. 한 번 앙심을 품으면 평생 잊지 않는 자들입니다. 놈들과 얽힌 후에 실종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소

문으로는 야상의 칼잡이들은 무림인을 상대하기 위해 강호에서 사용이 금지된 암기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도 고순경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십만 냥을 빌리게.”

“회주님!”

고순경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어차피 방안에 늑대와 호랑이가 어슬렁거리잖나? 독사가 기어들어온다고 더 나빠질 것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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