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46화 (46/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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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1)

돈을 주고 철방의 작업장을 한나절 빌렸다.

강호인이 철방을 빌리는 일은 가끔씩 있는 일이었다. 칼 찬 자들 답지 않게 정중한 태도로 달라는 돈을 한 푼도 깎지 않으니, 주인장은 가장 좋은 작업장을 내주었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는 화덕을 중심으로 풀무며 모루, 메, 정, 집게 등이 다 갖춰져 있었다. 주인장에게 부탁해서 이곳에서 사용되는 검을 만드는 재료들을 모두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나는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무림맹의 검장인이 검을 어떻게 만드는지, 또한 어떻게 고치는지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직접 검을 두드려 본 적은 없었기에 아무리 잘 흉내 낸다 하더라도 장인들만큼 정교한 실력을 발휘할 순 없을 것이다.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천조검을 뽑았다.

더 없이 예리한 검날. 궁극적으로 내가 필요한 것은 이 검날이다.

사실 이 천조검의 지나치게 화려한 검집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검집 없이 다닐 수는 없었고, 딱 맞는 다른 검집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검집부터 작업했다.

일단 검집에 박힌 보석들부터 제거했다. 아주 작은 보석이었기에 검집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의미 없는 돌덩어리가 되는 것들이었다.

보석을 제거한 후 천조검을 사용해서 검집의 표면을 긁듯이 깎아냈다. 검날이 워낙 예리했기에 검집의 표면은 더 없이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보석이 박혀 있던 흔적부터 검집에 새겨져 있던 문양들까지 아주 깔끔하게 지워졌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검집처럼 보였다.

난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집에 새로운 색을 칠했다. 강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검은색이었다. 그렇게 색까지 다시 칠하자 완전히 다른 검집처럼 보였다.

검집을 훼손한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전혀.

오히려 묘한 쾌감까지 들었다. 앞서도 말했듯 나는 이런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천조검을 오래 쓰지 않은 것도 너무 화려해서였고.

내가 주로 사용하던 수라명왕검도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검이었다.

“됐군.”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었지만 제법 그럴 듯 하게 해낸 것이다. 아무래도 검을 다루는 기막힌 손재주가 발휘된 것이겠지.

자, 이제는 가장 중요한 검을 바꿀 차례였다.

문제는 검의 손잡이였다. 검집처럼 화려한 것도 문제였지만 손잡이의 모양이 독특했다.

아는 사람이 보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건 보석을 제거하고 색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 끝에 나는 아예 손잡이를 바꿔버릴 작정을 했다.

이 작업을 하는 순간, 천조검은 더 이상 천조검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 검을 만든 장인은 손잡이의 길이와 무게까지 완벽하게 고려해서 만든 것이었으니까.

나는 그 이점을 포기하고 이 날카로운 날만을 얻는 것이다.

한 손으로는 검날을, 다른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내력을 주입해서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빠지지 않게 박혀 있었지만, 내공을 동원한 힘을 버티지는 못했다.

수우우우욱.

검이 손잡이에서 빠져나왔다.

“미안하구나.”

이곳 철방에서 제작되는 여러 검 손잡이 중에서 적당한 크기의 손잡이를 끼워 넣었다. 고정시키기 위해 이곳의 재료와 도구들을 사용했다. 모자란 기술은 내공으로 대신했다.

예전에 검장인을 통해 배워두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가 직접 만든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 특별한 검을 튀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쉭, 쉭, 쉭.

몇 번 검을 휘둘러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이런 검이다 생각하고, 이 검에 적응하면 될 것이다.

마지막 작업으로 철방에서 쓰는 약품을 발라 검날의 광채를 줄였다. 보통은 더욱 예리하게 보이려고 하는데, 나는 역작업을 한 것이다. 당연히 실제로 검날이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시각적인 변화일 뿐.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 검을 보고 절대 천조검을 떠올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심지어 나조차도 이 검이 천조검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다시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쉬이잉.

가지고 있던 검과 비교했을 때 바람을 가르는 느낌 자체가 다르다.

새로 탄생한 천조검을 보며 나는 크게 만족했다.

“네 형님을 되찾을 때까지 잘 부탁한다.”

물론 그 형님은 수라명왕검을 뜻했다.

작업한 뒷정리까지 완벽하게 했다. 원래의 손잡이와 검집을 깎아낸 흔적들은 화덕에 넣어 완전히 태웠다.

다만 천조검에 장식으로 박혀있던 작은 보석 몇 개는 따로 챙겼다. 검집에서 분리된 보석을 보자 한 가지 시도해볼만한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주인장에게 인사까지 하고 철방을 나섰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인피면구를 벗어서 그것을 불태웠다.

이제 흑시에서 영약을 사고 객잔에 들르고 철방을 빌린 사내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 * *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 올리랍니다.”

정의각 군사 양평은 보고서를 돌려주면서도 아주 조심스러웠다.

“알겠네, 다시 작성하지.”

바로 보고서를 받아든 사람이 갈사량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총군사로 모셨던 사람이 이제 동료가 되었다. 그것도 가장 많은 일을 떠맡고, 번번이 보고서를 다시 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총군사 사마천의 속 좁은 복수임을 양평 뿐만 아니라 모든 정의각 군사들이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위로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사마천의 눈치도 보였고, 갈사량의 눈치도 보였으니까.

“다 되면 직접 가져오랍니다.”

“알겠네. 그리 하도록 하지.”

“네, 그럼 전 이만.”

갈사량의 집무실을 나선 양평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더니.’

권력의 비정함과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뭐라도 한마디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갈사량의 업무를 도와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나섰다간 정의각에서 쫓겨나 촌구석 지부의 수문장 신세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

갈사량이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서 사마천을 찾아갔다.

방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인물, 그는 바로 광월단주 주철룡이었다. 그가 앞장서서 주도하는 바람에 마봉기가 맹주가 될 수 있었다. 현재 갈사량이 가장 껄끄러운 사람이 바로 주철룡이었다.

“손님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자 사마천이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앉게나. 단주께서도 곧 일어나실 것이네.”

“네.”

갈사량이 주철룡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마천이 악취미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를 잘 알았기에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이다.

“오랜만에 볼 텐데, 인사들 나누지 그러나?”

갈사량이 주철용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철룡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이제 일개 군사와는 인사를 나누지 않겠다는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갈사량은 섭섭하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담담했다.

사마천은 이 어색한 자리를 충분히 즐겼다.

그는 의도적으로 갈사량을 괴롭히고 있었다. 다른 군사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맡겼고, 올라오는 보고서를 번번이 되돌려 보냈다.

갈사량을 굴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의 정신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사마천은 믿고 있었다. 괴롭히고 또 괴롭히면 인간은 결국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의지력만큼 시간 차이가 날 뿐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불굴의 의지?’

사마천이 코웃음을 쳤다. 그것을 가졌던 사람을 한 사람 알고 있다.

천하진.

그래, 그는 무공에 있어서나 강호를 통치하는 일에 있어서나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와 함께 불굴의 의지도 죽었다.

주철룡이 이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바쁘신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하오.”

자리를 뜨면서도 주철룡은 갈사량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갈사량이 사마천에게 보고서를 건넸다.

“여기 보고서 다시 작성해 왔습니다.”

“저기 올려놓게.”

갈사량이 책상 위에 보고서를 올렸다. 한 옆에 자신이 올린 보고서들이 쌓여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것들을 열어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갈사량이 담담히 그 위에 가져온 보고서를 올렸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가 나가려는데 사마천이 물었다.

“참, 한 가지 물어보세.”

“네. 말씀하십시오.”

“확인해 보니 전대 맹주의 검이 한 자루 없던데?”

“어떤 검을 말씀하시는지요?”

“수라명왕검 말이네.”

“무림맹 보고에 있지 않던가요?”

“없었네.”

“그렇다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말년의 맹주님은 검을 차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무림맹 보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곳에 없다면 맹주님께서 처분하셨을 겁니다.”

“그랬군. 알겠네, 그만 물러가게.”

“네.”

갈사량이 그의 등을 보며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냉소적인 눈빛으로 갈사량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빈 허공에 물었다.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감시하고 있지?”

그러자 천장에서 나직한 대답이 들렸다.

“네.”

“혹시 모르니 놈이 검을 숨겼을만한 곳을 찾아내라.”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마천이 뒤로 기대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대가 모르면 대체 그 검이 어디로 갔을까?”

* * *

“여기 술 주시오.”

풍주점의 한쪽 자리에서 중년의 표두와 젊은 표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백표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그들은 인근 표국의 표두와 표사로 두어 번 술을 마시러 왔었다.

“이번에 감숙까지 다녀왔소.”

“그러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안주는 항상 드시는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술을 먼저 가져다 준 후 백표가 요리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번에 느낀 점인데 감숙의 상계에 이상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어떤 기류입니까?”

“한 가지 소문을 들었는데…….”

손님이 없었지만 표두 사내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이야기란 뜻이었다.

“천도문의 마송인(麻松寅)이 섬서에서 상단을 인수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송인이라면 천도문의 후계자들 중 한 명이 아닙니까?”

“맞다. 바로 그 마송인이다. 유력한 여섯 후계자 중에 하나지.”

“대체 무슨 일일까요?”

표두 사내는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보였지만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백표는 못 들은 척 했지만 천도문에 관한 소문은 종종 듣고 있었다.

섬서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서 천도문의 핏줄이 진출해서 여러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대 맹주를 모실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천하진은 무림맹의 인사가 지역 강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천하진은 비록 가족이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 하더라도 더 강하게 단속했을 것이다.

표두 사내가 백표를 보며 말했다.

“한데 저것이 옛날부터 있었소?”

사내가 올려다보는 것은 벽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쪽에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이 붙어 있었다. 둥근 방패에 검과 도가 기울어진 열십자 모양으로 붙어 있는 장식이었다. 마치 사냥꾼의 집에 있는 짐승의 박제처럼

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이곳을 인수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벽이 허전해 보여서요.”

“직접 깎으신 거란 말이오?”

“네, 심심풀이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손재주가 좋으시오.”

“별말씀을요.”

백표가 사내를 따라 벽에 붙은 나무장식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예전 일이 떠올랐다.

개업선물을 주고 갔던 갈사량이 며칠 후에 은밀히 다시 찾아왔었다. 그때는 마봉기나 사마천이 취임하기도 전이었다.

갈사량이 한 자루의 검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전대 맹주의 독문병기인 수라명왕검이었다.

“이 검을 자네가 맡아주게.”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물건입니다.”

“내가 믿고 이 검을 맡길 사람은 오직 자네뿐이네. 나중에 새 맹주가 오면 나는 감시를 당하게 될 거야. 앞으론 자넬 찾아오지도 못하겠지.”

“갈군사님.”

“부디 자네가 맡아주게.”

“이 검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다른 것은 다 내줘도 이것만큼은 놈들에게 넘겨주기 싫네.”

백표는 이것을 맡기는 갈사량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도 자신처럼 수라명왕검을 보면 천하진이 떠올랐을 테니까.

백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맡아두겠습니다.”

“고맙네.”

술을 더 달라는 표두사내의 말에 백표가 회상에서 벗어났다.

“오늘 달리시는군요.”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야 하지 않겠소?”

“하하, 저야 좋지요. 표두님의 흥취를 돋우는 뜻에서 제가 이 요리는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좋소! 내가 이래서 풍주점을 좋아한다니까. 하하하.”

그것을 물어봤던 손님들이 다 그러했듯이 표두 사내 역시 벽에 붙은 장식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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