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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회는 시작되었다(3)
마정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텅 빈 금고를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흔한 화병 하나 던져서 깨지 않았다. 사람이 정말 화가 나면 뭔가를 부숴 버릴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마정수는 처음으로 느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방에는 그를 비롯해서 총 네 사람이 있었다.
나머지 셋은 시곤과 화선노대, 그리고 그 신비여인이었다.
시곤의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팔이 잘리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그래서 자존심 강한 그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봤을 것 같은 그런 상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마정수였다.
“병신처럼 한 입 먹어보지도 못하고.”
신령구엽초를 아까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복용하지 않은 이유는 후기지수들을 포섭하는데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연회에서는 천조검을 보여주고, 다음 연회에서는 신령구엽초를 보여주려고 했다.
기물과 영약으로 후기지수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검도, 영약도 그들에게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미끼로 이용한 후에 자신이 복용하려고 했었는데…….
꽝! 꽝! 꽝!
마정수가 연속해서 책상을 내리쳤다. 결국 지금까지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요즘 같은 영약이 귀한 시기에, 신령구엽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분해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애꿎은 책상만 박살나며 수난을 당했다.
방안의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저 분노가 사람에게 튀면 누군가 죽어나갈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마정수가 씩씩대며 물었다.
“누구 짓인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소?”
화선노대가 마정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방주가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 알아보고 있네.”
“그놈 짓이 아니오?”
화선노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적어도 그자 짓은 아니네. 사건이 있던 시간에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정여는 영리하게도 가장 확실히 소재를 증명해줄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수하를 시켰겠지.”
“내가 아는 한 양소방에는 시무인을 한방에 때려눕힐 고수가 없네. 사실 정방주조차도 그런 실력이 안 될 것이네.”
때려눕혔다는 표현이 나왔을 때, 시곤의 한쪽 눈가가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마정수가 화선노대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럼 당신이 한 패겠군.”
“아무리 화가 나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화? 내가 지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오?”
마정수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이게 고작 화난 것으로 보이요? 난 지금 미치기 일보직전이오. 훔쳐간 새끼를 잡으면 죽을 때까지 고문할 거요. 절대 죽이지 않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게 할 거란 말이오.”
그가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내자 화선노대가 움찔했다. 저 말이 진심임을 알았기에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정수의 독심만큼은 알아주는 것이었으니까.
마정수의 화포가 이번에는 시곤을 향했다.
“벙어리라도 되셨소?”
시곤은 이 방에 들어온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건조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통탄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화선노대가 슬쩍 공세에 가담했다.
“우리가 만난 자들 중에 그대를 이렇게 만들 정도의 고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았나?”
그 말에 시곤이 다시 꿈틀했다. 마치 자신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무슨 뜻이오?”
“자넬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네.”
“그런데 왜 그딴 말을 하시는 거요?”
“그딴?”
이번에는 화선노대가 꿈틀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싸움이 흘렀다.
마정수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여인이었다.
차라리 저렇게 서로 의심하며 싸우기라도 하면 덜 미울 것이다. 이런 병신들, 욕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인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 오직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듯.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감시관처럼. 정말이지 아버지만 아
니었다면, 싸대기부터 날렸을 것이다.
마정수가 버럭 소리쳤다.
“닥치시오!”
그의 일갈에 시곤과 화선노대의 팽팽한 기싸움이 끝났다.
마정수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 방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어디 그대들뿐이오?”
화선노대와 마정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인을 향했다.
자신이 흉수로 몰렸음에도 여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당황해야 할 때 침착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해도 너무 침착했기에 그런 단계조차 넘었다. 그녀는 아예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시곤이 불쑥 말했다.
“그녀는 아니오.”
그의 확신에 화선노대가 물었다.
“어떻게 장담하나?”
“상대는 여인이 아니었소.”
“얼굴도 보지 못했다면서? 혹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이라면 그래선 안 되네.”
시곤이 다시 꿈틀했다. 화선노대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와 맞지 않았다. 자신은 무인이었다. 하지만 화선노대는 무인이 아니라 권력에 빌붙은 협잡꾼이었다.
화선노대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네 자존심을 긁으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는 말이네.”
“분명 여인이 아니었소.”
다시 한 번 강조하자 화선노대가 물러났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시곤이 마정수를 보며 말했다.
“제가 당해서가 아니라…… 상대는 정말 강한 자요.”
맞아본 사람만이 아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주먹에 담긴 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상대를 높이 사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기절시키려고 했다. 그 상황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힘조절까지 정확하게 해야 했으니까. 만약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그때 죽었을 것이다.
마정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강한 자가 왜 도적질이나 하고 있지? 나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대답을 한 것은 화선노대였다.
“천조검을 노린 것 아니겠나?”
“훔쳐가 봐야 팔지도 못할 물건이지 않소? 흑시라 할지라도 감히 무림맹주의 검을 거래할 정도로 담이 크다고는 생각지 않소.”
“하긴, 그도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화선노대가 번쩍 뭔가를 떠올렸다.
“혹시?”
그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후계자들 쪽에서 수를 쓴 것은 아닐까?”
순간 마정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감히 양소방에서 자신을 노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이용해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인데, 고작 금고의 돈을 노렸을 리가 없지 않는가? 검을 가져가 봐야 사용하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 텐데.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번에 아버지는 많은 자식들을 각 지역으로 보냈다. 일종의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곤을 한 방에 눕힐 정도의 고수를 동원할 수 있는 자라면?
형제들 중에는 그럴 수 있을만한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특히 후계싸움에 중심에 선 이들은 하나 같이 대단한 고수들을 데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마정수가 이를 갈았다.
화선노대가 차분히 말했다.
“우선은 화를 가라앉히고 이번 일을 수습해야 하네. 누구 짓인지 몰라도 자네가 이성을 잃으면 놈의 의도에 놀아나는 꼴이 될 테니까 말일세.”
마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자 화선노대가 차분히 덧붙였다.
“비록 검과 돈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우린 아직도 건재하네.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되는 것이고, 검은 언젠가 찾게 될 것이네.”
“노대 말씀이 맞소.”
“우선은 돈부터 구해야 하네. 당장 공사에 차질이 생길 테니까.”
“우리가 필요한 돈이 얼마요?”
“공사를 시작하려면 당장 만 냥이 있어야 하고, 차후에는 십만 냥은 있어야 하네.”
“젠장!”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 당장 만 냥이란 돈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마정수가 야수처럼 성난 이를 드러냈다.
“돈을 구할 방도를 마련해 오시오.”
* * *
새로 면구를 하나 샀다.
한 번 쓰고 버릴 것이었기에 이번에는 중급면구로 샀다. 목소리와 걸음걸이까지 새로운 사람인 듯 바꾸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흑시를 다시 찾아갔다.
예전에 영약을 팔았던 그 노인이 다시 나를 맞았다.
고액전표 오만 냥은 영약을 사서 모조리 써버릴 작정이다.
이 고액전표를 어떻게든 교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바로 처분해 버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리라. 아끼다간 똥 되는 정도가 아니라 똥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영약을 사러 오셨다고?”
“그렇소.”
내가 신경을 썼기에 말투나 행동으로는 이전에 왔던 사람이란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긴 안다고 해도 지난 번 역시 얼굴과 목소리를 숨겼기에 별반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영약이 있소?”
“있긴 하네만, 상질의 영약은 없네.”
“그럼 무엇이 있소?”
“지금 우리가 보유한 영약은 활력백시호(活力白柴胡) 여섯 뿌리가 있네. 강호인이 복용하면 이 년에서 삼 년의 내력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
“얼마요?”
“한 뿌리에 구천 냥이네.”
여섯 뿌리면 오만사천 냥.
“상당히 비싸군요.”
“영약이 귀한 때니까.”
사만사천 냥을 주고 산 천년파양초로 십오 년 내공을 얻었다.
활력백시호는 여섯 뿌리면, 천무호심결로 모든 내력을 다 흡수한다고 가정했을 때 십팔 년 내공.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으니 더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같은 영약을 연속해서 복용하면 그 효능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효능을 발휘하려면, 복용자의 심법이나 자질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몇 달에서 일 년 이상이 지난 후에 복용해야 한다. 아쉽게도 난 그럴 여유나 시간이 없었다.
결국 한꺼번에 복용하면 십팔 년이 아니라 십 년 정도의 내공 정도만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비싼 값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전표로 검이나 보호구 등의 물건을 사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증거가 명백히 남았으니까. 그냥 먹어서 없애버리는 것이 최선이다.
“여섯 뿌리를 다 살 테니 오만 냥에 주시오.”
원래는 오만사천 냥. 철저한 정가제로 파는 곳이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요구였다.
노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영약은 주인을 만났을 때 팔아야지.”
노인은 변함없는 영약론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오만 냥을 주고 활력백시호 여섯 뿌리를 샀다.
이 오만 냥은 추적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시 자체가 워낙 크고 탄탄한 조직이라, 천도문이라 해도 흑시의 고객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무림맹이 작정을 하고 나서면 알아낼 수는 있겠지.
그리고 알아내봤자 지금 인피면구의 인상착의 정도일 것이다. 경험이 많은 노인은 내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있겠지만, 흑시에 압력을 가한 자들에게 그런 말까지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흑시를 나온 나는 가까운 객잔의 객방을 하나 빌려서 들어갔다.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다녔다. 어차피 이 얼굴은 영원히 사라질 얼굴이었으니까.
객방에서 곧장 활력백시호 한 뿌리를 복용했다.
첫 번째 활력백시호에서 삼 년의 내력을 얻었다.
두 번째에서도 삼 년의 내력을 얻었다. 천무호심결의 뛰어남이 운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활력백시호에서 이 년의 내공을 얻었다.
나는 복용을 멈췄다. 이후부터는 이 년, 혹은 일 년의 내력만 얻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복용하면 손해다.
어쨌든 세 뿌리의 활력백시호로 나는 다시 팔 년의 내공을 추가했다.
이제 단전의 내공은 오십이 년이 되었다. 일 갑자 까지는 팔 년의 내공만이 남은 것이다.
이제 수련을 해서 일 갑자를 만드는데 채 일 년도 남지 않았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제사초식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세 뿌리는 챙겨서 객잔을 나왔다.
나는 이것을 광두에게 복용시킬 생각이다.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려야겠지만, 비밀리에 복용시킬 방법이 없다.
어디서 났는지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고,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면 왜냐고 물어보실 것이다. 자식이 영약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면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비밀이 새어나가면 큰일인 상황이다.
죄송하지만 두 분에 대한 효도는 좀 더 자리를 잡으면 다른 식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죄송합니다, 두 분.
광두에게는 절대 비밀이라고 복용시키면 된다. 자신이 뭘 먹었는지도 모르고 먹을 테니까. 비밀을 지닌 사람이 셋인 것 보단 하나가 더 나을 테고.
이제 처리해야 할 것은 천조검이었다.
나는 중원의 이름난 검 장인을 몇 명 알고 있다. 정말 대가라 불릴만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멀리 있어서 그들을 찾아갈 여유가 없다.
게다가 이 검은 맹주의 검이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에 장인이 의리가 있으면 그의 목숨이 위험할 것이고, 의리가 없으면 검이 어떤 모양으로 개조되었는지 밝혀질 것이다.
그래서 잘 될지 모르겠지만, 내 손으로 직접 개조해 보려고 한다.
나는 곧장 인근의 철방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