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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회는 시작되었다(2)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안은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내가 송화린을 두들겨 팬 일을 전해들은 것이다. 송우경도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멍청이! 이 천하에 둘도 없이 한심한 놈!”
어머니가 달려와 사정없이 뒤통수를 때렸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말렸다.
“부인, 참으시오!”
그러고 보니 벽리단의 몸에서 깨어나던 그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어머니에게 이렇게 두들겨 맞았는데.
아, 여자에게 맞아도 얻어터지고, 때려도 터지는 이 불쌍한 남자들의 인생이란.
“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어머니는 정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어떻게든 송화린과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였으니, 선물을 가져다줘도 모자랄 판에 때려눕혔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소식인 것이다.
아버지나 송우경도 겉으로 표는 내지 않아도 마찬가지 심정이겠지.
물론 가장 화난 사람은 당연히 송우경일 것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이나 송우경이 우리 혼인에 대한 미련을 조금이라도 버리는 계기가 될 테니까.
특히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정수의 일로 아버지를 위로하고 함께 술을 마실 때의 나는 이런 행동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으니까.
송우경이 내게 다가왔다. 정말이지 한 방 날아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 때리면 맞아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날리는 대신 담담히 물었다.
“왜 그랬나?”
“린이와 정식으로 비무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린이가 강해서 저도 최선을 다해야했고, 그러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아마도 그가 묻는 것은 지난 번 일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느냐는 것이리라. 송화린의 호위인 수란에게는 지난 번 복수라고 말했었지만 그것은 마정수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고, 차마 송우경에
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그뿐이었습니다.”
“진심이냐?”
“네.”
잠시 나를 응시하던 송우경이 굳었던 인상을 펴며 껄껄 웃었다.
“하하하! 우리 사위, 알고 봤더니 아주 강했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가 크게 당황했다.
송우경이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딸아이의 무공성취가 결코 적지 않다네. 한데 린이를 일방적으로 이기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지 않나?”
맙소사! 오히려 나를 칭찬할 줄이야.
아버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화린이를 다치게 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네.”
“비무 중에는 종종 다치는 일이 일어나는 법이지.”
“그러니 더 조심했어야지. 녀석은 벌을 받아 마땅하네.”
송우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암, 벌을 받아야지. 내게 맡기게.”
그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벌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물론입니다.”
“좋네. 린이가 다 나으면 앞으로 자주 만나게. 그게 벌이네. 알았나?”
지금 분위기에서 차마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겠다는 대답은 힘들다 쪽에 가까운 답변이었지만, 송우경은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럼 됐네.”
그가 아버지를 보며 기분 좋게 말했다.
“간만에 술이나 한잔 하지.”
초조하게 지켜보던 어머니가 한결 편한 얼굴이 되었다.
“제가 오랜만에 실력발휘 한 번 하죠. 제 요리 드셔보신지 꽤 되셨죠?”
그러자 송우경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구조신호였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요리 실력만큼은 솔직히 별로였다. ‘별로’라는 기준은 효심가득한 평가고, 냉정하게는 최악이었다.
아버지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혀라고 어찌 다르겠는가? 다만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일 뿐.
송우경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굳이 힘들게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지금 장주님 표정이 마치 억지로 독을 먹이려는 마인을 바라보는 표정이세요.”
“허허. 그럴 리가요? 오해십니다.”
송우경이 당황하자 그제야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었어요. 저도 제 요리실력은 잘 알고 있답니다. 제 요리가 필요할 때는 원수에게 만찬을 차려줄 때뿐이지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십니다.”
말을 해놓고 송우경이 아차 했다. 그 말에 이미 요리 실력이 형편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쉽게 낚이셔서 재미가 없네요.”
뒤늦게 송우경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저야 예전부터 재미없는 물고기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바탕 떠들썩한 너스레를 떨고 나서 부모님들이 방을 나갔다.
아마도 송우경의 속마음은 저렇게까지 웃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딸이 다쳐서 누웠는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겠는가?
다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이렇게 기분 좋게 넘기려는 것이겠지.
어쨌든 적어도 이 일이 저분들의 우정을 방해하지 못하리란 것은 확실해 보였다.
* * *
다음날 새벽, 나는 예전에 임독양맥을 타통했던 산 속의 동굴에 앉아 있었다. 동굴이 워낙 인적이 끊긴 은밀한 곳에 위치했기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주로 이곳을 찾았다.
난 이번 연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는 놈이 송화린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번 일의 배후에 마봉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마봉기, 즉 천도문이 조직적으로 중원에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과연 산동에만 왔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혈육들이 중원 곳곳으로 흩어져 비슷한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으리라 확신한다.
독살 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복수에 미쳐 날뛰지 않았다. 무공을 회복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살만큼 살다 죽었는데, 그냥 다 잊고 새 인생이나 잘 살아보자는 마음. 어지간하면
다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한데 이건 아니지.
내가 밤잠을 설치며 지켜온 중원이었다.
돈 좀 있다고, 힘 좀 있다고 약한 사람들 괴롭히고 짓밟는 것들, 그런 놈들이 설쳐대지 못하게 내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데.
한데 이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이 내 죽음의 향내가 사라지기도 전에 설쳐댄단 말인가?
한숨만 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어서 힘을 키워서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이 쌍놈의 새끼들, 다 뒈질 줄 알아라.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앞에 놓인 혁낭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마정수의 금고에서 가져온 그것, 이번 싸움의 첫 전리품이었다. 금고에서 뭘 주워 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두근거렸다. 예전에 천년파양초를 앞에 두었을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혁낭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천조검을 꺼냈다.
차아앙.
이 얼마 만에 잡아보는 천조검이던가?
사실 천조검은 내가 애용하던 검은 아니었다. 전대 맹주때부터 내려오던 보검이어서 한동안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이후 무림맹의 보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천조검을 드니 감회가 새로웠다.
보검에는 보검만의 힘이 있다. 당장 이 천조검만 해도 내가 들면, 지금의 검을 들었을 때보다 삼 할은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이 천조검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그냥 이대로 동굴 바닥에 묻어두느냐, 흑시에 내다 파느냐,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게 개조하느냐.
가장 먼저 흑시에 내다 파는 것부터 제외했다.
돈이 많이 필요한 시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천조검을 파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맹주가 쓰던 검이란 가치 때문에 값을 매기는 것도 쉽지 않았고, 고객의 안전과 비밀을 최우선으로 하는 흑시라 할지라도, 천조검이라면 내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몇 만 냥 들고 가서 영약을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마정수 쪽이 흑시를 뒤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흑시 자체가 워낙 큰 조직이라 어지간한 압력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을 테니까.
흑시를 뒤집어엎으려면 무림맹 차원에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인피면구를 쓰고 갈 테니, 추적당할 걱정은 전혀 없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둘.
숨겨 두느냐, 개조하느냐?
결국 나는 개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만약 이 검이 내 독문병기인 수라명왕검이었다면 안전한 곳에 숨겨두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설프게 손댈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중에 내가 완벽하게 예전의 무공을 되찾았을 때 들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게 천조검은 그만큼 소중한 검은 아니었다. 지금 내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면 충분한 검이다.
아직 내공이 부족한 상태이니 천조검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천조검을 한 옆에 내려두고 다시 혁낭을 열었다.
이번에 꺼낸 것은 전표들이었다.
고액전표도 있었고, 소액전표도 있었다. 세어보니 액수는 자그마치 팔만이천 냥이었다.
오만 냥은 고액전표였고, 나머지 삼만이천 냥은 당장에도 사용가능한 소액전표였다.
추적이 가능한 고액전표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사용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방법은 면구를 착용하고 흑시에 가서 아주 비싼 물건을 사버리는 것이다. 물론 흑시에서 고객의 비밀을 유출하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서 영약 같이 먹어버리면 전혀 표가 나지 않
는 물건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나는 이 오만 냥을 그렇게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머지 삼만이천 냥은 전장에 비상용으로 보관해 두기로 했다.
공수찬을 믿지만 그가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었으니까. 또 내가 돈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공수찬에게 돈을 달라는 것도 귀찮은 일이다. 투자를 통해 불리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비상시에 사용할 돈도 필요했으
니까.
다음으로 꺼낸 것은 몇 장의 종이였다. 살펴보니 이번 무관설립과 관련한 몇 가지 서류들이었다.
내게는 아예 필요 없고, 마정수는 없으면 좀 답답해지는. 물론 이게 없어진다고 무관설립이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힘을 가진 쪽은 놈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상자를 꺼냈다.
안에 뭐가 든 것인지 모르는 상자는 조심해서 열어야 한다. 폭발할 수도 있고, 독이 흘러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 위험한 것을 돈이나 서류와 함께 보관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숨을 멈추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아!”
안에 든 것을 보며 내가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아홉 개의 푸른 잎, 또렷하고 신비해 보이는 하얀 잎맥, 놀랍게도 안에 든 것은 신령구엽초(神靈九葉草)였다.
앞서 복용했던 천년파양초보다 나은 효능을 지닌 영초였다. 천년파양초가 십 년에서 십오 년의 내공을 준다면 신령구엽초는 십오 년에서 이십 년의 내공을 주는 영약이었다.
천년파양초를 사만사천 냥에 샀으니, 이것은 적어도 칠만 냥 이상의 가치를 지닌 영초였다.
산동가문들 중 누군가 바친 것이거나, 놈이 이번에 가져 내려온 것일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하하하하.”
기쁨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것이 마정수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정말이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기쁨을 만끽한 후 차분한 마음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부모님께도 드리고 싶고, 광두에게도 주고 싶지만, 아직은 내가 더 강해져야 할 때다.
만약 그들이 복용하는 것이 내가 복용하는 것보다 더 효율이 좋다면 모를까, 아직은 내 쪽의 효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나는 곧장 신령구엽초를 복용했다.
한 줌의 기운이라도 놓칠까, 정성껏 씹어 삼켰다. 뿌리며, 잎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알싸한 영초의 맛이 입안을 가득 감돌았다.
곧바로 천무호심결을 운기하며 신령구엽초의 기운을 흡수했다.
스스스스스.
몸속으로 신령구엽초가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역시 신령구엽초가 지닌 모든 효능을 다 흡수했다. 지난 번 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흡수했다. 이제는 천무호심결이 벽리단의 몸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이다.
진기를 몇 주천하면서 몸을 다스린 후 단전을 살폈다.
원래 이십사 년의 내공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단전에 있는 내공은 사십사 년이었다. 신령구엽초로 자그마치 이십 년의 내공을 흡수한 것이다.
“하하하하.”
다시 기쁨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일 갑자 내공까지는 십육 년이 남았다. 지금대로의 수련이라면 채 이 년도 남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내겐 흑시에서 써버릴 생각인 오만 냥이라는 돈이 있었다.
운 좋게 흑시에 영약이 있다면 내공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제발 영약이 있어라.
나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다시 혁낭 속을 살폈다.
나머지는 몇 가지 약이었다. 금창약과 내상약, 몇 가지 대표적인 독을 치료하는 해약, 하나같이 최고급 약들이었다. 당장 금창약만 해도 저 작은 통에 든 것이 몇 백 냥 하는 것이었다. 물론 효과는 돈값을 하는 것들이었다.
이것도 내가 잘 쓰도록 하마.
내려가서 용기만 바꾸면 문제없을 것이다. 아주 비싼 것이지만, 중원 곳곳에서 파는 것들이었으니까.
서류들은 모두 태워서 없애 버렸다. 어차피 내겐 필요가 없었고 지니고 있다가 걸리면 안 될 물건이었으니까. 놈만 곤란해지겠지.
혁낭에 검과 전표, 약병들을 넣고 동굴을 나섰다.
저 멀리 산 너머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했고 기분 좋은 일출이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