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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피하는 방법(2)
나는 객청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송우경에게 인사부터 해야 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도착한지 반각쯤 지나자 송화린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나를 찾아왔다고?”
방금 씻고 왔는지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그녀는 봄에 봤을 때는 봄꽃 같았는데, 이젠 가을하늘 같았다.
“잠시 나가서 걸을까?”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와 후원을 거닐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다.
“잘 지냈어?”
내 물음에 그녀가 대답했다.
“수련하고, 또 수련하고. 그런 일상의 반복이지. 너는?”
“나도 비슷해.”
“소검대에 관한 소식은 들었어. 야수대를 물리쳤다고?”
“운이 좋았어.”
“과연 그래서일까?”
그녀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제 내 변화를 확실히 받아들인 상태였다.
“왜 파락호 행세를 했지? 혹시 나와 파혼하고 싶어서?”
그녀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파락호 행세를 한 것이 아니라 그때는 파락호였어.”
“내게 맞은 후에 바뀌었고?”
“그래.”
“그걸 나보고 진짜 믿으라고?”
“믿어야 해. 사실이니까.”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는 것이 하나 있어.”
“뭔데?”
“전에 그랬잖아? 전대 맹주를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또 묻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응, 궁금해.”
“그게 왜 궁금한데? 너는 맹주와 아무 관계도 없잖아?”
그녀를 이해시킬 합리적인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평소에 존경했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냥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유를 말했다.
“딱히 이유는 없어. 그런 것 있잖아? 한 번 궁금하니까 자꾸 궁금해지는. 갑자기 그것에 딱 꽂혔다고 할까?”
그녀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아니, 처음인가?
어쨌든 존경하니 어쩌니 하는 이유보단 차라리 나은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 대단한 이유가 아닌데. 차라리 진작 말해줄 걸 그랬네.”
“지금도 괜찮아.”
그녀가 이유를 밝혔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전대 맹주를 정말 존경했어. 거의 신처럼 여겼지. 싫은 사람이 너무 좋아하니까 난 괜히 싫어지더라. 너무 실없는 이유지?”
“네가 싫어한 사람이 누군데?”
그녀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그녀만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그냥 여기까지만.”
“그래, 충분해. 말해줘서 고맙다.”
“이깟 걸로 고맙긴. 한데 왜 날 찾아온 거지?”
장담하건데 지금 내가 꺼낼 말을 들으면 그녀는 정말 놀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좋은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말을 던졌다.
“네게 비무를 신청하려고.”
“뭐?”
송화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를 만난 이후 이렇게 놀란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랑 한 판 붙자.”
멍하게 있던 그녀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이야?”
“진심이다.”
“이유는?”
“그날의 복수.”
송화린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전에 헤어질 때 그녀가 내게 마지막 했던 말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였다.
한데 다시 찾아와서 비무를 하자고 했으니 그녀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너는…….”
어떻게든 나를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절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라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며 비무를 허락했다.
“좋아, 해.”
나와 그녀가 연무장에 마주섰다. 멀리서 수란이 이 난데없는 상황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기왕 비무를 할 거면 정식으로 해.”
“내가 바라는 바야.”
“진검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흠칫 놀랐다.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인데 내가 그러자고 대답한 것이다.
진검비무를 했다가 잘못되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와는 첫 비무였다. 어떤 검술을 사용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그녀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파락호 때의 나였다면 그녀는 절대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지만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리라.
“좋아. 대신 흥분하면 안 돼. 절대!”
그녀의 당부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녀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나 역시 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쉭!
그녀가 가볍게 도약해서 검을 찔러왔다. 일종의 응수타진의 수였다.
따앙!
내가 가볍게 검을 휘둘러 튕겨냈다.
다시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챙! 채앵! 챙!
가볍게 오가는 공방이었다. 처음부터 죽일 듯 달려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내 예상대로 그녀의 실력은 상당했다. 보법은 경쾌했고 초식은 날카로웠다. 어디선가 본 듯한 검법, 어쩌면 그녀를 가르친 사부는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챙! 챙! 채앵!
공수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자연스럽게 내 싸움으로 끌어들였다. 한 번의 실수가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만큼, 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무 전체를 조율했다.
그녀를 몰아붙였다가, 역으로 밀렸다가, 아슬아슬한 공격이 다시 여유로운 방어로 이어지고, 여유는 다시 숨 막히는 위태로움이 되었다.
나의 치밀한 계산하에 그녀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를 한계점으로 밀어붙였다. 내가 이렇게 강했냐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을 것이다. 아마 이런 비무는 처음일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했을 때.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파고든 내 검이 그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가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앗!”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목이 잘려나갔겠지만 내 검이 방향을 틀었다.
퍽! 검 손잡이가 그녀의 어깨에 적중했다.
“큭.”
그녀가 휘청하며 다시 검을 휘둘러 이어지는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퍽퍽퍽퍽퍽퍽!
내 주먹이 연속해서 배와 옆구리를 강타했고 마지막 두 방은 얼굴로 날아들었다.
“아가씨!”
놀란 수란이 달려왔을 때는 그녀는 이미 바닥에 나가떨어진 이후였다.
수란이 황급히 송화린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 의식은 있었다. 수란이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정정당당한 비무였어. 설마 여자라고 봐달라는 것은 아니지?”
내 말에 수란은 인상을 굳혔지만 뭐라 항변하진 못했다.
수란이 잔뜩 화난 것을 알았지만 한마디 덧붙였다. 본의 아니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지난 번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한 복수다.”
수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그녀였다.
그때 송화린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수란이 돌아보자 송화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말란 뜻이었다.
“……내가 진거야. 그리고……”
그녀가 바닥에 누운 채 반쯤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망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지막 그 수법은?”
다행히 느꼈구나.
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이기려고 때린 것이 아니었다.
싸우면서 보니 그녀의 검술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초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초식에. 내가 그것을 제대로 파훼하며 공격한 것이다.
초식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언젠가 이 약점을 꿰뚫어 보는 적에게 죽게 될 것이다.
송화린은 방금 전 내 공격에서 느낀 것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초식이 무기력하게 파훼되는 것을. 자신이 운이 없어서 그냥 맞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붙자는 말일까? 아니면?
수란이 그녀를 업고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알아서 잘 때렸으니까.
한 열흘 이상 침상에 누워 지내야 할 것이고 얼굴이 부어올라서 한동안은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이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녀에게 실전경험을 주고, 초식의 약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비무를 하러 왔느냐고?
물론 아니다.
이 비무는 어디까지나 마정수 때문이었다.
놈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볼 때 어설픈 핑계를 대고 연회에 불참하면, 다음날 송가장으로 직접 찾아올 수도 있었다.
이젠 찾아온다 하더라도 저 몰골을 보고 어떤 수작을 부리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이런 상태인데도 개수작을 부리려 하면, 그땐 뒷일 생각안하고 어떻게 해서든 놈을 없애버릴 것이다. 천도문 전체가 산동으로 몰려오든 말든, 그건 그때 생각할 거다.
사실 처음 떠올린 방법은 송우경을 찾아가서 솔직히 말을 하고 그녀를 멀리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었고, 설령 간다하더라도 오히려 내 손을 벗어나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사람을 풀어 그녀 행방을 찾아낼 수도 있었으니까.
다른 이유를 들어서 불참하더라도 놈이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거짓말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짜 부상을 당해 누워버리면 놈도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비무의 이유도 충분했다. 지금은 정신을 좀 차렸다지만, 전직 파락호 놈이 이전에 맞은 복수를 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시간을 벌었다.
너무 하책(下策)이라 그녀에게 미안했고, 송우경에게도 미안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서는 다른 상책(上策)을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갈사량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 모든 걱정들이 단지 기우일 수도 있다.
놈이 송화린에게 아무 사심도, 관심도 없을 수도 있지.
그냥 대비하는 것이다.
악인을 상대할 때는 항상 대비하고 또 대비했으니까.
미리 조심하지 않아서 받게 될 피해는 이 수고에 비하면 너무나 크고 치명적일 테니까.
* * *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연회에 가기 전에 또 하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만약 내 목표가 마정수를 죽이는 것이라면 이번 일은 좀 더 쉬울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대라도 내가 가장 잘하는 영역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놈이 가진 것을 뺏는 일은 그보다는 확실히 어려웠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갈사량에게 시키기만 하다가 직접 처리하려니 땀이 날 수밖에.
그래도 해낼 것이다. 놈이 우리에게 와서 돈을 뺏고 엉덩이를 흔들어댔으니까, 똑같이 갚아주어야지.
따라온 셋 중에 하나를 죽이는 것보다, 놈의 돈을 건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돈이 사라지면 놈들은 당황할 것이다. 내부는 분열되고 균열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돈이 가진 힘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기어코 갈라놓게 만드는 악마적인 힘.
문제는 과연 돈은 어디에 보관하고 있으며 그 관리를 누가 하느냐다.
마정수? 화선노대? 시곤? 그 의문의 여인?
가장 먼저 화선노대를 제외했다. 늙은 나이도 나이지만 그는 외부인사였다. 마정수가 외부의 인사에게 돈을 맡겼을 리 없다.
같은 이유로 의문의 여인도 제외한다면, 그렇다면 시곤일까?
비록 친선대회였긴 했지만 천도문을 대표해서 나온 무인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인이다. 아무래도 돈 관리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그렇다면 마정수가 직접 관리하는 것일까?
그나마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였다.
내 부름을 받고 광두가 내 방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한 가지 알아볼 것이 있다.”
내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광두가 긴장했다.
“뭡니까?”
“너도 들었겠지? 천도문주의 혈육이 산동에 내려와 있는 것.”
“물론입니다.”
녀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산동의 가주들에게 돈을 뜯었다면서요?”
나도 녀석처럼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긴 내 방인데 왜 이리 속삭여?”
그러자 광두가 속삭였다.
“혹시 그 놈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큰일 나잖아요? 무림맹주의 핏줄에 게다가 천도문은 중원오세 중 하나고요.”
“그럼 넌 큰일났구나.”
“왜요?”
“지금 당장 그놈들 뒷조사를 하러 가야 하니까.”
광두가 눈을 껌벅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말하지만 나는 이럴 때의 광두 표정이 참 좋다.
“진심이시군요.”
“원래 여자문제는 일로 잊는 게 제일 좋다.”
“여자 백 명은 잊을 수 있겠는데요?”
내가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다시 높였다.
“별 일 아니니까 긴장 풀어라.”
장난기를 거두고 광두가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놈은 제남에 무관을 지으려고 하고 있다. 너는 지금 당장 제남으로 가서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 와라. 어디에 짓고, 누가 공사를 담당하는지, 언제 시작하는지, 네가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알아보아라. 놈이 알려
준 것 이외에 알아야 할 것들이 분명 있을 거다.”
나는 처음 회합 때 마정수가 무관 설립에 관해 말했던 내용을 광두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쓰라고 이천 냥을 따로 챙겨 주었다.
“이렇게나 많이요?”
“써야할 일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무조건 써.”
“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광두를 믿어도 된다. 유들유들 부드러운 광두의 인간적 호감은 타고난 것이다. 게다가 녀석에게는 위험을 피해가는 본능적인 영리함이 있었으니까.
그냥 보내기 아쉬워 슬쩍 농담을 던졌다.
“도순이와 함께 보내줄까?”
“아뇨.”
뜻밖에 망설임 없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왜? 벌써 마음 정리했어?”
“아뇨. 아직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파요.”
“그런데 왜?”
“그나마 제게 남아있던 정까지 다 떨어지게 할 수는 없죠.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더럽게 끝내긴 싫습니다.”
내가 현명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 다녀올게요.”
“말 타고 다녀와.”
광두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이번에 기마술의 고수, 아니 아예 반인반마(半人半馬)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광두를 보내고 연회가 개최되는 양소방을 향해 집을 나섰다.
내가 연회를 싫어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다.
연회는 사람을 흐트러뜨린다.
그걸 알기에 이 연회가 나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게끔 노력할 것이다.
자, 나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과연 너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