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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피하는 방법(1)
객방으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선 서도방주(西刀幇主) 황청(黃淸)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오늘 이곳 양소방 객방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바로 마정수였다. 마정수가 사람을 보내서 은밀히 만나자는 약속을 청한 것이다.
서도방은 산동에서의 서열은 육 위였다. 물론 일전의 회합에 그도 참석했다. 그 역시 이번 마정수의 행태가 못내 못마땅한 수장들 중 하나였다.
그가 생각하는 마정수는 이런 자였다.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놈.
‘새파랗게 어린놈이!’
하지만 절대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천도문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젠 무림맹주의 핏줄까지 되었으니까.
시비의 안내를 받아 약속한 객방으로 들어갔다.
마정수는 혼자서 술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청을 반겼다.
“오! 어서 오십시오, 황방주님.”
“마대협, 이렇게 불러주셔서 반갑소.”
아직 대협이란 호칭을 붙이기에는 나이도, 명성도 한참 모자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뜻밖에 마정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대협이라니요? 너무 과한 말씀입니다. 편하게 아우로 대해주시지요.”
“허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닙니다. 황방주께서 적발귀(赤髮鬼)를 죽여 없애실 적에 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편히 대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황청이 깜짝 놀랐다.
“내가 적발귀를 죽인 일을 알고 계셨소?”
무려 삼십 년 전, 젊은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머리카락이 붉은 사파의 고수가 산동일대를 어지럽혔다. 젊은 혈기에 분연히 나서 천 합을 겨룬 후에 놈을 죽였던 것이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마정수는 그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오래전에 숙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존경심을 가졌었답니다.”
“숙부라고 하시면?”
“강호에선 격뢰수(擊雷手)라 불리시는 분이십니다.”
“오! 격뢰수 마충현(麻沖鉉) 대협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마대협의 크나큰 명성은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격뢰수 마충현은 천도문에서 아주 유명한 고수였다. 명실공히 천도문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
“그분께서 저를 알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네, 분명히 알고 계셨고, 제게 황방주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르침도 내려주셨지요.”
“아!”
황청은 내심 기뻤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정수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격뢰수까지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그냥 지어낸 말처럼은 보이진 않았다. 반신반의하면
서도 믿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가 이번에 산동에 내려오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뵙고 싶었던 분이 황방주십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비록 저 말이 의도된 말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달콤했다. 기왕이면 뻣뻣하고 건방진 태도보단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일부러 잘 보이려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고, 이제 스물다섯 남짓한 마정수가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자, 제 술을 받으시지요.”
마정수가 정중한 태도로 술을 따랐다. 첫날의 나빴던 인상이 어느새 좋게 바뀌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돈은 감사합니다.”
“마땅히 도와드려야 할 일이지요. 오히려 보내 주신 귀한 선물 잘 받았습니다.”
“당연히 돌려드려야지요.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입니다.”
마충현에 이어 이번에는 마봉기가 언급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지만 황청은 내심 위축되면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여러 일들을 할 생각입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본방은 성심성의껏 돕겠소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산동의 몇 개 문파와만 손을 잡을 생각입니다. 너무 많은 문파가 개입되면 구설에만 오를 테니까요.”
황청은 자신이 그 문파 중의 하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챙겨줘서 고맙습니다.”
첫인상이 워낙 별로였기에 오히려 이런 친절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잊지 말아주십시오. 황방주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라는 것을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두 사람이 술잔을 부딪쳤다.
반시진에 걸친 술자리가 끝나고 황청이 돌아갔다. 황청은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홀로 남은 술을 비우던 마정수도 달라져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것은 황청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며 화선노대와 시곤이 안으로 들어왔다.
화선노대가 웃으며 말했다.
“잘 하셨네.”
마정수가 비웃듯 입매를 틀었다.
“이깟 촌놈들 상대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요.”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네.”
“걱정하지 마세요. 전 방심 따윈 하지 않으니까.”
화선노대가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진짜 방심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방심 따위’란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굳이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갈 때가 되었네.”
그러자 마정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드디어 그녀를 볼 수 있겠군요. 산동제일미라 불린다던데.”
화선노대가 살짝 난감을 표정을 지었다.
“한낱 계집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도 있네.”
핏줄은 못 속인다고 마정수 역시 제 아비를 닮아 욕정이 대단한 자였다.
“한낱 계집이 아니라 산동에서 제일 예쁜 년이라고 하지 않소?”
“부디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게.”
화선노대가 시곤을 힐끗 돌아보았다. 한 마디 거들어 달라는 뜻이었는데, 시곤은 못 듣고 못 본 척 말없이 서 있었다.
“계집 문제는 제게 맡기시고, 각 파에 초청장이나 돌려주시오.”
“알았네.”
“참, 우리 신비녀는 어디에 있소?”
“아까 보니 밖에 있던 것 같았는데.”
마정수가 창가로 걸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그녀는 일전의 회합에서 마정수와 함께 대청에 들어왔던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후원에 서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여인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아직 없다네.”
“젠장.”
이번에 내려올 때 아버지가 딸려 보낸 여인이었다. 자신을 감시하려고 보낸 것인지, 도와주려고 보낸 것인지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따로 자신이 은밀히 그녀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마정수가 그녀를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년이냐?”
* * *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대책이 서지 않은 상황에서 양소방을 돌아다니다 공연히 그들과 마주쳐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더구나 인피면구까지 착용한 상태. 상급면구라 어지간하면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검대원들의 훈련에 참가했고, 나 역시 수련에 매진했다. 심란할수록 더 집중하고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닥쳐올 상황이 요구하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 대책이니까.
평소처럼 행동했기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단 한사람은 달랐다.
“도련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광두가 귀신처럼 내 심리상태를 알아차렸다.
“죽이고 싶은 놈이 생겼다.”
“헉!”
깜짝 놀란 광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그 불쌍한 놈이 누굽니까?”
“스물다섯쯤 되는 나이에 주위에 상당한 고수가 지켜주고 있다.”
그러자 광두가 흠칫 놀랐다.
“설마…… 저입니까?”
내가 피식 웃자 광두가 따라 웃었다. 잠시라도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광두의 노력이 가상하다.
“도순이랑은 잘 되고 있느냐?”
“그게…….”
광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용기를 내서 쉬는 날 다루에 차 한 잔 마시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요즘 바빠서 힘들다네요.”
“그랬군.”
“사실 아무리 바빠도 제가 좋으면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내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자 광두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 쉽게 인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럴 때는 정말 바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해 주셔야지요. 아니면 너무 부끄러워서 거절했다고 해주시든지요.”
“아니. 남자나 여자나 상대가 좋으면 반드시 시간 낸다. 넌 바쁘다고 안볼 거야?”
이내 광두가 울상을 지었다.
“그런 거죠?”
“안타깝지만 그런 거지.”
“흥! 저 복수할 겁니다. 무공도 세지고, 돈도 많이 벌고. 겁나게 잘 돼서 제 앞에 무릎 꿇고 싹싹 빌게 만들 겁니다. 용서해 달라고. 그럼 전 훗,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하는 거죠. 이미 늦었다, 꺼져라!”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광두가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통쾌하지 않으세요?”
잠시 사이를 두고 내가 말했다.
“통쾌하겠네…… 진짜 좋아했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
광두가 가만히 그 장면을 떠올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흑! 생각만 해도 슬프고 불쌍하네요.”
“그래, 복수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광두야,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잖느냐? 힘내라.”
광두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돌아섰다.
뒤늦게 광두가 소리쳤다.
“아, 저 첫사랑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니라고요! 저 닳고 닳은 녀석이라고요!”
* * *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정수가 후기지수들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구나. 네게도 초청장이 왔다.”
이 자식, 정말 정신없이 몰아붙이는구나.
나는 대번에 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산동의 여러 문파의 수장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자식들이었다.
놈 또한 비슷한 또래다. 후기지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그들을 휘어잡는다면 앞으로 더욱 쉽게 산동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돈 몇 푼 뜯으러 내려온 것이 아니다.
산동을 제대로 해먹으러 내려온 것이다.
다음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앗!”
송화린.
과연 놈이 송화린이 돌아와서 산동제일미 소리를 듣고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까?
설령 못 봤다 하더라도 그녀를 보면 놈이 그냥 있을까?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고 놈이 제 아비처럼 색을 밝히는 놈일 가능성이 있었다. 본대로 자랐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제 아비에게 송화린을 바치려는 발칙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후계구도에 밀려있는 놈이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려 할 테니까.
그날 본 놈이라면 두 가능성이 모두 충분했다.
송우경 부녀와의 정을 생각한다면 절대 송화린이 그런 더러운 상황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 * *
송화린은 그날의 꿈을 꾸고 있었다.
벽리단이 술을 먹고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그날을.
“흥! 그 반반한 얼굴이 천년만년 갈 것 같지? 너도 늙으면 쭈글쭈글해질 것이라고. 그러니까 잘난 척 하지 마라.”
“그만 돌아가!”
“싫다. 이대론 못 가.”
벽리단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억지로 안으려는 것을 송화린이 뒤로 밀어냈다. 술기운에 휘청거리다 뒤로 자빠졌다.
“그만 가라고! 술 깨고 다시 와!”
“밀어? 시발! 지금 날 밀었어?”
벽리단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송화린이 이번에는 밀지 않고 멱살을 잡았다. 술냄새가 지독하게 났고 충혈된 두 눈에서는 술기운이 만들어낸 광기가 흘렀다.
“저기 밖에 널 보려고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날 보내려는 거지?”
“헛소리! 날 대체 뭐로 보고?”
그녀의 멱살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벽리단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깟 무공 좀 배워왔다고 날 무시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풀었다.
다시 벽리단이 소리쳤다.
“넌 내 거야, 배속에서부터 내 것이라고!”
“웃기지 마. 난 네 것이 아니야!”
벽리단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딴 놈이라도 생겼어? 그래? 이 썅…….”
퍽! 퍽! 퍽! 퍽!
참지 못한 송화린의 주먹이 연속해서 날아갔다.
내력이 깃들지 않은 주먹이었는데 술에 취한 벽리단은 중심을 잃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그날의 일이었다.
원래라면 광두가 달려와서 벽리단을 업고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오늘의 꿈은 그날과 달리 진행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벽리단이 말했다.
“사람은 절대 안변한다고?”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벽리단은 조금 전의 그 벽리단이 아니었다. 담담한 눈빛에 차분한 말투. 바로 근래의 벽리단이었다.
“아니, 사람만큼 쉽게 바뀌는 존재도 없지.”
벽리단의 차분한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헉!”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송화린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바깥에서 호위인 수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녀가 침상에서 일어나 한 옆 탁자로 걸어갔다. 주전자에서 식은 차를 따라 마셨다.
“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저,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을 듣지 않고 수란이 들어왔다.
“아가씨.”
수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도 같은 꿈입니까?”
송화린은 처음 돌아왔을 때부터 악몽을 반복해서 꾸곤 했다.
“아니, 오늘은 다른 꿈이었어.”
“무슨 꿈입니까?”
앞서의 악몽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송화린은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랜만에 집에 와서 긴장이 풀려서 그래.”
송화린은 항상 같은 말이었다.
수란이 걱정스럽게 송화린을 바라보았다. 긴장이 풀린다고 악몽을 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온 지 벌써 육 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가씨, 의원이라도 한 번 만나보시죠.”
“괜찮다니까.”
그때 시비가 와서 보고했다.
“벽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송화린이 깜짝 놀랐다.
“이 아침에 벽공자가? 아버지를 만나러 왔나?”
그러자 시비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전했다.
“아뇨. 조용히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