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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40화 (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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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불어온 바람인가(3)

구체적인 액수가 정해졌다.

서열 일 위부터 삼 위까지는 오천 냥, 사 위부터 십 위까지는 삼천 냥, 나머지 이십 위까지는 천 냥. 각 파의 서열에 따라 돈이 정해졌다.

청송문주 곽태와 구룡방주 석문도가 앞장서서 그 일을 주도한 것이다.

두 사람이 여러 가문을 만나 의논해서 액수를 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정수가 미리 정한 액수일 것이라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다 모으면 몇 만 냥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요구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정수가 직접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냥 인사를 하면서 도와달라는 말을 한 것뿐이었으니까.

각 문파들은 당연히 불만을 가졌다. 생돈을 내야하는 것도 기분 나빴지만, 그 이전에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자신들을 뭐로 보고 이러는 것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일은 먼저 나서는 사람이 덤터기를 쓰고 뭇매를 맞기 마련이었다. 아예 작정하고 천도문에 맞설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대 맹주가 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기에, 다들 이 상황을 어찌해야할지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송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천재지변이네. 쏟아지는 비를 보며 한숨만 내쉬어야 하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늦은 밤, 방안 공기가 답답해서 산책을 나왔다.

벽씨검문의 내원은 잘 꾸며져 있었다. 나무며 꽃이며 정말 보기 좋게 잘 자라고 있었는데,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종총관이라고 했다. 버럭버럭 대기만 하는 것 같아도 이런 세심한 면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화원을 거닐고 있는데 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

“밤이 늦었는데 어인 일이냐?”

“잠이 안와서요. 아버지는 왜 주무시지 않으시고요.”

“나도 잠이 오지 않는구나.”

아버지는 몹시 심란해 보였다. 그날의 일 때문일 것이다. 자식을 옆에 두고 당한 수모였으니까. 자식 앞에서만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세상 부모들의 마음일진대.

속상할 것이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겪은 그 어떤 힘든 일보다도 더.

거기다 아버지는 내키지 않는 말까지 해야 했다.

“우리도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는 아버지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했다.

놈이 아버지에게 한 위협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런 협박에 굴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나를 두고 협박한 것이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다. 모두 돈을 내는데 혼자만 버텼다가 내가 화를 당할까봐.

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내 반응이 의외라는 듯 아버지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적이 강할 때는 잠시 물러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아버지의 뜻과 의지가 물러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냥 작전상 후퇴일 뿐이지요.”

그냥 아버지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고 그것은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나.”

아버지를 존경했기에…… 나는 더욱이 놈을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 참으십시오. 이 복수는 제가 반드시 합니다.

아버지와 관련한 감정적인 결심이라고 한다면, 그래. 인정한다.

그날 울컥한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복면을 쓰고 찾아가 목을 따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놈을 암살하는 일은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우선 현실적으로 그를 지키고 있는 화선노대와 시곤의 무공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하나도 쉽지 않은데, 그들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고수까지 있었다. 당사자인 마정수 역시 만만한 놈은 아니었고.

각개격파에 기습까지 해야만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을 만들더라도 신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이것이 마정수 개인의 소행인지 아니면 마봉기가 시킨 일인지.

마정수 개인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그를 죽이면 흉수를 찾기 위해 천도문의 고수들이 개떼처럼 몰려 내려올 것이다.

한데 마봉기가 시킨 것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천도문에 무림맹의 고수들까지 함께 나설 테니까.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직은 산동이 놈들의 주목을 받아선 안 되었으니까.

나는 더 힘을 키우며 내실을 다져야 한다.

“아버지, 술 한 잔 하시지요?”

그날 아버지와 늦도록 술을 마셨다. 좀처럼 취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취한 날이었고, 나는 마실수록 술이 깨고 있었다.

* * *

산동 각 문파에서 모은 돈이 청송문주를 통해 마정수에게 전해졌다.

마정수는 고마움을 표하는 뜻으로 각 문파에 선물을 보냈다. 낸 돈의 반 정도 되는 상당한 액수의 선물들이었다. 그런 고가의 선물을 받자 그에 대한 날선 평가가 조금 누그러졌다.

정말 돈을 뜯으러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물론 그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퍼뜨린 것은 청송문주 곽태와 구룡방주 석문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돌았다. 마정수가 이곳에 무관의 탈을 쓴 문파를 세운다고 해도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마정수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자의든 타의든 다들 마정수의 눈치

를 보기 시작했다.

놈은 영리했다. 지닌 힘을 이용할 줄 알았고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놈이었다. 그 놈만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당장 화선노대만 해도 노회하기 이를 때 없었으니까.

나는 일단 마정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 생각했다.

우선 공수찬에게 오천 냥을 받았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데 정보상인을 이용해야 할 것을 예감한 것이다.

그는 용도를 묻지 않고 비상용으로 저축해두었던 돈을 내어주었다. 이래저래 내가 지니고 있던 돈까지 총 육천 냥. 이 돈을 아껴가며 사용할 생각이다.

한 가지 다행한 점은 놈이 양소방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양소방은 내 뒷마당과 같은 곳이다.

우선 그 돈 중에 천 냥을 들여서 상급 인피면구를 하나 샀다. 면구를 산 이유는 내 얼굴을 드러내고 양소방을 드나들 수는 없었고, 분명 면구가 필요한 일이 한 번쯤은 생길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면구에 방갓까지 눌러쓰고 양소방에 갔다. 미리 기별을 하고 갔기에 은밀히 정여를 만날 수 있었다.

“별채에 놈이 묵고 있어서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괜찮소.”

오히려 별채보다 더 신경을 쓴 장소다.

이곳은 정여의 침소가 있는 방 옆에 붙은 작은 방이었다. 원래는 호위무인들이 묵는 장소인데, 며칠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모양이었다. 자신의 침소 옆방이니 나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깨끗이 청소된 것은 물론이고 탁자의 찻주전자나 찻잔, 침상의 이불까지 모두 새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나를 위해 최대한 신경을 쓴 것이다.

“마정수는 무엇을 하고 있소?”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날 초대받았던 이들을 한 명씩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술상을 따로 봐달라고 말한 것을 보니 또 누군가를 만날 예정인 것 같습니다.”

“각개격파를 하고 있군.”

“그런 것 같습니다.”

아주 영리한 방식이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잔뜩 겁을 준 후에 따로 하나씩 불러서 달래는 것이다.

그냥 마구잡이로 돈이나 뜯는 얼치기 파락호 놈이 아니란 뜻이다. 확실히 머리도 잘 돌아가고 준비성이 있는 놈이다.

“그대는 어떻소?”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가 이곳에 버젓이 묵는다는 것은 이미 그대를 믿는 마음이 있다는 뜻 아니겠소?”

“믿는 척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오히려 압박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집에서 이러는데 감히 딴 마음 먹지 말라고.”

그는 내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원했다.

“벽공자가 아니었다면 저는 본방을 떠나 강호를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았겠죠. 그러다 비참하게 죽었을 테고. 제가 그리 선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은혜를 모르는 놈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고맙소.”

“별말씀을요.”

“놈의 움직임을 주시해 주시오.”

“걱정 마십시오. 이곳은 제 안방입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가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본방이 오랫동안 거래하던 만통회의 정보상인이 있습니다. 마정수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 미리 부탁해뒀습니다. 가시는 길에 들러서 확인해 보시지요. 대신 사람을

보낸다고 했으니 이것을 가져가시면 될 겁니다.”

그가 근처에 있는 만통회의 위치를 말해주면서 철패(鐵牌) 하나를 건네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정여 덕분에 돈을 쓰지 않고도 놈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남은 돈 오천 냥으로 놈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런 걱정이 한방에 달아난 것이다.

“고맙소. 내가 들은 정보는 그대와 공유하겠소.”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수하들에게 이 면구의 얼굴을 제 손님이라 말해두겠습니다. 철패를 보여주면 언제든지 본방을 자유롭게 출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시면 이 방에서 묵으십시오.”

“여러모로 고맙소.”

내가 그를 배려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나를 챙기고 있었다.

멀리 봤을 때,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투자일 것이다. 나 역시 은혜는 은혜로 갚는 사람이었으니까.

* * *

반 시진 후, 나는 정여가 알려준 만통회의 정보상인을 만나고 있었다. 물론 인피면구를 쓰고 방갓까지 눌러쓴 상태였다.

사내가 자신들이 조사한 바를 알려주었다.

“마정수는 마봉기의 스물두 명의 자식들 중 하나입니다.”

스물둘? 이 색광 늙은이가 정말 많이도 낳았구나.

“그들 중에서 후계자의 물망에 오른 이들은 모두 여섯입니다. 그 중에서 마봉기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단연 마철군(麻哲君)입니다. 현재 천도문의 임시문주직을 맡고 있지요. 마정수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중에서도  후계자가 될 가장 가능성이 낮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철군은 이름을 들어본 것 뿐 아니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마봉기의 아들답지 않게 똑똑하고 명석했으며 성격 또한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후계자 구도에선 밀려난 상태이지만 마정수는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아주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무공 역시 다른 후계자 못지않고요.”

“한데 왜 밀린 것이오?”

“그의 모친이 천도문의 시비였습니다.”

“배경이 없었군.”

“그렇습니다. 그는 혼자서 힘을 키워온 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속에 독기를 품고 자란 놈이란 뜻이었다.

“불행히도 그의 모친은 십여 년 전에 집에 화재가 나서 죽었습니다. 혈혈단신에 마정수 하나만 낳았기 때문에, 이제 마정수는 마봉기 이외에는 핏줄이라 부를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이곳에 내려온 진짜 이유에 대해 알고 있소?”

“무관을 차린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그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산동지역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전초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제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가장 알고 싶은 내용이기도 했다.

“이것이 마정수의 뜻이오? 아니면 마봉기의 뜻이오?”

단도직입적인 내 질문에 사내는 찰나간 망설였다. 이내 그가 말했다.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망설임으로 알 수 있었다. 맹주와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그가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을.

아직 임기 초창기인데다가 마봉기가 어떻게 강호를 운영해 나갈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뭔가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말해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따라온 고수들은 누구요?”

그는 화선노대와 시곤에 대해 알려주었다. 하지만 정작 그 여인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녀에 관해선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만통회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은 여인이라는 뜻.

그렇다면 천도문 내부의 인물은 확실히 아니고. 중요 인물 중에는 내가 모르는 이가 없으니 무림맹 사람도 아니고. 대체 어디 출신의 여인일까?

“본회가 알아낸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추가로 알아내는 것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소. 수고하셨소.”

정보상을 나온 내가 방갓을 눌러쓴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서두를 필요 없다. 하나씩, 하나씩 놈의 목줄을 끊어낼 약점을 찾아내는 거다. 내게 유리한 점도 있었다. 놈은 드러나 있고,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으니까.

놈이 각 파에서 뜯어간 돈만 수만 냥이다. 거기에 놈이 가져온 돈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기반을 다지러 왔다면 엄청난 자금이 동원될 것이다. 그 많은 돈을 산동의 문파들에게서 다 조달하진 못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군침이 돌았다.

강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울수록 뜯어먹을 살이 많은 풍성한 먹잇감이지 않겠는가?

골수까지 다 빨고 뼈는 갈아 마셔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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