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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불어온 바람인가(2)
다음 날 양소방에서 각 문파에 사람을 보냈다.
대상은 산동서열 이십 위까지 문파들이었다. 서열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없더라도, 힘을 겨루는 강호의 속성상 결국 서열은 나눠지게 되어 있었다. 산동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우리 가문에도 초대장이 왔다. 아무리 쇠락했다 하더라도 이십 위 내에는 들어 있었으니까.
초대장의 내용은 사흘 후 양소방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꼭 참석해 달라는 내용에 덧붙여 천도문에서 내려온 귀한 손님도 참석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봉기가 무림맹주가 된 상황에서는 반드시 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의중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우릴 부르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양소방도, 천도문도 아버지가 좋게 여기는 문파들이 아니었다. 뭔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신 것이다.
“아무래도 천도문에서 왔다는 사람이 관건인 것 같아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런 것 같소. 천도문은 본래 귀주(貴州)에 세력바탕을 두고 있소. 그들이 이곳 산동에 진출한 적이 없었는데.”
“회합에 나가보면 어떤 의도인지 알게 되겠지요.”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도 아버지를 따라 가겠습니다.”
“네가?”
“따라다니면서 하나하나 배워야지요.”
아버지는 겉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얼굴에 기쁨이 드러났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어머니가 기꺼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성큼성큼 다가와서 와락 안았다.
“장하다, 우리 아들.”
가끔씩 이 과격한 애정표현에 놀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
어머니의 품은 더 없이 따스했으니까.
* * *
사흘 후 아버지와 나는 양소방에 도착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산동서열 이십 위 문파의 수장들 모두 회합에 참석했다.
대청 입구에서 양소방주 정여가 초대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여가 우리 아버지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대협대의하신 벽문주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버지 역시 예의를 갖췄다.
“새 방주님의 명성이 산동을 울리고 있다고 들었소. 방주가 되신 것 축하드리오.”
문파 사이의 의례적인 축하서찰이야 이미 보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난 것은 정여가 방주가 된 이후 처음이었다.
“헛된 소문일 뿐입니다. 벽문주님께서 축하해 주시니 몸들 바를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정여의 극진한 예의에 아버지는 당황했다. 비록 방주가 죽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여전히 양소방은 산동에서 제일가는 방파였으니까.
물론 정여의 예의바른 태도는 나 때문이었다. 뒤에 내가 서 있는데 누구라고 함부로 대하겠는가?
정여가 내게도 한마디 건넸다.
“근래 벽공자의 소검대가 큰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들었네.”
“운이 좋아서 몇 가지 성과를 거뒀습니다.”
“강호의 일이 어찌 운으로 결정되겠는가? 너무 겸손할 필요 없네.”
“감사합니다.”
정여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특히 뒤에 줄을 서 있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식이 칭찬받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와 나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손님들이 와 있었다. 아버지가 한 명, 한 명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산동의 서열 이십 위 내 문파의 수장들의 얼굴을 외울 기회를 맞은 것이다.
오랜만에 내 기억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아버지가 해주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참석한 모두의 얼굴을 기억했다.
송가장의 송우경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자네가 올 줄 알았으면 화린이를 데리고 올 것을.”
그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나는 미소만 지어보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여기저기 모여서 웅성거리며 오늘의 이 회합에 대해 추측했다. 누구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반각쯤 지나자 문이 열리고 정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네 사람이 들어왔다.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선두에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볼 때 아마도 그가 마정수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서 내심 놀랐다. 마봉기 이 늙은이는 대체 몇 살까지 씨를 뿌려댄 것인
지.
그를 호위하듯 뒤따라 들어온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나도 아는 이들이었다.
우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바로 화선노대(花扇老大)였다.
그는 꽃이 그려진 화려한 철선(鐵扇)을 독문병기로 삼았는데 한 때 무림맹 원로원에 들어가려다 못 들어간 인물이었다.
당시 내가 허가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와 선동에 능한 인물인데다 권력욕이 강한 자였다. 다만 인간성은 별로일지 몰라도 실력 하나는 제대로인 자였다.
상대무기가 꽃이 그려진 부채라고 무시했다가 그것에 머리통이 깨져 죽은 고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십사 년의 내공을 가졌지만 나도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다.
늙은 생강들은 맵다. 그들이 꼬불쳐둔 비장의 한수는 정말 마지막 한수에 어울리는 수법들이다.
어쨌든 그가 천도문 일파와 어울리는 것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언제나 권력을 쫓는 자였으니까.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 옆에 함께 들어온 사십 대 중반의 사내는 천도문 내부의 고수였다.
이름은 시곤(柴昆).
언젠가 무림맹에서 주최하는 친선비무대회를 개최했을 때, 천도문에서 출전한 두 고수 중 한명이었다.
정말 인상적인 검법을 사용하는 인물로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그때가 칠팔 년도 훨씬 전의 일이니, 지금은 더욱 실력이 향상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젊지만 화선노대보다 고수라고 생각되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미녀였다. 어떻게 보면 어려보이고, 다르게 보면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녀 역시 상당한 실력이 느껴지는 강호인이란 점이었다. 한데 검이나 도를 차고 있지 않았다. 허리에 두른 혁대가 연검이 아니라면 권법을 사용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왠지 묘한 느낌의 여인.
이 비범한 세 사람만큼이나 마정수의 기도 역시 남달랐다.
앞서 산동 후기지수 연회에 모였던 애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는 산동의 애송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첫인상은 아주 나빴다. 일단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광두와 또래인데 눈빛이 사십대의 눈빛 같았다. 맑지 않았고 온갖 세파가 느껴졌다.
그들의 등장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긴장했다. 정말 천도문에서 사람이 내려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들 한 문파의 수장들이었지만 일대일로 붙어서 화선노대나 시곤을 당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기도에서 눌리니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정여가 간단히 인사의 말을 한 후에 마정수를 소개했다.
마정수가 단상위로 올라왔다.
“산동의 영웅분들을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양소방주님께도 감사드리오.”
그가 양소방주를 소개하듯 가리켰고, 자연스럽게 박수를 유도했다.
마정수는 이십 명의 문주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정중했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한 가지 알려드릴 일이 있어섭니다.”
잠시 시선을 모은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산동에 작은 무관을 하나 차릴까 합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장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모두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아무리 무림맹주가 자식이 많다 하더라도 그는 엄연히 맹주의 핏줄이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과연 그것이 작은 무관일까? 고작 작은 무관을 하나 세우려고 맹주의 혈육이 이 산동까지 왔을까?
백 번 양보해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일이 모두를 다 끌어 모을 정도의 일인가?
무관을 빌미로 문파를 세우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천도문의 산동진출인 셈이다. 직접 문파를 세우면 지역 방파의 직접적인 반대에 부딪칠 테니까, 강호여론을 생각해서 무관을 세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속셈이 있을 테고.
“여러분들께서 저를 조금 도와주셨으면 하오.”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도와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국 돈을 뜯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청송문주(靑松門主) 곽태(郭泰)가 나섰다.
“하하하, 당연히 저희가 도와 드려야지요.”
그가 웃으며 나서자 그와 친한 구룡방주(九龍幇主) 석문도(石紋都)가 함께 나서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마대협이 내려오셔서 산동에 기틀을 잡으신다면 우리 산동의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산동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곽태와 석문도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회합 이전에 청송문주는 이미 마정수와 만났고, 그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다시 곽태는 석문도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물론 순서가 바뀌어 석문도가 곽태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고.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분위기가 썰렁했다.
마정수가 장내를 한 번 둘러보더니 우리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버지와 송우경은 다른 수장들처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 벽씨검문의 벽대협 아니십니까?”
마정수가 갑자기 아버지를 지목했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데 얼굴을 알아보자 아버지는 살짝 당황했다.
“맞소. 내가 벽씨검문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오.”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렇게 정중히 물어오니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으리라.
“체기가 있어서 속이 좀 좋지 않습니다.”
“저런. 그러셨군요.”
마정수가 단상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야말로 불길한 기운이 몰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 앞까지 오더니 마정수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손가락 크기의 작은 약병이었다.
“이것을 마시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
아버지가 당황했다.
아니, 사실은 내가 더 당황했다. 그 약이 무엇인지 알고 함부로 마신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아버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나는 똑똑히 보았다. 웃고 있는 마정수의 눈동자에 깃든 어떤 악의를. 그것은 보통 사람은 결코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온갖 악인들을 경험해본 나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웃음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지독한 차가움이었다.
마정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이쿠!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급한 마음에 약을 잘못 꺼냈습니다. 이 약은 맹독이었습니다. 해약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어서 드셨다면 낭패를 당하실 뻔 하셨습니다.”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아버지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마정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한때 명성을 날리셨던 벽씨검문의 문주님다우십니다.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항상 신중하고 조심해야하지요. 오늘 제가 크게 배웠습니다.”
너무나 정중한 태도로 말해서 이것이 실수인지 협박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자신에게 까불면 독살할 수도 있다는.
하지만 놈의 협박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놈이 나를 슥 쳐다보았다.
“아드님이신가요? 훤칠하니 잘 생겼군요. 하하하.”
아버지의 표정이 더욱 굳어지며 신형이 파르르 떨렸다. 맹독이니 어쩌니 하다가 나를 지목한 이유야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까불면 가족까지 죽일 수 있다는.
옆에 있던 송우경이 나서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하면 어디에다 무관을 지으실 생각이십니까?”
아버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나서기라도 하면, 불리한 쪽은 당연히 이쪽이라 판단을 내린 것이다.
마정수가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앞서 실수는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무관은 제남 외곽에 지을 작정입니다. 적당한 규모로 시작해서 점차 늘려나갈 생각이고…….”
그가 무관에 대해 세부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송우경이 탁자 아래로 아버지의 손을 한 번 잡아 주었다. 잘 참았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협박하기 위해 우리 아버지를 본보기로 삼았음을. 그것도 아주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아버지가 어떤 대답을 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놈은 애초에 아버지
를 희생해서 분위기를 휘어잡을 작정을 하고 왔으니까.
내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 개새끼가 감히 우리 아버지를 건드려? 그것도 나까지 걸고넘어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