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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불어온 바람인가?(1)
서종회를 없애고 우리 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오히려 외부에는 야수대를 없앴을 때보다 화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흑회였으니, 서종회란 흑회를 막은 정도로 알려진 것이다.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외부의 명성보다는 내실이 중요한 때였으니까.
이번 일로 검대 내부의 결속이 더 단단해졌다.
내부를 결속시키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큰 영향을 발휘하는 것이 수장의 역할이고 모습이다.
수장이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거나, 앞서처럼 강력한 힘을 보여주면 조직의 중심이 확고해지면서 내부는 더욱 단단해진다.
따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은, 그 역시 가치 있는 일이었으니까.
관휘가 와서 소식을 전했다.
검대원들이 모이면 대주님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한다고. 새벽 훈련에 합류한 인원이 부쩍 늘었다고도 했다.
이번에 내가 보여준 모습이 검대원들에게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된 모양이다.
비도술을 배우려고 다시 칠팔 명의 인원이 찾아왔다. 앞서 배웠던 사람들까지 치면 거의 모든 대원들이 배우러 온 것이다.
나는 흔쾌히 그들에게도 비도술을 가르쳐주었다. 열의에 차서 먼저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뒤늦게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배우러 오지 않은 몇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런 사감이 없다. 배우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지.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넓은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광두는 정말 열심히 했다.
비도술만 해도 관휘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더 빠른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휘가 덜 노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타고난 재능이 광두가 더 뛰어났던 것이다.
배운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광두는 이십 보 밖에서 세 개를 던지면 한 개가 정확히 과녁을 적중했다. 이 기세면 한두 달 내로 세 개가 다 적중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결국 우려했던 사건이 터졌다.
우리 소검대의 무인과 기존 검대의 무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한바탕 싸운 후였다.
서로 치고받은 모양인데, 얼굴이 더 상한 쪽은 우리 쪽이었다. 양쪽 검대원들이 와서 말리는 바람에 지금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선배면 다요?”
“이 새끼가 아직도!”
“엄밀히 따지면 우리 선배도 아니잖아?”
이 괄괄한 녀석의 이름은 양구(陽球)였다. 표사출신이었던 그는 나이도 꽤 있는데다가 표국에서 잔뼈가 굵다 보니 성정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등장하자 날뛰고 있던 양구가 고개를 숙이며 얌전해졌다.
“일단 먼저 한 마디 하자면 저 사람은 네 선배가 맞다. 저들이 벽씨검문의 본검대고 우린 소검대니까. 알겠나?”
양구가 힘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본 검대쪽 무인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이런 부분들은 아주 민감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무슨 일로 싸웠나?”
양구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두 번 물어야 하나?”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는 누가 잘못했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왜 싸웠는지를 물었다.”
“그게…… 제가 딴 곳을 보고 걷다가 저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습니다.”
“그럼 앞을 안 보고 걸은 자네 잘못이었군?”
“네.”
“그런데 왜 싸웠나?”
“사과를 하려는데 먼저 욕을 했습니다.”
내가 이번에는 본래 검대의 무인에게 물었다.
“그랬나?”
“그리 대단한 욕은 아니었습니다.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 한마디였습니다.”
내가 다시 양구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는데?”
양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얼굴을 봤는데…… 저 사람이 예전에 제 동료를 죽인 녹림을 닮았습니다.”
그러자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맙소사 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양구와 싸웠던 무인은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미친 놈 아니야?”
솔직히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양구의 처진 어깨에서 동료를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통함을 보았다.
내가 양구와 싸웠던 무인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까? 이 미친놈과 더 싸워보겠나? 아니면 사과하라고 할까?”
“아닙니다. 됐습니다.”
무인이 돌아섰다. 미친놈이라고는 했지만, 동료를 잃었다는 말에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으리라.
함께 있던 이들이 모두 흩어지고 양구와 나만 남았다.
“어떤 친구였나?”
“함께 표사가 되었던 동기였습니다.”
“그랬군.”
“그 친구는…….”
양구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 저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 날 너무 피곤해서 제가 일어나지 못 했습니다…… 친구는 나를 생각해서 좀 더 자라고 혼자 불침번을 서다가…….”
양구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양 주먹을 꽉 쥐었고 어깨와 등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비는 내려주지 못할망정 어떻게 이렇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을 수 있을까?
양구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인 겁니다.”
가만히 고개 숙인 녀석을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그럴지도.”
양구의 떨림이 더욱 커졌다.
내가 차분히 말했다.
“너도, 나도 혹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길 수 있겠지.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양구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보았지만 못 본 척 말했다. 우는 남자를 붙잡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네! 달게 받겠습니다.”
“내공 사용하지 않고 연무장 오십 바퀴 돈다!”
“네!”
양구가 연무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를 이해했지만 이렇게 벌을 내린 이유는 본인을 위해서였다.
벌을 제대로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싸웠던 무인은 물론이고 그들 동료들까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것이다. 이 정도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아니었으니까.
양구가 연무장을 달리는 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달리고 있겠지.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 오랜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잃었었기에. 저 참을 수 없는 상실감이, 더 많은 사람들을 잃으면서 점점 무뎌가는 비참한 경험까지 했다.
언젠가 양구가 나를 찾아와 술 한 잔 하자길 바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이 풀어지면 좋겠다.
* * *
공수찬이 기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생각지 못한 투자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천이백 냥을 기대했었는데 사천오백 냥의 수익을 거뒀습니다. 일전에 동평상회에서 얻은 부수입까지 고려하면, 내년에 사십 명이 아니라 팔십 명도 새로 뽑을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오, 참으로 잘 된 일이오.”
나는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과는 별개로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대원은 예정대로 사십 명만 더 뽑을 생각이오.”
내 말에 공수찬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시오?”
“욕심을 내지 않으셔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기뻐서 달려오긴 했지만 저도 그러시길 바라고 있었나 봅니다.”
그건 내가 그에게 할 소리다. 무리한 투자가 아니라 차분히 돈을 늘려주고 있어서.
늙은 말이 콩을 더 달란다는 말이 있다. 늙을수록 욕심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맹주 시절 숱한 노욕(老慾)들을 봐 왔다. 대표적으로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그러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욕심들.
나 역시 비슷한 나이였기에 그렇게 될까 스스로를 경계했다.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욕심은 다른 것이다.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발전할 것이다.
공수찬에게 당부했다. 너무 무리한 투자는 하지 말라고. 항시 안정적으로 분산투자를 하라고.
“천천히 한걸음씩 가도 되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오.”
공수찬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와 나의 관계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 * *
구월을 며칠 앞둔 팔월의 마지막 햇살 아래 검대원들이 검을 휘두르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옆에서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대가 만들어진지 오 개월째 접어들었다. 나의 집중적인 관리 덕에 우리 소검대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만들어진지 몇 년은 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실제로도 몇 년 된 검대 못지않은 실력과 단결력
을 발휘하고 있었다.
야수대와 동평상회의 임무 이후에도 우리 검대는 세 번의 임무를 더했다.
한 번은 내가 따라 갔고 다른 두 번은 검대원들만 보냈다. 검대원들끼리 임무에서 몇 명이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무사히 마쳤다. 물론 돈도 벌었다. 세 임무에서 벌어들인 돈은 사천오백 냥. 적지 않은 돈이다.
돈도 돈이지만 이 실전임무들은 검대원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실전을 경험하면서 검대원들은 소속감을 느꼈고 실력을 향상 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실력 없는 자부터 먼저 죽는 것이 강호의 생리임을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나에 대한 존경심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고.
내 개인의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내공을 쌓기 시작한 지난 오 개월 동안 나는 사 년 치의 내공을 쌓았다. 이제 이십사 년의 내공을 지니게 된 것이다.
목표인 일 갑자 내공까지는 삼십육 년.
이대로라면 앞으로 사 년이면 채울 수 있다. 운이 좋아서 영약이라도 한 뿌리 하게 되면 훨씬 더 당길 수도 있을 것이고.
내공뿐만 아니라 체력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고, 가문의 무공인 백월검법과 내 독문무공인 추혼수라검법 초반 세 초식은 이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가끔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이제 객잔에서 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거니 싶다가도 왠지 모를 씁쓸함이 들었다.
그래, 좋다. 다들 그렇게 잊혀가는 거지, 이런 마음으로 이해를 한다손 치더라도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마봉기가 무림맹주가 되었는데 누구 하나 걱정하는 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있는 것이지 싶을 정도로. 맹주였던 내가 보는 강호와 일반 사람들이 보는 강호는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좋은 쪽으로 풀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천하진은 진짜 죽었다고.
나는 이제 진짜 벽리단이다.
그래, 말년의 나는 틀 속에 갇혀서 화석처럼 살았다. 이젠 새롭게 살아야지.
불어온 바람이 이젠 선선하다.
여름이 다 가고 있었다.
* * *
폭풍의 징후는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양소방주 정여가 은밀히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번에 천도문에서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천도문에서?”
“마정수(麻庭修)라고. 마봉기의 아들 중 하나입니다.”
워낙 자식들이 많아서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한 가지 알 수 있는 일은 그들 내부의 후계자 싸움의 성격이 달라졌으리란 점이다.
정식 후계자가 되면 천도문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무림맹을 이어받게 될 테니까. 더 치열하고 살벌해 졌을 것이다.
“마정수가 산동지단주를 만나서 이곳 문파의 수장들을 다 모아달라고 한 모양입니다.”
“이유는?”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정여가 말꼬리를 흐렸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목적일 리는 없겠지.”
언제나 그렇듯 좋은 목적이라면 방법이 꺼림칙할 리가 없다. 벌써부터 마봉기 일파가 강호에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다.
“산동지단주는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고?”
“네.”
“산동지단주는 어떤 사람이오?”
“제가 알기로 상당히 청렴한 인물입니다.”
그래, 어디 무림맹 무인들이 공종 같은 썩어 빠진 자들만 있겠는가?
“이후에 마정수가 본방을 찾아왔습니다. 연회를 열어달라고 압박을 가하더군요.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한 후에 곧장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잠시 고민한 후 내가 말했다.
“열어준다고 하시오.”
어차피 양소방이 아니라면 다음 차례는 송가장이었다. 거절해도 문제, 거절하지 않아도 문제다. 차라리 어느 정도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양소방 선에서 처리하는 것이 낫다.
“알겠습니다.”
“방주께선 양소방을 확실히 장악했소?”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에는 직접 올 필요 없소.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도록 하시오. 그대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믿겠소.”
이런 말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크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 마디 말로 두부 같은 충성심을 강철로 변화시키는가 하면, 있던 정마저 뚝뚝 떨어질 수도 있다. 정치의 핵심은 말(言)이다.
“혹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
“알겠소.”
처음 정여를 방주로 세울 때 까지만 해도 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정세를 볼 때, 양소방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당장 이번 일만 해도,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돌려보내고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태풍의 징조일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바람일까?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