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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속으로(2)
갈사량은 방안의 작은 창으로 햇볕이 내리쬐는 빈 연무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사방 책장에 책들이 가득 꽂힌 다섯 평 남짓 좁은 방이었다. 이곳은 일반 군사의 집무실이었다. 예전 총군사 집무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좁은 공간이었다.
정의각에는 총군사 이외에 여덟 명의 일반 군사가 있었는데 갈사량은 그 한 명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갈사량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때 누군가 인기척도 내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뭘 그리 보고 있나?”
갈사량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들어선 사람은 새로 총군사가 된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이 걸어와서 갈사량이 쳐다보던 작은 창문을 내다보았다. 빈 연무장에는 뜨거운 열기만이 가득했다.
“이제 날이 덥군.”
“네, 이번 여름은 상당히 더울 것 같습니다.”
“참으로 사람 인생은 알 수 없지? 예전에는 자넬 만나기 위해 대기실에서 세 시진을 기다렸었는데. 그렇게 기다려서 자넬 얼마동안 만났는지 기억나나?”
갈사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 반각이었네. 장장 세 시진을 기다리게 해놓고 고작 반각의 시간을 내어주더군.”
갈사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날이 생생히 기억났다.
당시 사마천은 천도문 일파를 대신해서 자신을 방문했었다. 천도문이 추진하는 사업의 독점권을 인정해 달라는 청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사마천은 넌지시 뇌물을 주겠다는 운을 띄웠다. 커다란 장원을 몇 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액수였다. 자신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딴 수작이라니? 액수가 크면 받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으리라. 아무튼 짜
증이 나서 빨리 자리를 물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일은 죄송합니다. 당시 너무 바빠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마천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해하네.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보니 일이 참 많더군.”
“총군사님의 너른 아량에 감복했습니다.”
“자네가 정의각에 남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내가 거절했다면 쫓겨나야 했었다는 것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그 점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왜 남으려는 것인가? 남아서 새로 총군사가 된 내게 복수라도 하려는 것인가?”
사마천의 노회한 눈빛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갈사량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감정이 격해진 갈사량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그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생을 무림맹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 일 이외에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정의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사마천의 두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이해하네. 내가 자네라도 마찬가지였겠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좋네, 아주 좋아.”
사마천이 그곳을 나갔다.
한껏 상기되어 있던 갈사량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입가에 지어지는 차가운 조소.
웃기는 소리다.
이제 무림맹은 지긋지긋하다. 당장이라도 이 좁은 곳을 떠나고 싶었다. 백표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은 데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맹주님은 암살당한 것이 틀림없다.’
하루아침에 중요삼단 중 광월단주와 철기단주가 배신을 할 리가 없다. 그들을 포섭하고 회유한 자들은 아주 오랜 세월 공을 들였을 것이다.
맹주님을 죽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겠지.
아마 신의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어떤 수법을 사용했으리라. 아니면, 무림맹의 신의조차 그들의 편일지도 모르지.
밝혀낼 것이다. 누가 맹주를 죽인 것인지.
그래서 복수할 것이다.
평생을 몸 바친 일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평생 강호를 위해 헌신한 맹주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마천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전대 맹주의 총군사란 존재는 제거를 해버리는 것이 마음이 편할 테니까.
하지만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자신이 가진 인맥과 정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마봉기를 반대했던 모든 조직의 수장들이 바뀌었다. 날개며 손발까지 모두 잘린 형국. 그렇게 위험하다고 느끼
진 않을 것이다.
대롱을 꽂아 골수까지 빨아먹을 생각을 하겠지.
그래, 당분간은 빨려주마.
그들이 그러했듯이 자신도 시간을 들일 것이다. 흉수를 알아내고, 그들을 물리칠 힘을 키울 것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그때까지 참고 견딜 것이다.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 * *
임무에서 돌아온 이후 광두가 변했다.
부쩍 옷차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옷 제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네가 고른 무복이지 않느냐?”
“그때 도련님 무복 색으로 살 걸 그랬어요.”
“이놈아, 나를 존중하는 뜻으로 안 산 거잖아?”
“실수였어요!”
변화의 이유가 밝혀졌다.
앞서 야수대의 습격에서 광두는 네 명을 죽였다. 그 과정에서 검대원을 한 명 구했는데 바로 이번에 들어온 두 여인 중 하나였다.
이름은 도순(度順). 나이는 스물 하나. 그녀는 귀엽고 아담했다.
문제의 발단은 그녀가 고맙다는 뜻으로 작은 비수 한 자루와 검을 손질하는 숫돌을 선물로 준 것이다. 보통 무인들 사이에 선물로 주고받는 것들이었다.
“이건 보통 선물이 아니에요.”
“자결하라고 준 것 아닐까?”
“장난은 사절입니다. 저 진지하다고요.”
정말 광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저는 무슨 선물을 해야 할까요?”
“너는 왜? 살려줘서 고맙다고 준 선물인데.”
“받았으면 해야죠.”
“그걸 빌미로 그녀와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러지?”
광두가 흠칫 했다.
“아닙니다. 이건 예의의 문젭니다. 도리의 문제라고요!”
“후후후.”
“아니라고요!”
아니긴. 지금 네 놈 얼굴이 홍시처럼 붉다.
하긴, 스물다섯.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겠는가? 녀석아, 잘 해 봐라.
광두는 그녀 덕분에 혹시나 있었을지 모를 첫 살인의 부작용을 잘 넘기고 있었다.
* * *
다음 날, 관휘와 칠팔 명의 검대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비도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야수대를 상대하며 내가 보여줬던 비도술에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검대원들 중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함께 가서 배우자고 주도한 사람은 관휘일 것이다.
“내가 비도술에 전문가는 아니다만 기초는 가르쳐줄 수 있지.”
모든 무공은 하나로 통한다고, 검술의 극의를 이루니 다른 무공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비록 검술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비도술은 물론이고 도법, 권법, 창법등 대부분의 무예에 조예가 깊었다. 따라서 기초라고 하기에는
너무 겸손한 말일 것이다.
검대원들에게 창고에서 수련용 비도와 과녁을 가져오게 했다.
연무장 한 옆에 과녁을 세운 후 그들 앞에 섰다.
“강호에는 비도술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고수들도 있다. 사실 그들은 굉장히 무서운 존재다. 생각해 봐라. 백 보 떨어진 작은 점도 정확히 비수를 던져 맞히는 고수가 서너 자루의 비수를 동시에 던진다면? 여러 급소를 동시
에 던진다면? 내가 피할 곳까지 미리 예상하고 던진다면?”
생각만 해도 두려운지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 정도가 되려면 오랜 세월을 수련해야지. 물론 비도술에도 단점도 있다. 근접전이 벌어지면 가장 약한 것이 비도술이다. 게다가 상대가 검기라도 발출하면 꼼짝 없이 당하게 된다.”
물론 비수로 강기를 일으키는 고수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고수들을 상대해 보기도 했다.
혈천신교의 사대호법 중 일인이었던 십비무혼(十匕無魂) 광후(光侯).
정말 적으로는 그만큼 까다로울 수가 없었다. 한 번 던지면 비수가 열 자루씩 날아왔다. 나중에는 어디서 그 많은 비수가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비수에 강기를 머금게 할 수 있는 고수였다.
정말이지 그와의 싸움 역시도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 혈투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놈을 죽였을 때는 몸에 비수가 두 개나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비도술의 고수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처음에는 익히기 쉽게 느껴지지만 가면 갈수록 어려운 것이 비도술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비상시에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맞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관휘가 큰소리로 대답했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비도술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비수를 어떻게 쥐어야 하며, 호흡은 어떻게 하고, 또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자, 던져봐라.”
검대원들이 일렬로 서서 과녁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대부분 빗나갔는데, 관휘만이 과녁의 끝부분을 맞혔다.
“정신을 집중해라. 비도술은 집중력이 생명이다.”
“네!”
다시 검대원들이 비수를 던졌다.
반복해서 던질수록 점점 과녁에 맞히는 숫자가 늘어났다.
비수를 다룰 줄 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상당한 이점을 지니는 셈이다.
“삼십 보 떨어진 곳에서 연속해서 세 번 이상 적중시킨다면, 다음 단계로 내력을 주입해서 비수를 던지는 법을 알려주겠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고맙긴. 난 더 나아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네!”
우렁찬 대답과 함께 검대원들이 수련을 시작했다. 반 시진쯤 더 머물면서 자세를 잡아주고 가르쳐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귀찮지 않느냐고?
전혀.
예전에 안 해 봤던 일이라서 그런가? 오히려 나는 내가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내 무공에도 도움이 되고 있었다. 정점을 찍었던 자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건 이런 것이다.”
어떤 내용을 확신에 차서 가르친 후, 그날 밤에 곰곰이 떠올릴 때가 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예전에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이 불쑥불쑥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알지 못한다. 이런 변화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다만 이들을 가르치는 내 의도가 선했기에, 결과도 좋게 나올 것이라 믿을 뿐이다.
* * *
오후가 될 때까지 광두 녀석이 보이지 않아서 녀석의 방을 찾아갔다.
그는 탁자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너 글도 쓸 줄 알아?”
“헐.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닙니까?”
“대단해서 그래.”
우리 집안뿐만 아니라 대부분 종복들은 글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제가 도련님을 그냥 모시게 된 거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똑똑했었구나.”
“그럼요. 제가 제일 똑똑했죠.”
무공에 대한 재능도 어쩌면 이 영특함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뭘 그리 쓰느냐?”
“도소저에게 쓰는 서찰입니다.”
“도소저? 설마 도순이?”
“도순이라니요? 대주라고 남의 여자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남의 여자? 그 남이 혹시 너냐?”
“이 서찰에 달렸지요. 제가 될지, 정말 남이 될지. 아, 선물은 샀는데 서찰을 뭐라고 써야할지를 모르겠어요!”
광두가 머리를 싸맸다.
“서찰도 주게?”
“도소저 앞에 서면 말이 잘 안나와서. 이렇게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요.”
“선물은 뭘 샀는데?”
“이것이요.”
광두가 산 선물은 검 손잡이에 다는 수실이었다.
“전에 도소저 검을 보니까 없더라고요. 혹시 검을 잡는데 방해가 될까봐 짧은 것으로 샀어요. 어때요?”
“귀엽네.”
“정말요?”
내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수가 되면 될수록 검에 저런 장식을 달지 않는다. 아무리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싸우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광두가 산 것은 수실이 짧아서 검을 잡을 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 저것 때문에 검술에 위화감을 느낄 정도의 실력도 아니니, 그냥 애교로 봐줘도 되는 것이다.
“이제 서찰만 쓰면 돼요. 절 위해 한 마디 조언을 해 주신다면요?”
“다 부질없다.”
“참으로 큰 도움 되는 말씀이네요. 방해마시고 저리로 가요!
방을 나가기 전에 한 마디 해주었다.
“연서(戀書)의 생명은…….”
안 듣는 척 했지만 광두의 귀가 쫑긋해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네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해.”
녀석의 귀가 빨개졌다.
피식 웃으며 방을 나왔다. 광두의 이 한 여름날의 사랑이 어찌될지 궁금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놈, 첫사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