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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1)
광두는 후원에서 수련중이었다.
녀석은 가르쳐준 남해칠식의 세 초식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광두의 몸놀림에서 재능이 있음을 느꼈다. 천재적인 재능까진 아니더라도, 타고난 재능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가 환생한 내 눈에 띈 것도 어쩌면 저 재능이 나를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련에 열중한 광두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알지 못했다.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내가 수련하던 때가 생각났다.
내 수련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던가?
그때는 정말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강호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나를 가장 크게 성장시킨 것은 ‘간절함’이다.
나의 그것이 어중간한 무인은 되지 않겠다는 간절함이었다면 과연 광두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놈아! 자객이 열 명은 왔다가도 모르겠다.”
“어? 언제 오셨어요?”
“농땡이 치나 안치나 감시하러 왔지.”
“저 하는 것 보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광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땠습니까?”
녀석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총명한 녀석인데다 무공에 대한 감이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나머지 네 초식을 가르쳐 주마.”
“아!”
광두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번졌다.
녀석에게 나머지 네 초식을 가르쳐 주었다. 앞의 세 초식을 배웠을 때처럼 정확하게 동작을 익혔다.
녀석은 알기나 알까? 강호의 그 누구도 이렇게 수준 있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사람이 나기에 남해칠식이라는 제법 대단한 무공을 이렇게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남해칠식은 모두 전수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같은 무공이라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이란 말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칼로 수련해라.”
“헉! 저 주려고 사 오신 겁니까?”
“그래. 전에 네가 샀던 것은 버려라.”
돌아오는 길에 철방에 들러 그곳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으로 한 자루 사왔다. 아주 비싼 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싸구려도 아니었다.
“도련님!”
그대로 뒀다간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라 내가 재빨리 말했다.
“됐고. 도를 한 번 뽑아 봐라.”
광두가 도를 뽑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도련님이 사주신 거라 그런지 느낌이 완전 달라요. 보도를 들어도 이런 기분이 안 날 거예요.”
“그건 안 들어봐서 하는 소리고.”
명검이나 보도는 특별하다. 들어보면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만듦새 자체가 다르니까.
손잡이를 잡으면 손에 착 감긴다. 완벽한 무게 배분이 주는 안정감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단단한 느낌까지. 정말이지 그것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뭐든지 벨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보검과 명도란 바로 그런 것이다.
뭐 일이 잘 풀린다면 언젠가는 광두도 보도 한 번 쥐게 될 날이 오겠지.
“우선 도를 잡은 네 손에 집중해. 이제부터 그게 밥 먹는 젓가락보다 더 소중한 거다.”
“넵!”
“지금은 칼날이 무서울 거다. 하지만 그 칼날과 친해져야 한다. 그것이 네 목숨을 구하고, 네 친구의 목숨을 구해줄 거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말에 광두의 떨림이 차츰 잦아들었다.
“목표는 도신합일(刀身合一), 도가 너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이 어떤 뜻입니까?”
“너는 생활하면서 몸에 팔이 달려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없죠.”
“그런 거다. 도를 들고 있는 것에 전혀 위화감이 없어야 한다는 거다. 칼이 팔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체 이런 말들, 어느 책에 나오는 말인가요? 남해칠식 비급에 있는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요놈아, 천하제일인이 친히 전하는 말이다.
“나 간다. 수련해.”
“네!”
돌아서던 내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넌 누군가를 싫어해 본 적 있냐?”
광두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자식아! 나 말고.”
그제야 광두가 배시시 웃었다.
“음. 양기강, 그 놈 싫었죠.”
“그렇지? 싫다는 말은 그런 것이지?”
“왜요?”
“아니다.”
“누가 도련님 싫데요? 아, 질문이 잘못되었구나. 어차피 다 싫어할 테니. 그래서 얼마만큼 싫대요? 죽을 만큼?”
말을 하면서 광두가 지레 멀찌감치 달아났다.
내가 혼난다며 주먹을 흔들어보이자 녀석이 낄낄대며 웃었다.
아마도 갈사량이나 백표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평생을 떠받들어지는 삶을 살아온 나다.
내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두려워했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극진한 예의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게 행복했느냐고?
한 때는.
한 때는 그것이 나를 증명하고 드러내는 힘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그건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인생의 방식이었다. 그들과도 이렇게 격 없이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
걸어가는데 멀리서 광두가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도련님에 대해 알게 되면 좋아하게 될 거에요.”
이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 * *
송우경이 벽씨검문을 방문했다.
사전에 기별이 없었던 친우의 방문에 벽도준은 내심 긴장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냥 보고 싶어서 왔네.”
“잘 왔네. 그렇잖아도 술 한 잔 생각이 나던 참이었다네. 어떤가?”
“좋지.”
이제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오랫동안 교류를 맺어온 두 사람이었다. 벽도준은 송우경이 고마웠다. 가세가 기울었음에도 파혼하지 않으려는 것만 해도 친구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벽씨검문이 한창 형편이 좋지 못할 때, 송우경은 몇 번이나 돈을 빌려주려고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친구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끝내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 역시 너무나 고마웠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의 술을 마셨다.
“맹주가 죽고 나서 강호가 들썩이고 있네.”
송우경의 말에 벽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오랫동안 한 사람이 다스리던 강호였으니까.”
맹주 이야기로 운을 뗀 송우경이 본론을 꺼냈다.
“며칠 전에 도순경(度淳京)이 찾아왔네.”
“도순경이?”
도순경은 산동상회(山東商會)의 회주였다. 산동상회는 산동에 있는 상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산동을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뭐라고 하던가?”
“자신들이 지지할 테니 산동의 여러 세가들을 규합해서 산동연합(山東聯合)을 만드는 것을 제안을 해왔네.”
“산동연합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벽도준은 깜짝 놀랐다.
“전대 맹주가 무림문파의 연합구성을 금지하지 않았나?”
연합체들이 생겨나면 여러 분쟁들이 발생한다고 천하진이 엄금했던 일이었다.
“그 전대 맹주는 이제 없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미 다른 지역에서는 연합체들이 생겨나고 있다더군. 새 맹주가 정해지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지. 새 맹주가 뽑히더라도 아무래도 임기 초반에는 중원에 영향력이 약할 테니까.”
벽도준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자신은 정치적인 움직임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네. 일단 본장과 산동상회가 전략적인 제휴를 맺은 후에 차차 한 문파씩 규합해 나가자고 하더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자네를 찾아온 거네.”
도순경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운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단번에 거절했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를 이해했다. 벽도준이 그의 입장이라도 솔깃했을 제안이었다.
무림문파에서 중요한 것이 여럿 있겠지만 세력을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현재 송가장에 자본이 합쳐진다면 단숨에 산동제일문파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양소방 때문이기도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들의 방주가 죽고 부방주인 정여가 방주가 되었네. 정여는 내부를 다스린다고 외부를 살필 겨를이 없을 것이네. 본장이 산동제일로 올라설 절호의 기회지. 물론 자네가 도와줘야겠지만.”
겸손의 말이었다. 송가문은 산동에서 양소방 다음의 세력을 가진 곳이었다. 굳이 벽씨검문이 돕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산동제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했다네.”
“이해하네.”
무림 문파를 이끄는 입장에서 한 지역의 패자가 되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이었다. 벽도준 자신은 이미 한 번 올라서 봤다.
“나야 자네 뜻을 존중하고 적극 돕겠네. 다만 한 가지는 염두에 둬야할 것이네. 그들과 손을 잡는 순간, 지금까지 겪지 못한 많은 일들이 생길 것이네.”
“그건 각오하고 있네.”
“언제까지 말해주기로 했나?”
“며칠 생각해 본다고 했네.”
송우경이 술잔을 비우며 덧붙였다.
“하루가 다르게 강호가 급변하고 있네.”
송우경은 떠나기 전에 나를 찾아왔다.
“잘 지냈나?”
“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직은 참 어색한 사이다. 아직 파혼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그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예비 장인이기도 했다.
“자네가 한때 방황한 것 나도 알고 있네.”
“죄송합니다.”
“아니네. 젊어서의 방황이 한때의 열병처럼 지나간다면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나중에 올 방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이렇게까지 좋게 생각해주는 그가 참 고맙다. 물론 아버지와의 우정에서 비롯한 것이겠지만. 나는 두 사람의 우정이 참 부럽다. 전생의 나는 가져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화린이는 만났나?”
“네, 우연히 한 번.”
“우연히? 혼약한 사이에 그래서 쓰나?”
“죄송합니다.”
“혹시 아직도 그날 린이가 파혼하잔 말에 신경을 쓰고 있나? 그냥 여자 애들의 변덕 같은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네!”
“저는 린이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혼인만큼은 본인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고요.”
송우경이 그 우락부락한 인상으로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담담히 그를 응시했다. 적어도 그녀와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괜한 기대감을 가지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난 자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송우경이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가고 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냥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라고 하시지, 뭘 그리 고지식하게 말씀하십니까?”
“넌 그렇게도 내가 송소저와 잘 되었으면 좋겠냐?”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왜?”
“왜라니요? 전에도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예뻐서라고. 까놓고 얘기해서 예쁘기만 합니까? 집안 좋죠, 똑똑하죠, 장인될 분 인품 좋죠. 여기서 뭘 더 바랍니까? 제가 볼 때 도련님은 전생에 강호라도 구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나 전생에 강호를 구한 것도 같은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한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잖아?”
“뭐요? 성격요? 저 정도로 완벽한데, 성질 좀 있으면 어때요? 저 정도 완벽한데 성질 없는 것이 이상하지. 참고 사세요!”
“사랑이 없잖아.”
내 말에 광두가 흠칫 놀랐다.
“우린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아니요.”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도련님이 진짜 철이 든 것 같아서요. 조금 전에는 진짜…… 어른 같았어요.”
내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한데 왜 왔어?”
그제야 광두가 잊고 있었던 용건을 전했다.
“참,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