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죽음이 전하는 말(2)
갈사량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루고 미루던 맹주의 죽음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맹주가 죽다니. 살해당한 것이라 확신했다.
곧바로 신의를 불러서 시신을 부검했다.
하지만 어떤 이상한 점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자연사로 판명이 난 것이다.
맹주가 죽던 날 그의 행동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죽음과 연결될만큼의 이상함은 아니었는데.
천하진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너무 허탈해서 그의 시신을 보고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슬픔을 곱씹으며 제대로 슬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밀려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들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차기 맹주를 뽑는 일이었다. 맹주는 죽었어도 무림맹은 돌아가야 했으니까.
“더 이상 투표를 미룰 수 없소.”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갈사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갈사량이 뒤로 돌아섰다.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는 그 자체로 잘 벼려진 검 같은 사내였다. 찻잔을 들고 있지만 검을 들고 있는 것만큼이나 위험해 보이는 사내.
그는 바로 무림맹 십대조직의 수장들 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십대조직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우선 오직 맹주 직속 기관으로 맹주의 명령만을 따르는 세 개의 조직이 있었다.
첫째가 광월단(光月團), 두 번째가 철기단(鐵騎團), 세 번째가 천궁단(千弓團)이었다. 이들을 무림맹 중요삼단이라 불렀다.
광월단은 다양한 병장기를 사용하는 고수들이 모인 조직으로 하나하나의 무공수위가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열 개 조직 중 유일하게 그 숫자와 규모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기도 했다.
지금 차를 마시고 앉아 있는 사내가 바로 광월단의 수장인 주철룡(周鐵龍)이었다.
다음으로 철기단은 말 그대로 철기부대였다. 철갑을 두룬 말과 장창으로 무장한 오백의 무인들.
갑주와 말에만 의지한 이들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고수인데다, 완벽한 합격술을 사용했기에 그 위력이 어마어마한 조직이었다.
천궁단은 말 그대로 궁사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활 잘 쏘는 무인만 가려 뽑았는데 그 숫자가 무려 일 천 명이었다. 상상을 해보라. 일천 명의 훈련된 궁사들이 쏘는 일천 발의 화살을.
이 세 개의 조직이 무림맹의 중요삼단이었다. 맹주의 명령이 없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머지 일곱 개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우선 총군사인 자신이 이끌고 있는 정보단체의 성격이 강한 정의각(正意閣), 맹주호위를 위한 맹호단(盟護團), 맹호단은 백표가 이끌고 있었다.
다음으로 맹의 수비를 맡고 있는 백호단(白虎團), 외부 지원을 맡고 있는 적룡단(赤龍團)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림맹 무인이라 하면 이 두 개 단의 무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가장 숫자가 많은 조직이었는데 백호단이 삼천 명, 적룡단은 무려 팔천 명이었다.
감찰과 법집행을 담당하는 집법당(執法堂)과 무림맹의 살림을 맡고 있는 재당(財堂)도 십 대 조직에 포함되어 있었다.
끝으로 은퇴한 노고수들이 모여 있는 원로원이 있었다. 여러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았기에, 원로원에 들기도 어려웠고 들어가더라도 가장 많은 규제로 묶여야 했다.
이렇게 열 개의 조직의 수장이 차기 맹주를 선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비록 맹주가 후계자를 정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해 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인물이면 그럭저럭 잘 끌어갈 수 있겠다 싶은 사람이.
자신이 생각한 사람은 바로 벽뢰도문(霹雷刀門)의 문주 엽무길(葉武吉)이었다.
인품도 좋고, 문파의 평판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무공이 강했다.
비록 벽뢰도문이 중원오세에 속한 강력한 문파는 아니었지만, 개인의 무공만 따졌을 때는 가장 강하다는 것이 중론(衆論)이었다.
자신이 추천하면 모두들 자연스럽게 따를 줄 알았는데 막판에 변수가 생겼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물.
광월단의 수장인 주철룡이 새로운 인물을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광월단의 수장이 자신과 의논 한 마디 없이 후보를 내세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추천한 사람은 절대 맹주가 되어선 안 된다고 판단되는 인물이었다.
바로 중원오세의 일원이자 강북제일문이라 일컬어지는 천도문의 문주 마봉기였던 것이다.
마봉기의 복잡한 여자 문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주철룡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일단 투표를 연기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미 여섯 표를 확보한 상태였다.
광월단, 철기단, 적룡단, 집법당, 재당, 그리고 원로원까지.
그야말로 핵심조직들을 모두 포섭한 후였다.
이후에 두 번 더 미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투표를 미뤘다.
그 사이 저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오히려 이쪽의 한 표가 저쪽으로 넘어갔다.
자신이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실패하던 그 때, 그들은 보란 듯이 백호단주까지 포섭한 것이다.
이제 저들의 표는 일곱 표가 되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갈사량은 확신했다.
모든 일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왔음을.
맹주는 암살당한 것이 틀림없다.
마봉기.
그의 짓인가?
하지만 자신이 아는 마봉기는 이런 일을 저지를 만큼의 치밀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일까?
만약 또 다른 배후가 있다면?
그렇다면 왜 마봉기일까? 이 정도 놈들이라면 마봉기보다는 좀 더 그럴 듯한 인물을 내세웠을 터인데.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이오.”
이대로 투표가 진행되면 마봉기가 맹주가 될 것이다.
주철룡은 맹주가 살아 있을 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충성을 맹세하던 이였다. 그가 이런 일에 앞장서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사량아, 사량아. 너는 아직 멀었다.’
천하진을 도와 중원일통을 이뤘다는 자부심이 이제는 낡고 낡아 자만심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진의 말년은 강호 역사상 가장 안정기라 여겼었는데, 평화에 도취된 사이 무림맹의 뿌리가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비통한 자책감을 감춘 채 갈사량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전대 맹주님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대 맹주님의 유지라. 무슨 말이오?”
“아시다시피 맹주님은 보통의 강호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특히 중원오세가 강호를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하셨지요. 그것은 알고 계시지요?”
못마땅한 표정이 드러났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었는지라 주철룡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갈사량이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만약 그들 중에서 차기 맹주 선출을 결정하게 된다면, 맹주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 주철룡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군사의 말씀도 일리는 있으나, 맹에는 엄연히 지켜야 할 맹칙이 존재하지 않소? 맹주 선출은 원칙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숙고해보겠습니다.”
“더 이상 미룬다면 군사를 제외하고 투표를 진행하겠소.”
선전포고를 하듯 내뱉고는 주철룡이 방을 나갔다.
비로소 갈사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삼단 중 두 개의 단이 돌아선 이상,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을 부지런히 오가는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천하진의 죽음을 애도하며 모두들 흰색 무복과 흰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은 이제 죽고 없는데, 무림맹은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이젠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꿈틀대며 용틀임을 해대고 있었다.
‘……맹주님, 그렇게 가시면 안 되셨습니다.’
* * *
맹주전의 한 가운데 백표가 서 있었다.
천하진이 죽은 후에 이곳은 쭉 비어 있었다.
백표가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맹주가 남긴 역사가 벽에 기록되어 있었다.
천하진이 남긴 전설과도 같았던 싸움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무심코 봤던 그것을 이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있는지 모른다.
새로운 맹주가 뽑히면 이 벽은 지워지고 새로운 역사가 기록될 것이다. 맹호단의 단주인 자신 역시 새 맹주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다고 천하진을 잊을 수 있을까?
한 바퀴 사방 벽을 따라 돌고 난 후에 태사의 앞에 멈춰 섰다.
맹주가 앉아 있던 태사의는 비어 있었다.
호탕하게 웃던 천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그가 웃으며 이곳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하하하, 백표. 이리 와서 같이 한 잔 하게. 만날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병나네, 병나.”
“자네가 있어서 나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나?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부인이 많이 아프다고 들었네. 며칠 휴가 줄 테니 가서 잘 보살펴 주게. 허허, 이건 명령일세. 맹주령!”
“예전에 미친 듯이 싸울 때가 좋았지? 생각나지? 나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네. 자네들은 죽도록 고생했지만. 하하하.”
맹주의 말들이 귓가에 아직 생생했다.
백표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맹주님!”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어흐흐흑. 맹주님.”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맹주의 건강을 좀 더 챙겼어야 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자리에 주저앉은 채 백표는 계속 울었다. 온몸이 떨리고 목이 메어왔다.
“……다시 뵙고 싶습니다…… 맹주님.”
누구도 대답 없는 그곳에는 백표의 구슬픈 울음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