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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천마-21화 (2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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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의 주인은 따로 있다(4)

이 탁자에서 사용하는 패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화패(花牌)가 아니라 검패(劍牌)였다. 역대 유명한 검술 초식들과 내공심법의 짝을 맞춰 그 우열을 가리는 방식이다.

주로 강호인들이 쓰는 패인데, 검패 뿐만 아니라 도법을 이용한 도패(刀牌), 창술의 창패(槍牌), 모든 무공을 다 망라한 무패(武牌), 무림맹의 여러 조직들을 이용해서 만든 맹패(盟牌)까지. 규칙이 조금씩 변형된 다양한 종류의 노름이 있었다.

언젠가 갈사량이 그런 말을 했다. 내 사후에는 아마 천무호심결과 추혼수라검술도 검패에 새롭게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이제 내 무공을 노름판에서도 볼 수 있겠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판이 돌수록 슬슬 돈이 나가기 시작했다. 곽도수는 물론이고 탁자에 앉은 이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들어온 돈은 삼천 냥. 일반 도방이라면 엄청나게 큰돈인데, 이곳에서 돌아가는 판세를 보니 운 나쁘면 두세 시진도 안 돼 다 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도박에 일가견까진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실력은 있었다.

무림맹에서 도박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적룡단주(赤龍團主) 백성원(伯星元)이었는데, 언젠가 술자리에서 도박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술을 배웠던 적이 있었다.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것이 꽤나 도움이 되었다. 나를 노름판을 전전한 정도의 실력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세 판 잃었다가 한 판 따기가 반복되었다.

처음 자리에 앉을 때도 그랬듯이 나는 내 존재감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 패 더럽게 안 뜨네.”

내 푸념에 꾼들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잘 뜨는 날도 있고, 안 뜨는 날도 있고. 그게 인생이지.”

내가 버럭 소리쳤다.

“썅! 어따 대고 훈장질이야? 그딴 말은 형씨 애들에게나 해주라고!”

“이 봐. 가족은 건들지 말자고.”

“꼰대 같으니!”

모두들 낄낄 웃었다. 웃고 있지만 먹잇감을 보는 야수들의 눈빛이다.

곽도수가 저지른 죄들은 모두 악질적인 살인이었다.

그래서 아주 거칠고 사나운 놈이라 예상했는데 적어도 도박판에서만큼은 그는 다른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마치 대협이라도 된 양,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보상심리 같은 것인지, 인간의 양면성인지, 아니면 그저 도박에 미친놈이라 그런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 시진 쯤 지났다. 난 이미 가진 돈의 절반인 천오백 냥을 잃은 상태였고, 내가 잃은 돈만큼 나에 대한 경계심도 사라진 후였다.

이윽고 곽도수가 뒷간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일어났다.

“형씨, 나도 같이 갑시다. 그리고 갔다 오는 김에 우리 자리 한 번 바꿉시다.”

“형씨?”

“노름판에서 형동생이 어딨소? 잃은 놈은 호구고 돈 딴 놈은 다 개새끼들이지.”

내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못생긴 개새끼, 늙은 개새끼, 멍청한 개새끼…….”

앉아 있던 이들이 인상을 굳혔지만 나는 마지막 곽도수까지 놓치지 않았다.

“볼때기에 상처 난 개새끼.”

순간 곽도수의 얼굴이 꿈틀했다.

“돈 몇 푼 잃었다고 게거품 물지 말게.”

“쌍! 돈 몇 푼? 지금 그걸 말이라고?”

발끈한 얼굴로 놈에게 다가가려 하자, 뒤에 서 있던 중년 무인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 나와 앞을 막았다.

“안 비켜? 이거 안 놔?”

막아선 사내가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적당히 하시오.”

“이 새끼야, 너 뭐야? 나 여기 손님이야!”

“적당히 하시라고.”

사내의 살기를 내뿜자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차라리 그 칼로 푹푹 쑤시고 내 돈 다 뺏어가지 그래? 흥! 내 더러워서 안 한다.”

내가 탁자 위의 남은 전표를 챙겼다. 아직 돈이 반이나 남아 있었기에, 분명 이대로 보내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과연 뒤에 서 있던 곽도수가 나섰다.

“이놈아! 귀하신 분에게 그 무슨 행패냐?”

짐짓 앞서 막아섰던 무인을 야단치고는 내게 친근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 봐, 동생. 자네 입으로 누구 하나 죽기 전에는 못 일어나는 판이라고 했잖아?”

“나도 물러나기 싫지만…… 사람 기분이란 것도 있지 않소?”

“자자, 기분 풀게. 저 무식한 칼잡이 놈이 뭘 알겠나?”

곽도수가 한손으로는 어깨동무를 하듯 내 어깨를 감싸며, 다른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동시에 한 줄기 내력을 주입하며 내 몸속을 살폈다. 내공이 미천함을 확인한 곽도수의 얼굴에 가소로움이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나 역시 놈에게 알아낸 것이 있었다. 적어도 내력을 주입해서 상대의 내공을 확인할 정도의 실력은 된다는 것이다.

“뒷간 가자고 했지?”

그의 물음에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난 괜찮소. 형씨, 아니 형님이나 다녀오시오.”

“아냐, 같이 가자고. 다녀와서 자리도 바꿔주지. 그래, 안 될 땐 바꿔야지.”

그가 오히려 나를 끌고 갔고 내가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중년 무인이 따라 가려하자 곽도수가 어딜 따라오느냐고 버럭 소리쳤다.

“자, 동생. 우리 시원하게 싸고 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반각 후.

기다리고 있던 무인들 중 하나가 힐끗 뒷간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무인이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무인에게 말했다.

“너무 늦는데요?”

“가보자.”

중년 무인이 수하를 데리고 뒷간으로 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진한 피냄새가 났다.

“젠장!”

중년 무인이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 새끼 까불더니 결국 뒈졌네. 곽대협은?”

시체를 살피던 수하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이 시체가 곽대협입니다.”

“뭐?”

중년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재빨리 시체를 살폈다. 정말 곽도수였다.

“놈은? 그 새끼 찾아!”

수하들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한데 대체 어떻게 목을 자른 거지?”

손으로 뜯어낸 상처가 아니었다. 곽도수의 목은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그때 함께 있던 수하가 깜짝 놀랐다.

“헉!”

“왜 그래?”

“조장님 칼이…….”

사내가 깜짝 놀라 자신의 허리를 내려 보았다. 호신용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비수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언제…… 아!”

앞서 곽도수에게 달려드는 것을 막으며 아주 잠깐 실랑이를 벌였을 때, 그때 자신의 비수를 뽑아갔음을 깨달았다. 지켜보는 눈이 많았음에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손놀림이 보통이 아니란 뜻이었다.

달려 나갔던 수하들이 달려 들어왔다.

“뒷문을 지키던 애들이 당했습니다. 놈은 이미 빠져 나간 것 같습니다.”

사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애들 다 풀어서 쫓아! 아까 그 새끼, 용모파기 싹 돌리고! 어서!”

* * *

인적이 끊어진 숲속.

공종은 바위 위에 놓인 곽도수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렇게 놀라나? 당연한 결과 아닌가?”

“하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데 혹 죽이는 과정에서 발악은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네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느냐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발악할 사이도 없이 죽었지.”

“아,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돈은?”

“여기 있습니다. 이만 냥입니다.”

그가 메고 있던 혁낭을 내게 건넸다. 열어보니 소액전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원래 현상금 오천 냥에 개인적으로 마련한 만오천 냥까지.

“가문의 악적을 직접 잡으신 것, 감축드립니다.”

원래라면 여러 조사를 거친 후에 현상금을 지급한다. 죽는 자가 확실히 현상금이 걸린 악인인지 조사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공종은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돈을 지급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잘린 머리통만 봐도 곽도수임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세어보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두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역시 우리 공지부장이 세심한 면이 있군. 아주 마음에 드네. 이제 본단으로 가실 준비나 하시오.”

“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기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내가 불쑥 말했다.

“한데 이놈이 죽기 전에 이상한 말을 하던데. 자신이 공지부장과 아는 사이라고.”

공종이 화들짝 놀라며 부인했다.

“헛소리입니다!”

“둘이 모의해서 벽씨검문을 털어 먹었다더군.”

“아, 아닙니다.”

말까지 더듬는 공종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더 좋은데?”

“네?”

“나는 적당히 세속적인 사람이 좋다네. 순진한 놈은 답답하거든. 때에 따라선 악과 손을 잡을 수도 있고. 그래야 과감한 일처리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생각지도 못한 말들에 공종은 정신이 없었다.

“왜 그랬나? 솔직히 말해보게. 내 기준에서 그 정도는 흠이 되지 않는다네. 오히려 장점이지.”

공종이 잘린 머리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갈등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곽도수가 다 불어버린 일, 괜히 속이려다가는 신임만 잃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놈은 완전히 개차반 같은 놈이었습니다. 버릇을 고쳐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하하. 멋지군.”

내 반응에 안도하던 바로 그 때.

찌이이익.

내가 인피면구를 벗었다.

“오랜만이군.”

공종이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아마도 그 평생에 가장 놀란 순간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그는 놀랐다.

“……아니, 너는? 너? 네가 어떻게?”

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버릇을 고쳐놓으려면 회초리를 들어야지, 돈은 왜 뜯어가?”

몸까지 파르르 떨며 경악하던 공종이 내 어깨에 메고 있던 혁낭에 시선이 갔다.

“내 돈, 내 돈 내 놔라!”

“역시 돈부터 생각나지?”

공종이 검을 뽑으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내가 한 발 빨랐다. 벼락처럼 쇄도하며 손을 내질렀다.

쉭! 푸욱!

비수가 놈의 목에 정통으로 박혔다.

“큭.”

공종이 내 팔을 붙잡았다. 비수가 뽑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온몸을 경련하면서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난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공종을 응시했다.

“강호인들을 지켜주라고 널 뽑았잖아? 이딴 짓 하라고 뽑은 것이 아니라고.”

이것은 벽리단이란 한 개인의 복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림맹주 천하진의 분노이자 징벌이었다.

공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종 같은 쓰레기와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기에 사정없이 비수를 뽑았다.

공종이 피를 내뿜으며 뒤로 쓰러졌다.

내가 벗은 인피면구를 놈의 얼굴에 착용시켰다. 시체가 발견될 테고 공종이 인피면구를 쓰고 잠입해서 곽도수를 죽인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도방쪽 사람들 중에서 둘 사이를 아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터이니, 뜬금없는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라면 어떤가?

내가 관여한 것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없는데.

차갑게 식어가는 시체를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흑시 제남지부였다.

다행히 약속한 열흘은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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