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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의 주인은 따로 있다(1)
노인의 기도에서 고수의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예전처럼 정확하고 예리하게 상대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대충은 감을 잡을 수 있다.
노인은 이곳의 책임자거나, 그에 준하는 직책을 가진 인물일 것이다. 하긴, 이곳에서 파는 여러 강호의 기물들 중 영약의 가치가 가장 높을 터다.
“어떤 종류로? 환(丸)? 초(草)? 단(丹)?”
“아무거나 상관없소.”
“심부름 오셨나?”
방갓으로 얼굴을 가렸기에 노인은 내 목소리만 들었다. 사실 나는 목소리도 살짝 변형을 시켰다. 이런 일은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좋았으니까.
초창기 맹주 시절에는 인피면구를 착용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목소리까지 변조하는 방법을 배웠었다. 덕분에 나는 몇 개의 다른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지금도 그 중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오.”
“능력 있는 젊은이군. 그래, 여긴 와본 적이 있으신가?”
“없소.”
짤막한 대답에도 노인은 여러 이야기를 물어왔다. 나는 그가 왜 자꾸 질문을 던지는지 짐작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파악했다. 당시의 흑시는 살벌한 곳이었으니까. 손님도 위험했고, 흑시 자체도 위험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상대를 파악하려는 이 노인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가 묻는 잡다한 질문들을 싫은 내색 없이 모두 답해주었다. 비록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노인은 흡족해했다.
“요즘 젊은 것들 답지 않게 예의가 있군.”
사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일일이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거래를 텄으니 다음에 또 오게 될 때를 염두에 두어서였다.
“자넨 정말 운이 좋군. 지난 육 개월 간 우리 지부에 영약이 들어오지 않았다네.”
정말 영약이 귀하긴 귀한 시대인가보다.
“한데 마침 이틀 전에 영약이 하나 들어왔네.”
“어떤 것이오?”
“천년파양초(千年芭陽蕉)네.”
천년파양초! 적게는 십 년, 많게는 십오 년 정도의 내력을 준다고 알려진 영초로, 딱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
“얼마요?”
“사만사천 냥이네.”
젠장! 내가 가진 돈에서 만오천 냥이나 부족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흑시에서 판매되는 모든 물건의 가격은 정해져 있네. 혹시 바가지를 씌울까 걱정이 된다면 다른 지부에 알아봐도 되네.”
그것은 나도 알고 있는 바였다.
흑시가 물건을 거래하는 곳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흑시는 절대 고객을 배신하는 경우는 없었다. 물건이 가짜라거나, 고객의 비밀이 새어나간다거나, 고객의 돈을 가로챈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정가제였다.
흑시는 중원 수십 개에 달하는 모든 지부의 물건 값이 똑같았다. 물건 값이 변동되면 모든 지부의 물건 값이 함께 바뀌었다.
흑시의 가격이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흑시에서 바가지를 쓰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흑시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흑시가 아주 오랜 세월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금방 팔리겠군요?”
“아마 그럴 것이네.”
영약은 살 수 있을 때 사지 못하면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도 살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정말이지 노인의 말처럼 지금 천년파양초가 나왔다는 것은 운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준비한 돈이 부족해서 다음을 기약해야겠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노인이 물었다.
“영약은 왜 사려는 것인가?”
“그야 강해지기 위해서요.”
“강해져서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른 내용을 말했다.
“평생 불효만 저지르다가 뒤늦게 철이 들었소. 그래서 효도를 해볼까 하오.”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노인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어이없는 말이군.”
“왜 그렇소?”
“영약을 사려던 강호인 중에 효자는 없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나는 잘 안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강해지는 것에 미치면 주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천하제일인이 되면 어머니께 못 다한 효도를 원 없이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셨다.
이번 삶은 다를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은 다 챙겨서 갈 작정이다.
“아쉽게도 최초의 효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소.”
그러자 노인이 뜻밖의 말을 던졌다.
“열흘 기다려 주지. 그 안에 돈을 마련해오면 자네에게 팔겠네. 정확히 열흘이네.”
자신의 부모가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예의 바른 내가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나름의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오.”
“노부는 영약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이네. 자네가 그것을 증명해 보게.”
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과연 열흘 내로 만 오천 냥을 더 구할 수 있을까?
* * *
근래 여러 긍정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가문 내에서 나에 대한 평판이 바뀌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난 자네를 믿지 않네.”
바로 종총관이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 악담을 하던 바로 그 늙은이 말이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직감이네, 직감. 언젠가 본성을 드러내고 사고를 치겠지.”
이 고집불통 늙은이야. 그렇게 의심만 하지 말고 믿어야 할 때는 좀 믿어 봐.
무림맹 원로원(元老院)의 늙은이들이 딱 이렇다. 욕심만큼 의심도 많고, 딱 그만큼 고집도 세다.
내가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총관님. 혹시 돈 좀 있습니까?”
그러자 종총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이것 봐, 내 말이 맞았지?’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림없네!”
그가 성큼성큼 멀리 가버렸다.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고집 센 늙은이긴 하지만 벽씨검문에 꼭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의원으로서의 그는 꽤나 훌륭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나저나 큰일이구나.
약속한 열흘에서 벌써 사흘이 지났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었다.
양소방으로 가서 정여를 쥐어짜는 방법이었다. 이것저것 빠르게 처분하면 어쩌면 만오천 냥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여와의 관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그는 나를 돈이나 빨아먹으려는 거머리로 여기고 딴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비록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오천 냥으로 신뢰를 잃기에는 너무나 아쉽다. 양소방은 이보단 좀 더 크게 이용할 작정이었으니까.
그렇게 갈등하고 있는데, 광두가 귀신처럼 고민냄새를 맡았다.
“걱정 있죠?”
눈치가 거의 갈사량 급이다. 물론 내용은 틀렸지만 말이다.
“다시 송소저 보고 싶어졌죠? 싫니 어쩌니 해도 그래도 보고 싶죠?”
“돈이 좀 필요한데.”
어느새 광두는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아니, 이제 좀 친해지려니까 돈 빌려달라고 그래요?”
“빌려달란 말 아직 안 했다.”
“척하면 척이죠. 그래서 얼마나요? 좋아요, 제가 열다섯 냥까진 빌려드릴 수 있어요. 대신 꼭 갚아주셔야 해요.”
“만오천 냥 필요해.”
“헉!”
“그것도 칠일 내로.”
광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두 눈만 끔벅거렸다.
“제가 열다섯 번은 다시 태어나야 벌 수 있을 액수군요. 그것도 악질 주인에게 술값을 뜯기지 않았을 경우에만요.”
광두가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양소방에서 보상금으로 챙겨온 돈 있잖아요?”
“그것으로 모자란다.”
“어디 장원이라도 한 채 사시려는 겁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사려고 한다.”
지난 생에서는 돈 문제로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내게 돈과 관련한 문제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총관같은 늙은이 말고 어디 빠릿빠릿한 젊은 총관 녀석이 하나 따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얘기하니까 예전 생각나네요. 그때도 돈 구한다고 설쳐대다가 사고를 치셨죠. 그 때문에 양소방에 빚을 진 거고.”
“대체 어쩌다가 이만 냥이나 빚진 거냐?”
“도련님이 하도 사고를 치니까 가주님이 돈줄을 막아버리셨죠. 결국 돈을 구한답시고 현상금이 걸린 악인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놈의 인질이 되셨어요. 오히려 놈에게 돈을 크게 뜯겼지요.”
참으로 가지가지 온갖 꼴통 짓은 다했구나.
“그런데 무공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공대협에게 바람 들어서 그렇죠.”
“공대협?”
“네.
“무림맹 곡부지부장입니다.”
무림맹이란 말에 가슴이 격동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이던가?
“그런데? 바람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말이지?”
“그 분과 어울리더니 협객바람이 드셨거든요.”
“그래?”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무림맹의 지부장쯤 되는 자가 이런 개차반과, 그것도 새파란 애송이와 어울렸다?
“그때 우리 집안은 어떤 상태였지?”
“한창 안 좋을 때죠. 이후 그 일이 가세를 기울게 한 결정타가 된 거고요.”
“그렇단 말이지? 공대협이란 자는 이곳 지부장이고. 그럼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는 놈은 누구냐?”
“곽도수(郭導手)란 놈입니다. 산동 오가장에 침입해서 재물을 훔치고 그 일가를 몰살시킨 사악한 놈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차례 도적질과 살인을 저지른 자라고 하더군요.”
처음 들어본 놈이다. 하긴 내가 저런 놈까지 알고 있을 수는 없겠지.
“무림맹에서 내건 현상금이 얼마였지?”
“당시에 오천 냥이었습니다.”
오천 냥이라면 극악범으로 분류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놈이 돈만 받고 나를 순순히 풀어줬다고? 이상하지 않아?”
“공대협이 중재를 했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지셨지요.”
“어떻게 중재를 했지?”
“그건 저도 잘 모르죠.”
“곽도수가 이만 냥이나 요구한 거야?”
“아뇨, 만 오천 냥입니다. 오천 냥은 중재해준 대가로 공대협에게 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뇌물을 받았다?”
“뇌물이라고 하면 안 되죠. 가주님께서 주신 건데.”
“아버지야 자식 구해줬다고 줄 수 있지. 공직에 있는 놈이 거절해야지.”
그리고 성격상 아버지가 먼저 줬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놈이 먼저 넌지시 돈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강한 의심이 들었다. 공대협이란 놈이 곽도수와 한패일 수도 있다고.
무림맹 지부장이란 신분이 주는 무한한 신뢰를 이용해서 둘이서 한탕 해먹은 것이 아닐까? 자식 문제라면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을 이용해서 말이다.
“곽도수는 잡혔어?”
“아직 잡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광두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설마 놈을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요?”
“잡아야지. 그런 쓰레기 새끼가 만오천 냥이나 뜯어갔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위험해요! 놈은 정말 흉악한 놈으로 소문난 자라고요!”
“그럼 우선 네 돈이라도 몽땅 다 빌려줘.”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양소방 일도 가뿐하게 처리하셨잖아요?”
“하하하.”
이내 광두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돈은 못 빌려드려도, 기꺼이 한 팔이 되어 드립지요.”
걱정하는 광두의 마음도 잘 알고, 광두에게 경험도 쌓아줄 겸 데리고 갈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잘하면 이번 일을 해결하면서 모자란 돈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오른팔 아직은 장식용이니까 무공수련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 부모님께는 적당히 말해 줘. 한 며칠 수련 들어갔다고.”
집을 나서는 나의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
만약 두 놈이 결탁해서 이만 냥을 해먹은 것이라면?
너희들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