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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이 향하는 곳은(4)
나는 기세로 정여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언젠가 한 번쯤 보았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 눈빛과 기도에서 벽리검가의 망나니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당신은 고작 이런 자들을 섬기기 위해 강호에 뛰어들었소?”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의 동요를 느꼈다.
내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날렵한 내 신법에 정여는 깜짝 놀랐다. 내공과는 별개로 보여줄 수 있는 몸놀림이란 것이 있다.
난 신법의 정수를 의도적으로 보여줬고 정여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정여의 시선이 내원 입구를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담에 기댄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들은 죽었나?”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혈도를 제압해서 잠재웠을 뿐이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당신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니까.”
정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갖 생각이 들겠지만 결국 그는 기다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검을 뽑았겠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기철과 혈견이 깜짝 놀랐다.
“너는?”
양기철이 나를 알아보았다. 아무리 기도가 바뀌었다고 해도 불과 엊그제 아들을 죽도록 두들겨 팬 상대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그래, 나다.”
“나다? 이 무슨 막돼먹은 말버릇이냐?”
양기철이 인상을 구기며 차갑게 노려봤지만 이어지는 내 말은 더욱 싸늘했다.
“한때 형님이라 부르던 사람의 가문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자가 예의를 따져? 너 대체 어떤 놈이냐?”
정곡을 찔린 양기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일장을 휘두를 것 같은 사나운 기세를 내뿜었다.
하지만 놈은 신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진 어떻게 들어왔으며 내가 왜 이렇게 당당한지.
그가 혈견에게 명령을 내리듯 말했다.
“없애버리시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히 자신부터 챙기는 인물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그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양기철을 죽일 수 있을까?
고작 오 년의 내공에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벽리단의 육체인데.
내가 내린 답은 ‘그렇다’이다.
어렵다라거나, 변수가 있다란 결론이 내려졌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죽일 자신이 있었다.
내력싸움을 하거나 싸움이 장기전이 된다면 당연히 내가 불리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결정적으로 유리한 점은 상대가 나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일전에 벽씨검문을 찾아왔을 때, 뒷짐을 지고 거드름을 피우는 양기철을 보면서 느꼈다.
녹이 슬어 있다고.
그가 산동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난 무인이라면 상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산동에서 제일 큰 조직의 수장일 뿐이다.
‘제일’이라는 수식어는 같지만 둘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과연 양기철이 실전을 경험한 것이 언제 적일까? 일 년 전? 이 년 전? 어쩌면 십 년이 넘도록 없었을 수도 있다. 규모가 큰 조직의 수장일수록 실전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법이니까.
오히려 저 혈견이란 자가 더 위험한 존재이리라.
양기철이 그랬듯이 혈견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보여주었다.
“오천 냥 추가하겠소.”
“미친! 이놈은 어차피 죽여야 할 놈 중의 하나네!”
“이곳에서는 아니지요.”
“애송이 하나 죽이는데 오천 냥은 너무 과하지.”
“그럼 직접 손을 쓰시오. 방주에게 저깟 애송이쯤은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 않소?”
혈견이 팔짱을 끼며 오히려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빌어먹을!”
양기철이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내게서 그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정말 한 주먹 거리도 안 되어야 하는데, 왜 선뜻 나서기가 꺼려지는지 자신도 궁금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실전은 부족한지 몰라도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은 살아 있었다.
“좋아. 오천 냥 주지.”
그제야 혈견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고맙군, 애송이.”
말과는 달리 혈견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낭인으로 살아온 그는 오히려 양기철보다 빨리 내가 풍겨내는 위험을 감지했다. 다만 그 위험이 자신을 해칠 정도까진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나 역시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환생한 후, 제대로 된 첫 번째 싸움을 치르려는 순간이었으니까.
놈의 무기는 어른 팔뚝 길이의 철곤(鐵棍)이었다.
붕! 붕!
철곤을 짧고 빠르게 두 번 휘젓는가 싶더니 곧바로 치명적인 살수를 펼쳐냈다.
팡! 파파파파팡! 팡!
철곤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격타했다. 적중당하면 뼈가 아스러질 대단한 위력이었다.
간발의 차로 철곤이 내 어깨를 스쳤다.
확실히 벽리단의 몸은 느리다. 혈견의 움직임을 통해 어디로 공격을 해올지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면 이 한 번의 공격에 끝장났을 것이다.
지금의 싸움은 벽리단의 몸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이 싸우고 있었다.
연속해서 날아드는 철곤이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솟구쳐 오르는 하나의 감정.
바로 투지(鬪志)였다.
파앙!
이번에는 머리통이 터질 뻔 했다.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오랜만에 싸움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싸우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음을. 그런 사람이었기에 천하제일인의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싸울 일이 없었던 내 말년의 삶은 너무나 무료했음을.
꽝! 꽈직!
방안에 있던 물건들이 박살났다.
지켜보던 양기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여 아마도 혈견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천 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직접 손을 썼을 터인데, 후회하고 있겠지.
혈견이 잠시 공격을 멈췄다.
“쥐새끼 같은 놈! 잘도 피하는구나!”
승리를 자신하고 여유를 만끽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유였겠지만 내게는 허점이었다.
이 허점의 순간이 그에게는 찰나였겠지만 내게는 억겁이었다.
내 검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촤라라라라라락!
피이이이이이익!
검이 공기를 가르며 만들어낸 서로 다른 두 개의 파공음.
혈견의 움직임이 멈췄다.
사라락.
혈견의 옷자락이 사선으로 잘려나갔다. 그 안으로 보이는 붉은 선.
사락.
이번에는 반대쪽 사선으로 옷자락이 잘렸다. 역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 붉게 새겨진 기울어진 열십 자(X).
내가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다음 순간.
촤아아아아아악!
붉은 선이 갈라지며 상처 모양 그대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추혼수라검법의 제일초식 찰나인이 발출된 것이다.
원래라면 그의 몸은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삼 년의 내공만을 사용했기에 딱 여기까지의 위력인 것이다.
엄청난 피를 뿜어낸 후 혈견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쿵.
바닥에 처박히기 전에 이미 그는 절명한 후였다.
내가 고개를 돌려 나머지 이년의 내공이 사용된 곳을 바라보았다.
양기철이 경악한 얼굴로 혈견의 죽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에서 번져 나온 피가 그의 백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찢어진 옷 뒤로 가슴에 소용돌이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 바로 제이초식 진명인이 남긴 흔적이다.
난 오 년의 내공을 둘로 나눠서 삼 년의 내공을 찰나인에 실어 혈견에게 날렸고, 이 년의 내공을 진명인에 실어 양기철에 날렸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겐 단 한줌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운기조식을 해서 다시 내공을 채우기 전까지는 무방비 상태였지만, 양기철은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제 몸을 살리기도 쉽지 않았다.
양기철이 검붉은 피를 왈칵 토했다.
혈견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내가 자신에게 공격을 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방비를 했다 해도 피하기 쉽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마지막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이미 즉사했을 것이다.
입과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이렇게 많은 피가 나오는 것을 본적이 없을 것이다.
“……살, 살려 줘.”
나는 검을 회수하고 바닥에 떨어진 철곤을 주워들었다.
양기철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지만 아직 눈치는 살아 있었다.
“……혈견과 양패구상한 것으로 처리하려는 것이로구나!”
“양패구상은 아니고. 이 자가 너를 죽이고 달아난 것이 되겠지.”
양기철의 두 눈에 절망이 가득 차올랐다.
“살려주면…… 뭐든지 들어주마.”
내가 들은 척도 않고 다가서자 그가 비틀거리며 한쪽 벽으로 갔다.
“잠깐…… 제발! 잠깐만!”
그가 다급히 몇 곳의 장치를 건드리자 벽이 돌아가며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려주면 이 안에 든 것을 다 주겠다!”
“조건도 걸고. 아직 여유 있으시네.”
성큼성큼 다가가서 놈의 머리통을 향해 내가 철곤을 치켜들었다.
머리를 굴릴 사이도 없이 몰아붙이면 오히려 금고문은 더욱 쉽게 열리는 법.
양기철의 손이 바빠졌다.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성격이었기에 목숨이 화급에 달린 이 상황은 그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는 생각뿐이었다.
과연 아주 잠깐 기다리는 사이, 제대로 조건 한 번 걸어보지도 못한 금고 문이 열렸다. 물론 걸었다고 해도 통하지 않았겠지만.
금고 안에 쌓여 있는 전표와 금붙이들.
힘겹게 벽에 기댄 채 그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다 처분하면 삼만 냥이 넘는다. 그러니 제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 살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했다.
반면 내 눈빛에 담긴 차가움은 그 뜨거움을 꺼버리기에 충분했다.
“아까 그랬지? 이 강호에는 강자와 약자 두 종류만 있다고.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다고.”
앞서 그가 정여에게 했던 말이었다.
“오늘은 네가 약자인가 보다.”
퍼억!
나는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러 머리통을 날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수박처럼 머리통이 박살났다.
내 가족을 몰살시키려고 한 자를 살려둘 만큼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퍽!
다시 한 번 철곤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늑골이 산산조각나며 내가 남긴 진명인의 상처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혈견의 가슴을 내리쳐 흔적을 지웠다. 손을 댄 이상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
내 예상대로 싸움이 끝날 때까지 정여는 떠나지 않고 밖에 서 있었다.
“들어오시오.”
그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의 광경에 그가 흠칫 놀랐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는지, 아주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금고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혁낭에 안에 있던 것을 모두 쓸어 담고서는 그것을 어깨에 멨다.
“혈견이 그대의 방주와 아들을 죽이고 돈을 훔쳐 달아났소.”
정여가 혈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확신한다.
정여는 알아서 혈견의 시체를 없앤 후 방도들에게 그렇게 전할 것이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이제 내가 던질 말 때문이다.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바로 이 말 때문에. 밖에서 기다리면서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바로 그것.
“이제부터 당신이 양소방의 새 방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