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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이 향하는 곳은(3)
“이 개 같은 년. 어서 와서 빨아.”
양기강이 신경질적인 살기를 뿜어냈다. 오히려 몸이 건강할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악질적인 살기였다.
시비가 덜덜 떨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앞서 목이 뜯겨 죽었다는 시비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런 일을 거절해서 살해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말 싫었다. 쳐다보기도 싫은 저 흉측한 하물을…….
“콱 가랑이를 찢어 버릴까보다. 너도 내가 우습냐? 그래? 이 쌍년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제자리에 엎드렸다. 바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저는, 저는…… 혼인할 사람이 있어요.”
내년에 혼인하자고 약속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잣거리 상점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그가, 이제 작은 방 하나 구할 돈을 모았다고 그렇게 좋아하던 얼굴이.
앞서 시중들던 시비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와 야반도주라도 했어야 했다. 정말 그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평생을 살아온 곳을 하루아침에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막 자리를 잡은 그 사람을 위해서도 그럴 수 없었고.
“그놈을 불러올까? 사내 놈이 없으니까 허전해서 못하겠어?”
“헉!”
시비가 고개를 들었다.
양기강의 얼굴은 잔인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것 같은 뱀 눈을 보며 그녀가 소리쳤다.
“안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럼 이리 와.”
양기강은 누워만 있으니까 오히려 치밀어 오르는 성욕을 참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누군가를 범하고 죽이고 싶은 욕망만이 가득했다.
여인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오히려 양기강의 성욕을 자극했다.
“어서, 어서 해!”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그녀의 온몸이 떨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질끈 감은 두 눈으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입을 가렸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입을 닫게 한 것이다.
그 손길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단지 그것이 너무나 호의적이고 부드러운 손길이어서가 아니다.
양기강이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내뱉은 것이다.
“너 이 새끼!”
여인의 입을 가렸던 손이 이번에는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쉭!
시원한 바람소리와 함께.
서걱.
“끄아아아악!”
쥐어짜듯 나오는 끔찍한 비명에서 여인은 알 수 있었다. 양기강의 하물이 잘려나갔다는 것을.
촤아악, 핏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잠시.
푹! 꽈득.
이번에는 검이 살을 뚫고 들어가 뼈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비명이 채 터져 나오기도 전에 다시.
푸욱!
살이 찢기는 소리에 욱하는 비명소리가 딸려왔다.
여인은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다양한 비명이 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끄으으윽.”
검이 박히고 뽑혀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고통에 찬 신음이 뒤따랐다.
“제발…….”
양기강의 애원에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그럼 이 애가 제발이라고 애원했을 때 너도 들어줬어야지.”
말이 끝나는 순간!
푹! 푸욱! 푹! 푸우욱!
검이 살을 찢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야말로 난자당하는 소리였다.
여인이 이 끔찍한 소리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검에 찔릴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의 주인공이 양기강이란 점이었다.
비명소리가 멈췄고 난도질도 멈췄다.
뒤에 선 사람이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여인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알지 못했다. 다만 더 이상 양기강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얘야.”
양기강을 대할 때와는 달리 너무나 부드러운 어조여서 하마터면 네라고 대답을 할 뻔 했다.
“세상 남자들이 다 이렇지 않단다. 살다보면 미친개에게 물릴 때도 있겠지.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개를 미친 개 취급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 오늘 일은 다 잊고 정혼자와 행복하게 살아라.”
너무나 자애롭고 부드러운 말이었다. 젊은 목소리였는데,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해주시는 말씀 같았다.
그 말이 끝나자 잠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수혈을 제압당한지도 모를 자연스러운 손길 때문이었다.
바닥에 부드럽게 눕혀지는 순간, 그녀는 꿈결처럼 들려오는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만한 사람은 오늘 다 죽을 테니까.”
* * *
“재고해 주십시오, 방주님. 만약 정말 벽씨검문을 공격한다면 강호인들의 공분(公憤)을 사게 될 겁니다.”
간곡한 부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양소방의 부방주 정여(鄭呂)였다. 그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공분? 지금 공분이라고 했나?”
“방주님.”
“내 아들이 죽을 뻔 했네. 그런데 그딴 말을 하다니? 대체 누가 분노한다는 말인가?”
“양공자는…….”
맞을만한 짓을 했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양기철이 죽일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재고해 주십시오.”
“이렇게 물러 터져서야. 쯔쯔.”
“방주님!”
정여는 자신이 협의를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협객과 악인의 중간정도, 적당히 세속에 물든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악에 가까웠다. 방주가 저지른 악행들을 모른 척 눈감아준 적이 여러 번이었으니까.
한데 악행도 악행 나름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식이 두들겨 맞았다는 이유로 낭인을 고용해서 한 문파를 밀어버릴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디 숙고해 주십시오.”
그때 방에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가 바로 양기철이 부른 혈견이었다.
혈견이 어떤 인물이냐?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그를 설명할 수 있었다.
돈이라면 제 부모 자식도 죽일 것 같은 자.
어쩌면 일찍 죽었다는 처자식도 그가 돈과 바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양기철은 은밀히 처리해야할 일이 생기면 그를 불렀다. 일처리 하나만큼은 그의 탐욕만큼이나 확실했던 것이다.
-돈을 더 주셔야겠소. 알아보니 그쪽 문주의 평판이 아주 좋더이다.
-언제부터 죽이는 사람의 평판을 챙겼나?
-나이를 먹으니 자연 그렇게 됩디다. 철이 드는 것인지.
-얼마나 올려달란 말인가?
-이만 냥은 받아야겠소.
-나이 먹고 철이 든 게 아니라 욕심만 늘었군.
-가부 여부만 말하시오. 우리가 농담이나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잖소?
결국 원래보다 배나 많은 이만 냥을 주기로 했다.
대신 이번 일을 뒤집어 쓸 흉수를 혈견이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적당한 낭인 하나를 이용해서 그가 동료들과 함께 벽씨검문을 몰살시킨 것으로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벽리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놈이 여인을 겁탈했고, 여인의 정인이었던 낭인이 그 복수를 위해 몰살시킨 것으로. 몰살시킨 낭인은 그곳에서 자결한 것으로 꾸밀 작정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 벽리단이 여인을 겁탈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벽씨검문은 멸문을 당해도 좋을 쓰레기 문파가 되는 것이고, 양기강은 그것을 막다가 부상을 당한 협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돈의 힘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는데 마지막 순간에 부방주 정여가 알게 된 것이다. 말릴 것이 확실했기에 그 몰래 진행한 일이었는데.
듣고 있던 혈견이 던지듯 툭 내뱉었다.
“왜 그리 착한 척을 하시나? 그렇게 착해보이지도 않는 양반이?”
정여가 그를 보며 인상을 썼다.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혈견이 히죽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기세에 밀린 것이 아니라 ‘너 따위와는 굳이’ 이런 느낌이었다.
“꽉 막혔군.”
그러면서 양기철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일은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빠져야 하오. 아시다시피 낭인들은 소속감이 없는 자들이오.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비밀이 누설되는 법. 지금 확답을 주지 않는다면 곧바로 해산하겠소. 물론 계약금은 돌려받지 못할 거요.”
“그럴 일은 없네. 예정대로 진행할 테니까.”
그렇게 못을 박은 후 정여를 설득했다.
“비록 벽씨검문이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 적지 않네. 그곳을 우리가 다 차지하게 되면 본방의 힘을 두 배는 크게 키울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장기적으로 수십만 냥의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만 냥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돈이 된다.
“산동지역에서 벽씨검문의 영향력이 큰 것은 이곳 무인들이 벽문주를 깊이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양기철이 고까운 기색을 드러냈다.
“마치 내 인품이 그 자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신뢰? 그딴 것은 이 강호에 없다네. 이 강호에 존재하는 것은 딱 두 가지네. 강자와 약자. 강자는 지배하고 약자는 지배당하지.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거다.”
정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인이 욕심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정도로 추악한 탐욕일 줄은 몰랐다.
“만약 벽씨검문을 공격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방주님을 모시지 않겠습니다.”
그로서는 마지막 한 수였다. 자신이 양소방에 들어온 지 이십 년. 온갖 일들을 함께 겪어왔다. 단언할 수 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양소방이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리면 결국 못이기는 척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양기철의 반응은 무자비했다.
“어디서 감히 그딴 조건을 내거는 것이냐? 일장에 쳐 죽이기 전에 썩 꺼져버려라.”
정여는 숨이 턱 막혔다.
쳐 죽이기 전에 꺼지라고? 난생 처음 듣는 폭언에 섭섭함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대체 난……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아온 것일까?’
그에 대한 미움보다는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앞섰다.
더 있다가는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부를 때까지 자숙하고 있도록!”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뒤에서 킬킬대는 혈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벽씨검문의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네.”
“걱정 마시오. 벽씨 성을 가진 자는 물론이고 키우는 개까지 씨를 말려버릴 테니.”
문이 닫히기 전에 들려오는 대화에 정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이지 당장 뛰어 들어가서 두 놈을 패죽이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이 죽게 되겠지.
여기까지다. 자신이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도덕심과 역량은.
그렇다고 만정이 떨어진 이곳에 더 있을 생각은 없다. 이번 일이 지나면 양기철은 다시 감언이설로 자신을 달랠 것이다.
그 전에 떠날 것이다. 나중에는 더 비참하게 버려질 테니까.
‘젠장! 양소방을 천하제일방으로 키워내고 싶었는데.’
평생을 몸담은 곳을 떠나야 한다는 괴로움에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지붕에 한 청년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늘어뜨린 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는 뒤로 펼쳐진 파란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누구냐?”
누구긴?
바로 나였다.
정여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고 했다.
“마지막까지 병신처럼 굴 거요?”
내 말에 그가 흠칫 놀라며 행동을 멈췄다.
“당신 인생의 마지막을 고작 저런 놈을 지키려다 죽는 것으로 끝내고 싶으냐고?”
무거운 침묵이 나와 그 사이를 짓누르듯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