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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이 향하는 곳은(2)
사흘이 지나도록 광두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쯤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을 수도, 혹은 이미 시체가 되어 땅속에 묻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밥도 챙겨 먹었고, 남는 시간에는 객잔 뒤쪽 숲에 가서 백월검법을 익혔다. 일체 떠도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흘간 열심히 수련한 결과 이젠 누가 봐도 제법 오랫동안 백월검법을 익힌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내 독문무공이 아닌 무공을 익히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무공에 대한 타성(惰性)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나는 타성에 젖어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절대자의 자리에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분명 내 실력은 당대에는 통했다.
적어도 내가 상대한 그 누구도 내 검을 막아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수련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살았던 시대에 국한된 것이지 않을까? 내 무공이 통하지 않는 고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초야에 묻혀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 나는 눈앞의 상대만 생각했고 그것이 전부라 여겼다.
시대를 뛰어넘을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았어야 했는데.
어쩌면 그 타성이 나를 심검지경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검지경은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경지였으니까.
왜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광두는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 객잔 입구의 주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지도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녀석은 강호인들이 입고 다니는 무복에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고, 방갓에 피풍의까지 두르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강호인이었다.
녀석이 약속이나 한 사람처럼 내 맞은편에 앉았다.
“사해는 동도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참, 형씨는 사해동도 헛소리라고 하셨지.”
“재밌냐?”
내가 웃으며 묻자 광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밌었겠어요? 겁나서 죽을 뻔 했어요.”
“어떻게 된 일이야?”
광두가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혈견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혈견?”
들어본 적이 없는 자다.
내가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어떤 자인데?”
“저도 모르죠. 단지 이름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양소방에서 혈견이란 자를 통해서 은밀히 낭인을 모으고 있답니다.”
“낭인을?”
“네. 벌써 수십 명이나 모인 모양입니다. 우리를 치려는 목적이 확실합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은밀히 낭인들을 끌어 모으면서 따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도련님이 여자를 겁탈하려 했고, 양기강이 그것을 말리려다 기습을 당했다고요.”
“다들 믿겠군. 평소 내가 워낙 쓰레기 짓을 많이 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믿는 것들은 또 뭡니까? 도련님이 사람은 패도 여자를 겁탈하는 쓰레기까진 아니었단 말입니다.”
“소문이란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왜 이렇게 담담하세요? 화 안 나세요?”
“화나지. 한데 내가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나중에 그게 헛소문이었다고 밝혀지면, 헛소문을 믿었던 사람이 미안해하면서 더 좋은 평가를 해줄 거야.”
“나중일이잖아요.”
“시간은…… 금방 간다.”
“이럴 때보면 늙은이 같다니까?”
내가 피식 웃었다.
“한데 이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낭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했던 것이더냐? 꽤 위험했을 텐데?”
“……아뇨.”
“아니라고?”
“낭인들 모으는 것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안 사실이죠.”
“그럼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
“양소방 시비를 통해서 알아냈습니다. 양소방의 시비 중에 하나가 제게 넘어왔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애들 마음은 제가 잘 알지 않겠습니까?”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광두의 선택은 탁월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간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요즘 한창 시비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양기강이 자신을 시중드는 여인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그래서 다들 양씨부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쉽게 알아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운도 실력이다.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했으면 이런 운도 따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를 통해 혈견이란 이름도 듣고 낭인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죠. 낭인들 사이에 잠입해서 좀 더 알아보려고 이것들을 다 샀는데…… 막상 하려니까 겁이 나서 못했습니다.”
내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광두를 바라보았다.
잘한 선택이었다. 광두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또한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할 줄도 안다.
합격이다.
광두는 마당이나 쓸게 하기에는 아까운 녀석이다.
“처음에는 너무 무섭고 떨렸는데 하다 보니 뭔가를 해낸다는 성취감이 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짜릿한 기분이었죠. 한데 제가 잘했나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해냈다.”
광두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뭐냐?”
“뜻밖에 이 얼굴이 여자들에게 통한다는 것을요.”
뜻밖이란 말은 사실 겸손한 표현이다. 광두는 제법 괜찮은 외모에 언변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심성이 착했으니까.
“취향이 특이한 여자들도 있는 법이니까.”
“후후, 질투하시는군요.”
“내가 요즘 누굴 포기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런 말 못할 건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송소저는 버리면 안 돼요! 그렇게 예쁜 여자 다신 못 만나요! 성질 더러워도 좀 참아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은 송화린에게 관심 없다. 연애나 하면서 보낼 여유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당장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서 가주님께 알려야지요.”
“아니. 우린 안 돌아간다.
“안 돌아가면요?”
“이번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광두가 나를 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내 말이나 반응으로 황당해 할 때 주로 짓는 표정이다.
나는 이때가 제일 재밌다.
“방금 말씀하신 ‘우리’가 혹시 벽씨검문 개차반 벽공자와 마당이나 쓸다가 사흘 전에 처음 칼을 차본 미친 대가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죠?”
“네가 말한 우리가 벽씨검문의 철든 벽공자님과 훌륭하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빛나는 대가리라면, 맞아.”
이윽고 광두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제일 비싼 술 시켜줘요.”
녀석은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안다. 하지만 돌아가자고 설득하지 않는다. 나를 믿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광두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서 나아가느냐, 물러나느냐의 선택에서 그는 나아가는 쪽을 택하는 성격인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기질은 곧잘 무모함을 용기로 포장하곤 하니까.
어쨌든 나는 이런 광두의 기질이 싫지 않았다. 나 역시 평생을 물러서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낭인들을 모은 이유가 우릴 공격하기 위함이라면…… 관계된 자들을 모두 죽일 거야.”
무림문파에서 은밀히 낭인을 모으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다. 상대방 문파를 박살내려고 할 때.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싸움판에 낭인들이 끼면 아주 더러워진다. 남편 앞에서 아내를 겁탈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니까.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광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시군요.”
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에 대해 말할 땐, 난 언제나 진심이다.”
자극을 받은 광두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었다.
“전 이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너를 기다렸던 것처럼.”
“혼자서 어쩌시려고요?”
그에게 대답해줄 수 없다.
이제부터 전생의 내가 되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