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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방(5)
“……죽인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서 돼지먹이로 줄 거야. 살가죽을 다 벗겨서 소금통에 던져 버릴 거다. 배를 갈라서…….”
쉴 새 없이 지독한 독설을 내뱉고 있는 사람은 양기강이었다. 이가 왕창 부러져 발음이 새고 있었지만 그는 원망과 저주를 끝없이 쏟아냈다.
“……뼈 마디마디를 다 부러뜨려 줄 거다. 질질 짜면서 애원하겠지.”
양기강은 자포자기를 하듯 분노에 몸을 내맡겼다.
옆에서 시중들고 있는 시비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팔다리를 칭칭 감은 붕대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약향 때문이 아니었다. 저 지독한 욕설과 저주 때문도 아니었다.
앞서 시중을 들던 시비가 양기강에게 목을 잡아 뜯겨서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시체는 내원 무인들에 의해 은밀히 버려졌다고 한다.
자신도 조금만 실수를 하면…… 아니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양기강의 눈에 거슬리는 순간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 이 욕설과 저주가 ‘이 미친 년! 너도 나를 무시하지?’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향하게 될까 두려웠다.
다행히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양기철이 들어왔다.
“나가 있도록.”
“네.”
문 앞에서 시비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다시 돌아왔을 때 양기강이 죽어 있기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실력 좋은 의원이 최고의 약을 써서 치료하고 있었으니까.
양기강은 애절한 눈빛으로 양기철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하지만 아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더 없이 차가웠다.
“멍청한 녀석. 그깟 놈에게 당하다니.”
순간 양기강이 울컥했다.
“그 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는 말을 하려다 이내 말문을 닫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것이다.
“벽리단을 죽여주십시오! 그 새끼를 낳은 년놈도, 아니, 그냥 벽씨검문의 씨를 말려주십시오!”
보통의 경우라면 아들을 야단쳐야 할 순간이리라.
하지만 앞서 벽씨검문에서 보여줬던 행동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바뀌겠는가?
“그럴 작정이다.”
그날 자신을 무시하던 벽도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수하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다른 어떤 악의보다 경멸은 쉽게 잊혀 지지 않는 법.
‘제까짓 것이! 산동에서 열 손가락에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들이!’
양기강이 애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서 죽일 것이다. 돈은 받아내지 못하더라도, 목숨은 받아낼 것이다.
아버지의 분노를 느낀 양기강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당장 본방의 무인들을 보내서 단숨에 휩쓸어 버리십시오!”
“멍청한! 저쪽에서도 대비하고 있을 터, 본방의 피해가 너무 커질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칠 명분이 없었다. 애들 투덕거림에 전쟁을 일으킨다? 비난은 둘째 치고 강호공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 정도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불렀다.”
누구인지를 짐작한 양기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혈견(血犬)을 부르셨군요?”
양기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잡아먹혔는지 모르는 소인배의 분노처럼, 그의 미소에는 저열한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나를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지.”
* * *
광두와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양소방이 있는 동평(東平)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겠지만, 아직 말 타는 것에 익숙지 않은 광두를 위해 마차를 빌린 것이다. 다행히 몇 시진 정도 늦어지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두두두두두.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환생한지 이십 여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죽음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혹시 내가 다른 시대에 환생한 것인지 확인까지 해봤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확히 내가 죽던 날, 내가 새롭게 환생했다.
무림맹주의 죽음이란 사건이 가지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아직까진 이해할 수 있다. 발표 연기가 한 달을 지나 두 달이 되고 세 달이 된다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혹시 숨겨둔 돈이라도 있으신가요?”
“나 그런 사람이었냐? 전장에 한 이만 냥쯤 저축해 두는.”
광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요.”
“그럼 없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삼십년 이상을 맹주로 살았는데 몇 만 냥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대륙전장에 비밀계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어려서부터 무공에만 미쳐 살았다. 상대와 싸워 이기고, 점점 강해지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강해진다는 기쁨에 황금은 그저 돌멩이에 불과했다.
이후 맹주가 되고 나니까 딱히 돈이 필요가 없었다. 옷을 사겠는가? 밥을 사먹겠는가? 꼭 필요한 돈이 있으면 재당(財堂)에서 알아서 가져다 줬다.
그때 작정하고 돈을 챙기려고 들었다면 몇 만 냥이 아니라 수백만 냥도 챙길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무림맹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
맹주로 살면서 내게 어마어마한 투자가 있었다. 내가 복용한 영약만 해도 돈으로 따질 수도 없는 액수다.
물론 당시에는 흑도십삼맹과 혈천신교를 이기기 위해 맹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복용시킨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덕분에 난 사 갑자라는 엄청난 내공을 지닐 수 있었다. 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무슨 책을 그렇게 읽고 계세요?”
마차를 타고 가면서 내가 읽고 있던 책자가 궁금한 모양이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들어 표지를 보여주었다.
“백월검법(白月劍法)? 헉!”
화들짝 놀란 광두가 속삭이며 말했다.
“이건 가주님의 독문무공이잖아요?”
나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맞아. 한데 갑자기 왜 이렇게 속삭여?”
“귀한 무공이니까요. 밖에 마부가 듣기라도 하면요?”
“이러니까 진짜 수상해 보인다는 생각은 안 들고?”
“앗.”
광두가 이번에는 마부석에 다 들리게 말했다.
“하하, 백월검법이야 별 것 아닌 검법이지요.”
“아버지께 다 일러야지.”
“아, 대체 왜 이러세요! 가주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검법이 백월검법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정말 수상하게 여기겠다.”
“어쩌라고요!”
백월검법에 대한 내 솔직한 감상은 이렇다.
‘나쁘지 않네.’
백월검법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 무학의 경지가 워낙 높아서다. 평가하자면 중상(中上) 정도의 무공이라 볼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가전무공을 익히려는 것은 내 본신무공을 숨기기 위해서다.
“한데 그 귀한 것을 이렇게 막 들고 나와도 되요?”
“필사본(筆寫本)이야. 진본(眞本)은 따로 가지고 계시더라고.”
“아니,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누가 이 비급을 빼앗아가서 익히면 어떻게 하나?”
“네. 바로 그거죠.”
“백월검법을 운용하는 고유의 심법을 모르면 이것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 그렇군요.”
수련하면서 다시 읽어보겠다며 아버지에게 필사본을 받아올 때, 심법서도 한 번 읽어보고 왔다. 역시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핑계였다.
그 한 번 읽는 것으로 심법서의 구결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기억력이 좋아진데다가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두 개의 심법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다. 잘못하다간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보통 강호인들의 이야기고 내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내 심법인 천무호심결에 비견될만한 극상승의 심법이라면 모를까, 백월검법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심법 정도는 편하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에는 백월검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도련님이 뭔가를 읽는 모습, 많이 낯서네요. 도련님 인생의 독서라곤 주점의 차림판과 기녀들의 출석조판이 전부였는데 말이죠.”
비급 너머로 스윽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너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광두가 움찔했다.
“아뇨.”
“대답이 좀 늦네.”
“아닙니다. 제 주제에 무슨 무공을요?”
“네 주제가 어때서? 양기강 같은 놈도 무공을 배우는데.”
“그거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고요. 어려서부터 좋은 사부도 있었을 테고요.”
“강호인이 되는데 중요한 것은 집안이나 사부가 아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광두가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내가 대답을 아끼자 녀석이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천부적인 재능? 골격? 아니면 의지 같은 건가요? 아, 노력이죠? 그렇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인연.”
“무슨 인연요?”
“강호와의 인연.”
광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차례 눈을 껌벅이더니 이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에이, 그게 뭐에요? 말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시지.”
광두는 애초에 답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고 투덜댔지만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강호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강호와 인연이 없으면 일찍 죽는다. 인연이 없으면 악연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도저도 아닌데 뛰어들면 병풍처럼 살거나 의도치 않는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마차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광두가 한참 만에 물었다.
“인연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너머로 연지빛 노을이 번져가고 있었다.
“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