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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제일미(3)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옆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송화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을 건 여인은 자신의 호위무인인 수란(洙蘭)이었다.
“별 일 아니야.”
송화린이 들고 있던 차를 마시려다 다시 내려놓았다. 따뜻했던 차는 이미 다 식어버린 후였다.
그녀는 벽리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만큼 쉽게 바뀌는 존재도 없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릴 때와 저 말을 할 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송화린이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봤자 부모 등골이나 빨아먹는 파락호일 뿐이야.”
수란은 자신의 주인이 떨쳐낸 상념의 주인공이 누군지 짐작했다.
“벽공자 요즘 무공수련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공수련을?”
“네. 생전에 없던 일이라서 벽씨검문 내부에서도 다들 놀라고 있나 봅니다.”
“이제 와서? 너무 늦지 않았나?”
“제 생각에는 아가씨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만.”
송화린이 벽리단을 떠올렸다. 냉정한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전혀 잘 보일 생각이 없던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꼬추 달린 놈이라면 절대 그러지 못합니다.”
송화린이 얼굴을 붉히자 수란이 재빨리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둥이가 방정을 떨었습니다.”
수란의 성격이 사내처럼 털털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에 대해 야단치진 않았다.
“사람마다 이성에 대한 취향이 다를 수 있지.”
“아가씨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대화를 이어봐야 미모에 금칠만 더해질 것이 분명했기에 송화린은 그저 웃고 말았다.
“참, 오늘 후기지수들끼리 회합이 있습니다.”
“꼭 가야 해?”
“네. 가셔야 합니다.
양소방(陽小?)의 양공자가 꼭 참석해 달라고 몇 번이나 전갈을 보냈습니다. 아시다시피 양소방은…….”
“됐어. 갈 테니까 그만.”
“죄송합니다. 외출채비 하겠습니다.”
수란이 방을 나서려는데 송화린이 불쑥 물었다.
“사람이 쉽게 변한다고 생각해?”
“쉽게는 아니지만……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수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도 많이 변하셨잖아요?”
그래,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수련을 떠나기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 적어도 그 말만큼은 벽리단의 말이 맞는 걸로 치자.
송화린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준비 해. 가자.”
예전이라면 내키지 않는 자리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싫은 일도 웃으며 할 수 있다. 자신은 변했고, 앞으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고인 물이 되지 않을 거야.’
* * *
오랜만에 저잣거리에 있는 객잔에 나갔다.
내 소문을 듣기 위해서였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란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이리 발표가 늦어지는 것일까?
마음 같아선 당장에 무림맹 본단으로 달려가 갈사량을 만나 물어보고 싶었다. 일처리가 왜 이리 늦어지느냐고?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앉아 있는데 그곳으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 송화린도 있었다. 눈에 띄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그녀다.
“어?”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일행들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함께 멈췄다. 나를 알아본 일행들의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다들 못마땅해 하는 기색. 나와 그들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리라.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순간의 눈맞춤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심히 기분이 거슬린 이가 있었다.
그녀 옆에 있던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비싼 옷에 치렁치렁한 금붙이 장식, 과도하게 화려한 검집, 상대를 얕잡아 보는 듯한 눈빛, 경망스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까지. 그는 겉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새끼, 죽다 살아났다더니? 멀쩡하네?”
놈이 격하게 아는 척 했지만 나는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 대꾸도 않자, 놈의 입꼬리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아마도 내 반응이 송화린 앞에서의 대찬 허세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무공수련을 한다면서? 왜? 나 패려고?”
그냥 두면 머리를 툭툭 건들 수도 있겠다 싶어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
“무공수련을 어디 사람 패려고 하나? 죽이고 싶은 놈 죽여 버리려고 하지.”
내 눈빛에서 평소와 다른 힘이 느껴졌는지, 놈이 흠칫 놀랐다. 이내 스스로 놀랐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는지 독설을 내뱉었다.
“송소저에게 처 맞으며 눈물을 질질 흘렸다면서?”
그러자 저만치 서 있던 송화린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굳이 말해야 아오? 왜 그러시오? 이놈이 신경 쓰이시오?”
“전혀!”
송화린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딱 한마디로 나도, 이 사내놈도 모두 짜증난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되는 시비.
“빚쟁이새끼, 오늘따라 눈빛 더럽게 마음에 안 드네.”
빚쟁이? 내가 이놈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나? 나중에 광두에게 물어봐야겠군.
어쨌든 굳이 이놈과 충돌할 마음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론 눈깔에 힘 빼고 다녀!”
송화린을 의식한 빤한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풋내기 어린애들에게 감정 소모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왜 벽리단으로 환생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한심한 짓으로 낭비하라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송화린과 함께 서 있는 젊은이들의 분위기나 복장으로 볼 때 모두 지역유지나 무림문파 출신들이었다.
아서라, 이놈들아. 이 강호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너희 옆에 서 있다. 그녀가 사파의 악귀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줄은 알고나 있느냐?
맹주 시절 술자리에서 내가 젊은 무인들에게 미녀에 대해 해준 말이 있었다.
“비록 그녀가 악녀가 아니더라도, 그 아름다움이 너희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결코 농담이 아닌 말이기도 했다.
이 강호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살인은 돈이 얽히거나 여자가 얽히거나, 그 둘이 모두 얽히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여자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위험은 더욱 치명적이다.
그녀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면 그 위험은 대재앙급이리라.
내가 스쳐지나갈 때,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 * *
다음날 오후, 새로운 인연이 있었다.
연무장을 가로질러가는데 마침 지나가던 중년무인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벽공자. 요즘 무공수련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서중(徐仲).
우리 가문에 검대가 있는데 그 검대를 책임지고 있는 대주였다. 광두에게 누군지 말만 들었을 뿐, 아직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굳이 대답하지 않더라도 그는 내 눈빛과 몸의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의 변화만으로 칭찬과 격려를 끌어내기에는 이전의 삶이 너무 엉망이었다.
“지금껏 자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가주님은 물론이고 가문 전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나?”
부리부리한 두 눈에 담긴 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를 걱정하는 질책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서중의 당황이 느껴졌다. 아마도 평소와 다른 내 반응 때문이리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 서중뿐만 아니라 벽리단을 아는 모두에게도.
“앞으로도 지켜보겠네.”
돌아서려는 그에게 물었다.
“한데 조금 전에 하신 말씀 중에 저 때문에 가문 전체가 힘들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서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겐가?”
“아닙니다.”
더 묻지 않고 물러섰다. 굳이 그의 감정을 거스르면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내용을 누구보다 잘 가르쳐줄 그 사람은 정원을 청소하느라 바빴다.
“다 늦게 왜 이 난리냐?”
보통 청소는 아침 일찍 했다. 한데 광두는 다 늦은 오후에 청소를 한다고 수선을 떨고 있었다.
“이따가 양방주가 온다고 기별이 왔어요.”
“양방주?”
“정말 하나도 기억 안나요?”
“안 나.”
매 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정말 기억을 잃었다고 믿어주는 것도 그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이런 부연설명을 해주진 않았을 테니까.
“양소방주 양기철(楊基哲) 말입니다. 양소방은 산동에서 가장 큰 방파지요. 한땐 우리가 제일 잘 나갔었는데.”
광두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산동에는 이십여 개의 크고 작은 문파들이 존재했는데, 힘과 영향력을 따졌을 때 우리 벽씨검문이 산동제일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것이 과거의 영광이란 점. 지금은 양소방이 일 위고 송가장이 이 위, 우리 가문은 아예 십 위권 밖으로 밀려났다고 했다.
“왜 우리가 그렇게 떨어진 거지?”
서중이 했던 말이 광두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지금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죠?”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역시 나 때문이군.”
“그동안 공자님이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돈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재정이 어려워 지다보니 무인 숫자도 줄여야 했고.”
“혹시 그 때문에 빚을 졌나?”
“당연히요. 여러 군데 빚을 졌지만 그 중에서도 양소방에 큰돈을 빌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 어제 객잔에서 봤던 놈의 인상착의를 말했다. 과연 놈이 바로 양소방주의 아들인 양기강(楊基强)이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어제 객잔에서 봤던 놈이 왜 내게 빚쟁이란 말을 했는지. 왜 그리 기세등등했는지.
“빚이 얼마나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