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종(終) ― 천룡성에서 왔다
십천야의 토벌이 있은 지로부터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림은 언제나처럼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지만, 그 모든 일은 매번 그래 왔던 것처럼 매듭이 지어졌다. 그러던 도중 무림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수백 년 전 사라졌던 종교인 수라혈교(修羅血敎).
그들이 부활한 것이다.
그들을 이끄는 건 오래전 사라졌다고 알려진 수라혈교의 모든 무공을 전수받은 인물이었는데, 그자는 스스로를 혈마왕이라 칭했다.
수라혈교는 급속도로 세력을 사방으로 뻗치기 시작했는데 그 위세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거점으로 삼은 새외의 지역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것으로 모자라 중원까지 힘을 뻗치며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의 영역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수라혈교가 위세를 떨치게 된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건 그들의 잔혹함 때문이었다.
수라혈교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로지 폐허만이 남았으니까. 그들은 무인이 아닌 일반인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베어 넘겼고,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될 패악질을 일삼았다.
그 같은 공포스러운 행보에 많은 이들이 수라혈교에게 굴복했다.
계속되는 그들의 악행, 그건 오늘도 변함이 없었다.
수라혈교의 무인들은 새외에서 중원으로 들어와 인근 마을을 습격했다.
도가 넘는 행동에 결국 무림맹과 마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고, 수라혈교 또한 그들을 피하지 않고 희대의 싸움을 벌이기 위해 한창 세력을 넓히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오늘 수라혈교가 장악한 이 마을은 위치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한 거점이 될 곳이었다.
무려 이천에 달하는 수라혈교의 무인들이 투입되어서, 마을을 지키고 있던 무림의 문파들이 대항하였지만 결국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너무도 수월하게 마을을 장악한 혈마왕은 이 마을에 있는 곳 중 가장 좋은 곳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고 수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지키고 있던 무인들의 처리는 모두 끝났고,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광장에 잡아 두었습니다.”
“쓸 만한 것들은?”
질문을 던지는 혈마왕은 무척이나 커다란 체구의 사내였다. 키도 컸지만, 덩치 또한 무척이나 거대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는 얼굴도 무척이나 험상궂었다. 거기다 덥수룩하게 얼굴을 뒤덮은 수염은 더더욱 거친 느낌을 풍기게 했다.
그런 그와 마주하고 있는 수하는 황웅이라는 이름의 무인이었다. 혈마왕의 최측근 중 하나였고, 수라혈교 내의 손꼽히는 고수이기도 했다.
황웅이 곧장 답했다.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라 그런지 제법 약탈하는 맛이 나더군요.”
말과 함께 황웅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대로 지금 장악한 이 마을은 꽤 규모가 컸기에 그 안에서 얻어 낼 재물 또한 많았다. 결과를 전해 들은 혈마왕이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그가 즐거운 듯 물었다.
“오늘도 준비할까요?”
물어 오는 황웅의 말을 들은 혈마왕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수라혈교의 수장인 혈마왕에게는 무척이나 잔인한 취미가 있었는데…….
“당연한 걸 묻는구나. 열 명 정도 추려서 데리고 오너라.”
말을 끝낸 그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이내 검날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검을 날카롭게 만드는 데는 아이들의 피만 한 것이 없지.”
혈마왕은 주기적으로 직접 아이들을 베며 그 피를 검에 묻혔다. 그는 사람의 피를 머금을수록 자신의 검이 강해질 거라 믿었다.
특히나 아이들의 피는 더더욱 효과가 있을 거라 여겼다.
너무도 끔찍한 말을 내뱉는 혈마왕을 향해 황웅이 말했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혈마왕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황웅을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긴. 언제나처럼 다 죽여.”
매번 해 왔던 명령이었기에 말을 하는 혈마왕도, 그걸 전달받은 그도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였다.
그만큼 이런 끔찍한 상황이 익숙하다는 소리였다.
혈마왕의 명령을 전달받은 황웅은 곧장 마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광장을 향해 움직였다. 혈마왕이 쉬고 있는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에 도착하는 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광장에는 마을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는 수라혈교의 많은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을 습격한 인원들 중 절반가량은 아직까지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고 있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광장에 도착한 황웅이 인근에 있는 이를 향해 손짓했다.
그가 다가온 수하를 향해 짧게 말했다.
“평소처럼 진행해. 아이들 열 명 정도만 끌고 오고, 나머지는 전부 죽여.”
황웅의 명령에 수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마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수하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선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가, 갑자기 아이는 왜……!”
품에 안고 있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자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렇지만 수라혈교의 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으로 상대를 쳐 냈다.
퍽!
얼굴에 제대로 주먹을 맞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대로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인근에 있는 아이들 열 명을 강제로 끌고 온 그가 혈마왕의 명을 받고 온 황웅에게 말했다.
“끌고 왔습니다.”
“뭐, 쓸 만해 보이네. 나머지들은 이제 빨리 정리하고.”
혈마왕에게 넘길 아이들의 상태를 슬쩍 확인한 황웅이 맘에 들었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아이들을 향해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꼬맹이들아, 이 무서운 아저씨는 말이야, 말 안 듣는 새끼들을 제일 싫어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얌전이들 따라와. 그렇지 않으면…….”
황웅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더니 이내 그걸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곤 잔인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목을 잘라서 동물의 먹잇감으로 던져 버릴 테니.”
황웅의 소름 돋는 경고에 아이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이 맘에 드는지 황웅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막 몸을 돌리는 그때.
턱.
황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발목을 잡은 사내 때문이었다.
아까 전에 자식을 끌고 오려 할 때 그걸 저지하다 일격을 맞고 쓰러졌던 자였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와 힘겹게 황웅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그가 피와 눈물이 뒤섞인 얼굴로 간절히 빌었다.
“어, 어르신 제발 아이들은 살려 주십시오. 그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발 아량을 베푸셔서…….”
“이 새끼가!”
황웅은 곧바로 반대편 발로 발목에 손을 댄 상대를 걷어찼다. 그대로 그자는 바닥을 구르며 밀려 나갔고, 황웅의 분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밀려 나간 상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비웃음을 흘린 황웅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서슬 퍼런 빛을 쏟아 냈다.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진 대가는 죽음으로…….”
잔인한 미소와 함께 황웅의 손에 들린 검이 아이의 아버지에게로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득, 드드드득!
그보다 먼저 기괴한 소리와 함께 황웅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쿵.
반으로 갈라진 몸이 그대로 쓰러졌고, 황웅은 즉사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웅의 주변에 있던 수라혈교 무인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때였다,
“하, 무림맹과 마교 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작하려 했는데 하여튼 나쁜 새끼들은 그새를 못 참는다니까.”
말과 함께 멀리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답지 않게 곱상한 외모, 그리고 볼에 있는 긴 검상.
대홍련의 련주, 단엽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왜 네가 한 것처럼 멋있는 척이야. 저놈을 죽인 건 난데.”
마치 황웅을 자기가 죽인 것처럼 말하는 단엽을 향해 불만 어린 말을 토해 내는 건 다름 아닌 한천이었다.
그는 예전과 변함없는 유쾌한 얼굴로 수라혈교의 무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천이 가볍게 주변을 둘러봤다.
현재는 절반가량만이 공터에 있는 상황인데도, 그 숫자가 천 명이 훌쩍 넘을 정도였다.
수라혈교의 무인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둘을 향해 무서울 정도의 살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그 같은 모습에 한천이 중얼거렸다.
“휴우, 어떻게 하나같이 저렇게 무섭게들 생겼냐. 이놈들은 얼굴 보고 뽑나?”
한천의 말을 들으며 단엽은 손에 권갑을 착용했다. 그의 두 주먹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적들을 향해 다가가며 단엽이 투덜거렸다.
“참내. 이렇게 많은 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하여튼 주인 하나 잘못 만나 가지고 이게 웬 고생인지, 원.”
상대의 숫자를 보며 혀를 내두르는 단엽을 향해 한천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야? 겁먹었냐?”
그 말에 단엽이 발끈했다.
“겁은 무슨! 난 태어나서 겁이라는 걸 먹어 본 적이 없는 남자라고. 이거 왜 이래?”
호언장담을 내뱉은 단엽이 자리에서 멈춰 선 채로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곧 시작될 싸움을 위해 자세를 잡는 그를 향해 한천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가 볼까, 단엽?”
한천을 슬쩍 바라보며 단엽이 투덜댔다.
“내 뒤나 잘 따라오라고.”
말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던 단엽이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 순간 마을의 입구에서 몇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뒤따라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홍련이었다.
* * *
단엽과 한천이 대홍련의 무인들을 이끌고 마을에 들어선 직후.
혈마왕은 여전히 그 거처에 홀로 자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침상에 기대어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혈마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이들을 데리러 간 것이 언제인데, 아직까지 오지 않는 게야.”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던 혈마왕은 이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을 감지했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수하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렇게 넘어가기엔 뭔가 무기끼리 충돌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 사실에 의아한 듯 혈마왕이 움직이려 하는 그때였다.
덜컹!
헐레벌떡 누군가가 다가온다 싶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수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서둘러 소리쳤다.
“교, 교주님!”
데리고 와야 할 아이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잔뜩 긴장한 표정의 수하만 들이닥치자, 혈마왕이 불쾌한 듯 표정을 구겼다.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이냐?”
“기습입니다! 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수하는 다급히 보고했지만, 그걸 전해 들은 혈마왕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무림맹 놈들답지 않게 제법 빠르게 움직였군.”
이곳은 무림맹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인근에 있던 무림맹과 관련된 문파의 무인들이 나타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수하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림맹이 아닙니다. 대홍련입니다.”
“대홍련? 그 사파 놈들이 나타났다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혈마왕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대홍련의 영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위치였다.
십천야가 무너지고 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 사파 중 세 손가락 안에 들던 대홍련은 이제 그들 중 독보적인 세력이 되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잠시 멈칫했던 혈마왕이지만 이내 그가 코웃음을 쳤다.
무림맹과 마교와의 일전까지도 준비하는 수라혈교가 아니던가. 대홍련의 세력이 크다고 한들 무림맹과 마교와는 비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나타났다 해서 자신이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대홍련이 나타났다는 말에 혈마왕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한동안 시시한 싸움만 해 왔던 탓에 제법 몸이 근질근질했거늘, 사파의 우두머리 격인 대홍련이 나타났다니 절로 투지가 끓어오른 것이다.
혈마왕이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몇 놈이나 왔더냐? 천 명? 이천 명?”
어서 말해 보라는 듯한 혈마왕의 물음에 수하가 멈칫하다가 이내 말을 받았다.
“이, 이백이 조금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백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우리를 공격했다고?”
이곳에 있는 수라혈교의 무인만 해도 이천에 육박한다.
그런데 고작 이백이라니…… 너무 우습지 않은가.
잠깐 투지가 끓어올랐던 혈마왕이었지만 상대의 숫자를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관심이 사그라졌다.
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 그 정도면 내가 나설 이유도 없겠군. 끝내는 대로 보고하도록 해. 서둘러 아이들도 데려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혈마왕이 다시금 몸을 기대어 앉을 때였다.
수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 그것이…… 교주님이 나서지 않으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백 명이라 하지 않았더냐!”
혈마왕이 버럭 소리쳤다.
고작 이백 명을 상대하는 일에 자기를 귀찮게 하는 것이 언짢았기 때문이다. 혈마왕의 성격을 아는 수하였기에 그는 움찔하면서도 상황을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옙! 그런데 그 이백 명에게…… 아니 정확하게는 그 안에 있는 두 명에게 저희 수라혈교 무인들이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두 명?”
단둘에게 수라혈교의 정예 무인들이 당하고 있다는 말에 혈마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표정을 구겼던 혈마왕이 순간 움찔했다.
수라혈교의 정예 무인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정도의 실력자를 떠올린 탓이다.
무림은 넓고, 뛰어난 무인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중 수라혈교의 정예 무인들을 단신으로 곤란하게 할 실력자에, 대홍련에 속한 자라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홍련주 단엽? 그가 직접 이곳에 왔다고?’
비록 사파라고는 하지만 단엽은 대홍련의 수장이다.
그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이 먼 곳까지 공격을 감행해 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 두 명 중 나머지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단엽이라면 내가 나서야 한다.’
단엽은 사파 제일의 고수다.
아니, 어쩌면 전 중원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실력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상대가 단엽이라는 걸 눈치챈 순간 혈마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소리쳤다.
“안내해라!”
외침에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들어온 문을 통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수하와 함께 혈마왕이 막 외부로 발을 디디는 찰나!
쒜에에엣!
귓가를 울리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대검 한 자루가 앞장서서 움직이던 수하를 그대로 갈라 버렸다.
쾅!
너무도 빠르고 파괴적인 일격!
땅에 박힌 대검은 아직까지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혈마왕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이고는 땅에 박힌 대검을 바라봤다.
그 대검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물건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들고 싸울 만한 무기로는 보이지 않거늘…….
놀란 혈마왕이 대검이 날아든 위쪽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왓!”
그의 외침이 터져 나온 직후였다.
옆에 위치한 커다란 나무 위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툭.
바닥에 박혀 있는 대검의 옆으로 가볍게 착지한 건 한 명의 여인이었다.
긴 검은 생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렸고, 걸치고 있는 백의는 그녀의 신비함을 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쪽 손바닥을 감싸고 있는 붉은 장신구.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
백아린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어깨에 자리하고 있던 치치가 빠르게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상대를 확인한 혈마왕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천하를 호령하는 악인을 앞에 두고 있었거늘 백아린은 전혀 긴장하지 않고 바닥에 박힌 자신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파앙.
그녀는 뽑아 든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궁금해할 것 없고, 그냥 이것만 알면 돼.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거라는 거.”
“크, 크크크! 단단히 미쳤구나.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냐! 난 혈마왕이다! 수라혈교의 교주이자 천하의 주인이 될……!”
바로 그때였다.
데구루루르.
순간 뭔가가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걸 발견한 혈마왕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것이 보통의 구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고작 구슬에 놀라 피하려고 했던 자신의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분노와 함께 발아래에 놓인 구슬을 발로 으깨 버리려던 혈마왕이 갑자기 멈칫했다. 구슬에 뭔가가 적혀 있다는 걸 알아차린 탓이다.
그가 허리를 굽혀 구슬을 주워 들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구슬에 적힌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툭.
혈마왕이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떨어트렸다.
그 구슬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천(天)이라는 글자가 하나 박혀 있는 걸 제외하면.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검신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이내 그 붉은 검신을 가진 천인혼의 주인이 천천히 달빛 아래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림에는 오래된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세상이 혼탁해지고, 악인이 나타나 힘없는 약자들을 괴롭힐 때…… 그들이 온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혈마왕이 겁을 먹은 듯 뒷걸음질 치는 그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천룡성에서 왔다.”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