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붕괴 ― 눈치챘나 보네 (1)
백아린이 가져가 보라며 책상 위에 내려놓은 비밀 장부. 그것을 바라보는 주란의 눈동자는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저 장부만 가져갈 수 있다면 설령 천지광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은 지금까지와 같은 큰 힘을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저걸 가져가기 위해 바로 도망치지 않고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가져갈 수가 없었다.
몇 걸음만 다가가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란은 도저히 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백아린 때문이었다.
와서 가져가 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에 주란은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주란은 분노가 치밀었다.
덩달아 처음 마주했을 때 들었던 의문이 다시금 솟구쳤다.
‘분명 죽었는데…….’
십천야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반조와 매유검이 나섰고, 그 외에도 우내이십일성 둘과 야율인까지 투입된 작전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이끄는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까지 함께 움직였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분명 매유검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백아린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음을 알렸다고 했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백아린이 살아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주란은 백아린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백아린이 움켜쥐고 있던 대검을 뽑아 들었다.
스윽.
“저번에 끝내지 못한 싸움, 이번에 마무리해야겠네.”
당시엔 운 좋게 반조의 도움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대검을 든 백아린의 모습에 주란은 서둘러 자신의 검을 뽑았다.
차앙!
순간 백아린의 몸이 근처까지 치고 들어왔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대검이 주란을 덮쳐 왔다. 서둘러 검으로 막아 내긴 했지만…….
쾅!
밀려 나간 그녀가 벽을 뚫고 바깥으로 나뒹굴었다.
튕겨져 나간 주란을 상대하기 위해, 방금 막 생겨난 구멍으로 백아린이 걸어 나왔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주란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단 한 번의 격돌.
그 한 번으로 속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너무 강해.’
어떻게든 이 싸움에서 살아남고 빼앗긴 비밀 장부를 회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과거에 싸웠던 당시에도 주란은 백아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었다.
그리고 주란에게는 끔찍하게도, 백아린은 그때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천무진을 통해 잔마폭멸류를 익히게 되었으니까.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기에 주란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지만 그녀의 거처 내부에서는 별다른 조력자가 보이지 않았다.
비밀 거점이다 보니 본거지에 있을 때보다 옆에 두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었으나, 이렇게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최소한 몇 명 정도는 보여야 정상이었는데…….
백아린이 대검을 가볍게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또 누군가 도와주지 않을까 눈을 굴리는 모양새인데 이번엔 힘들 거야. 이미 내가 다 손을 써 놨거든.”
백아린의 말을 듣고서야 주란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오기 전에 이미 이 거점에 자리하고 있던 그녀의 수하들을 제압해 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외부에서 오가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점에 있던 무인들이 모두 무림맹과 마교의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입구로 향해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한들 주란이 도움을 요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백아린이 그걸 그냥 보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이잇!”
주란이 빠르게 회전하며 검에서 검기를 뽑아냈다.
촤르르륵! 촤악!
검기들이 주변을 뒤흔들었지만 이미 그곳에 백아린은 없었다. 그녀의 대검이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빠르게 낙하했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검강에 주란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을 견뎌 내지는 못했는지 주란의 몸이 폭발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놀란 그녀가 검을 앞으로 마구 휘저으며 상대의 힘에 저항했다.
가까스로 버텨 내는 건 성공했지만 그 순간…….
“어엇?”
갑자기 아래로 파고드는 무형의 기운을 눈치챈 주란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해 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무형의 기운이 복부를 가격했다.
퍼엉!
폭발음과 함께 주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이내 곤두박질쳤다.
가까스로 허공에서 균형을 잡으며 바닥에 착지하긴 했지만, 입에서는 연달아 피를 토해 냈다.
“우웁! 웩!”
피를 토하면서도 주란은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백아린이 다시금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솟구치는 강기들이 주란을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콰콰콰콰쾅!
서둘러 호신강기를 불러일으켜 충격을 완화시키긴 했지만 주란은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그녀의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시간을 끌 싸움이 아니라 생각한 백아린이 처음부터 내력을 집중시키며 공격을 쏟아부었고, 그걸 감당하기에는 둘 사이에 실력 차가 너무도 컸다.
강한 타격을 입은 탓인지 주란의 이마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많은 양의 피였다.
주란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죽여야 하는데…….’
허리를 굽힌 채로 비틀거리던 주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백아린을 향해 힘겹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은 꽤나 타격을 입은 상태인데 상대에게는 상처 하나 주지 못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지자 다시금 머리가 복잡해졌다.
동시에 몇 가지 의문들이 들기 시작했다.
백아린이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는 어차피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이미 머리에서 지웠다.
지금 궁금한 건 대체 어떻게 백아린이 자신의 거처를 이토록 빠르게 찾아내서, 숨겨 놓은 비밀 장부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냐는 거다.
말대로 이곳은 비밀 장소.
외부인이 주란의 거처를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비밀 장부의 위치도 측근에게조차 발설하지 않고 숨겨 뒀었다. 그런 걸 이곳에 처음 오는 상대가 단번에 찾았다는 것이 더욱 의문이었다.
주란의 거처야 내부의 조력자가 알려 줬다고 해도 대체 비밀 장부의 위치는 어떻게…….
바로 그 순간 주란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최근 들어 의아해했던 수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걸 떠올리자, 그것들 중 절반 이상이 모두 해결됐다.
주란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설마 내부의 조력자가 그…….”
“눈치챘나 보네.”
백아린이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내 대검을 높게 치켜든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 * *
“막아! 어떻게든 막아!”
선두에 선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자운은 목소리를 높여 옆에 있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진법을 통해 열린 문으로 무림맹과 마교의 연합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자운은 마치 매유검처럼 장포를 눌러 쓴 채로 싸우고 있었다.
차기 무림맹주 후보 중 유력한 인사인 자운이다.
이곳에서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됐다.
선두에서 적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자운의 표정이 착잡했다.
‘점점 많아지는군.’
진법의 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고 있었고, 그 말은 곧 더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오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지금도 이렇게 밀리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더욱 많은 숫자의 무인들이 들이닥치게 된다면 그때는…….
‘대체 지원군은 언제 오는 거야!’
곧 지원군이 올 거라는 천지광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자운은 그 말에 온 희망을 걸고 있었다.
자운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향해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스스스슥! 퓩!
한 명의 상대를 곧장 쓰러트린 자운은 이내 옆에 있는 수하들을 향해 빠르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무너지기 시작한 쪽에 보다 많은 무인들을 투입해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자운의 계획과는 달리 그곳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진법을 통해 뒤이어 들어온 일련의 무리들이 정확하게 밀리고 있는 쪽을 노리고 집중 공격을 가한 탓이다.
자운이 서둘러 소리쳤다.
“버텨! 곧 지원군이 온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버티면…….”
목소리를 높이며 십천야 쪽 무인들에게 힘을 불어넣던 자운이 움찔했다. 그건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명의 상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싸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운 하나만을 보며 다가오는 상대.
‘……대홍련주 단엽.’
예전에 봤을 때는 부련주였지만 이제는 사파의 거두인 대홍련을 이끄는 수장이 된 그다. 그런 단엽이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자운이 서둘러 수하들 사이로 몸을 감추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젠장, 귀찮은 놈이니 피해야겠군.’
단엽의 실력을 직접 눈으로 봤던 자운이다. 그랬기에 안다.
그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고수라는 걸.
거기다 그 집요함까지 생각한다면 눈에 들지 않도록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게 수하들 사이에 숨은 채로 명령을 내리려던 자운이었다.
그때였다.
“자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단엽의 외침에 자운이 움찔했다. 처음엔 그저 자신을 찾는 것이기를 바랐다.
허나 단엽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자신이 있었다. 장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거늘 단엽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름까지 거론되자 자운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단엽이 자신의 이름을 목청 높여 부른 것이다.
모두에게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저 새끼가 다 꼬이게 만드는군.’
챙챙챙!
주변에서는 수많은 무인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고, 격한 전투로 소란스러웠다.
그렇지만 마주한 단엽과 자운, 둘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운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단엽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계속 널 찾아다닌 사람한테.”
“……넌 내뱉어선 안 될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단엽.”
어차피 속일 수 없는 상대다.
그리고 이미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터.
또한 처음부터 이곳 십천야의 비밀 거점에 발을 들인 자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죽음.
모두 죽어서만 이곳을 나갈 수 있었다.
자운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포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드러난 자운의 얼굴.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들 중 일부가 자운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는 무림맹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건 분명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허나 자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 얼굴, 마음껏들 보라고. 어차피 모두 죽이면 그만이니까.”
말과 함께 자운에게서 쏟아져 나온 진득한 살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순간 주변에 있던 무림맹과 마교 무인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였다.
파아앙!
자운과 마주하고 있던 단엽이 자신의 내력을 쏟아 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무림맹과 마교 연합군들의 몸을 옥죄던 살기가 밀려 나갔다.
자운이 차가운 시선으로 단엽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를 마주한 상태에서 단엽이 입을 열었다.
“네가 다른 모두를 죽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죽을 거거든.”
자신을 죽일 거라는 단엽의 말에 자운이 꿈틀했다.
그때 화산파에서 죽여 놓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천무진의 방해로 단엽이 날뛰는 걸 그냥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에도 단엽을 그냥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지금 와서는 더욱 깊게 후회가 됐다.
자운이 뿌드득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단엽.”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해 오는 상대를 향해 단엽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맘이 통한 것 같은데? 나도 그랬거든.”
말과 함께 단엽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고는 단엽이 곧장 말을 이었다.
“덤벼. 박살 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