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우연이 아닌 운명 ― 고마워 (1)
무림맹과 마교의 갑작스러운 마찰.
그리고 그에 따라 서로의 무인들을 호남성으로 출동시킨 사건은 십천야 또한 모를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정보력이 약해졌다고 한들 무림맹과 마교 곳곳에 수많은 간자들을 박아 둔 십천야다.
이렇게 큰 사건에 대한 정보는 금방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십천야 쪽에서는 그 일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그만큼 무림맹이나 마교 쪽에서 이 일을 두 세력 간의 마찰로 꾸몄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호남성을 향해 가고 있는 무림맹과 마교 무인들의 진짜 목적을 아는 이들은 각 세력 내에서도 셋 정도로 국한되었다.
그만큼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니, 이들의 실제 목적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현재 천지광이 천룡혼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 역시 십천야의 무관심에 크게 작용했다.
무림맹이나 마교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그것은 천지광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저 하루빨리 천무진에게서 천룡혼을 받고 과거로 돌아가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천지광이었다.
그렇게 두 세력이 은밀하게 십천야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도 모르고 그저 무방비하게 있던 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정보가 들어왔다.
주란은 자신이 받아 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서둘러 십천야의 모두를 소집시켰다.
말이 소집이지 모인 이들의 숫자는 고작 셋에 불과했다.
천지광과 자운, 그리고 주란 이렇게 말이다.
느닷없는 연락에 자운은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참석했다. 아직 이른 새벽 시간이었기에 갑작스러운 부름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천지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한자리에 모이게끔 연락을 취한 게냐?”
“어르신,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뭐가 말이냐?”
“알고 계실 거예요. 무림맹과 마교가 신월파와 은영곡의 일로 호남에서 흉흉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걸요.”
“며칠 전에 이미 들었던 이야기 아니더냐. 그런데 그게 왜?”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해요. 그 두 세력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어요.”
신월파와 은영곡은 호남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그 두 세력과 관련된 문제로 움직이던 무림맹과 마교가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으니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듯해 보였다.
그 말에 자운이 놀란 듯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내가 듣기로도 무림맹은 분명 신월파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었는데…….”
자운은 화산파에서 장문인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무림맹이 움직이기 무섭게 그것에 대한 정보들을 전달받았다.
그렇지만 자운이 알기로도 그들의 목적지는 호남 남쪽 지역이었다.
의문을 드러내는 자운을 향해 주란이 답했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무림맹의 병력은 기양(祁陽)을 통해 올라오고 있고, 마교는 침주(郴州)를 통해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야. 그리고 그 두 개의 관도가 맞닿는 곳에 위치해 있는 건…… 형산(衡山)이고.”
십천야의 비밀 거점이 자리한 곳은 형산이었고, 두 세력이 움직이는 방향이 교차하는 곳 또한 형산이다.
과연 이걸 어찌 생각해야 할까?
주란의 말에 자운이 고개를 좌우로 번갈아 저었다.
“다소 의아하긴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지금 그 누가 우리 십천야에게 대적하려고 든단 말이야? 이미 그럴 놈들은 모두 죽었다고.”
천운백은 죽었고, 천무진은 십천야였다.
그리고 그나마 십천야라는 존재를 알던 적화신루의 두 사람 또한 이번에 당했고, 설령 살아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무림맹과 마교를 움직일 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십천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 남지 않았고, 위협이 될 존재도 없다고 여겼다.
물론 주란 또한 자운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적어도 무림맹과 마교를 동시에 움직일 힘이 있는 자들이라면 천룡성이 유일한데, 그렇다면…….
주란이 중얼거렸다.
“설마…… 천운백이 살아 있는 거 아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천운백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던 것이 자운이다. 그랬기에 그는 주란의 말에 곧장 거친 목소리로 반박했다.
지금 주란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임무에 실패했다는 의미가 되니까.
그런 그를 향해 주란 또한 목소리를 높여 받아쳤다.
“시체 확인했어? 확인했냐고!”
“거기서 시체를 어떻게 확인해? 뼛조각도 남아 있지 못할 정도로 박살을 냈는데. 궁금하면 어디 너로 실험해 줄까? 시체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너로…….”
말과 함께 자운이 주란을 향해 막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피잉!
휘장 안쪽에서 움직인 손이 뿜어낸 무형의 기운이 자운을 덮쳤다. 동시에 그는 기운을 가슴에 적중당한 채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끄윽.”
자운이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그때였다.
휘리리릭!
순간 항상 휘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던 천지광이 나타났다. 바람처럼 나타난 그의 손이 순간 놀란 듯 눈을 치켜뜨는 자운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을 쥔 천지광은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운이 고통스러운 듯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커, 컥컥! 어, 어르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천지광을 바라본 자운은 움찔했다. 장포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 한쪽에서 끔찍하게 일그러진 피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천지광이 곧장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쾅!
바닥에 내팽개쳐진 자운이 황급히 무릎을 꿇은 채로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흥분하여 어르신 앞에서 결례를 끼쳤습니다.”
“……한가하게 네놈들의 말다툼이나 보자고 모인 것이 아니다, 자운. 알겠느냐?”
천지광이 말과 함께 주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황급히 자운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로 천지광이 입을 열었다.
“우선 너희는 무림맹과 마교의 움직임을…….”
말을 하던 천지광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고, 이내 그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이가 지금처럼 갑자기 나타났다면 천지광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천지광은 나타난 상대를 향해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더냐?”
“어르신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는데…… 상황이 좀 아닌가 봅니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천무진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자운과 주란을 무표정한 눈빛으로 가볍게 내려다봤다. 그 모습에 자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망할 새끼가…….’
굴욕스러웠다.
천지광을 향해 꿇고 있는 이 무릎이 마치 천무진에게도 굴복한 것만 같아서.
천무진이 곧장 말을 이었다.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말과 함께 몸을 돌리려는 천무진을 향해 천지광이 서둘러 소리쳤다.
“아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소리에 천지광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곧장 무릎을 꿇은 상태로 용서를 빌고 있던 자운과 주란에게 말했다.
“냉큼 이곳에서 물러가라!”
천지광의 명령에 주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림맹과 마교가 자신들이 있는 인근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에 대한 방비책을 세워야 할 때라 생각했거늘 천지광은 자신들에게 물러가라 명했다.
이것에 대해 다시금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주란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운과 함께 천지광의 집무실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있는 천지광을 향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멀리서 들리는 바로는 무림맹과 마교를 언급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별일 아니다. 그냥 무림맹과 마교가 서로의 일 때문에 인근으로 오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호들갑들을 떤 게지.”
천무진에게 굳이 이런저런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해 줄 필요가 없는 천지광이었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이내 천지광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긴히 할 말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물어 오는 질문, 천무진이 아주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손으로 자신의 단전 윗부분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천룡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더냐?”
“예, 방금 전에 마침내 천룡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걸 느끼고 어르신께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셨으니까요.”
천무진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천지광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대는 천지광,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이 넘게 바라 왔던 바가 이루어지려는 순간이 아닌가.
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다.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던 천지광이 말했다.
“그럼 곧바로 천룡혼을 내게 주면 되겠구나.”
천무진에게 생긴 천룡혼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이후 시작될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천지광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런데…….
천무진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은 무립니다.”
“뭐?”
“천룡혼이 아직 완전히 피어오르지 못했습니다. 저도 여태 경험해 보지 못해 몰랐는데, 천룡혼은 생겨나고 완성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얼마나 말이냐?”
“지금 이 정도 속도로 늘어난다면 완성까지는…… 삼 일이 걸릴 겁니다.”
“삼 일이나 말이냐?”
대답을 하는 천지광의 목소리에서는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삼십 년이 넘게 참아 왔던 그다.
그렇게 긴 시간을 버텼으면서 삼 일을 더 기다리는 것이 이토록 초조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천지광이 평소답지 않게 초조한 속내를 대놓고 드러냈다.
“시간을 더 당길 수는 없겠느냐?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좋다.”
그의 물음에 천무진이 곧바로 답했다.
“무리입니다. 이건 자연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몸 안으로 축적되면서 피어오르는 힘인지라 운기조식을 하든 뭘 하든 똑같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끄응, 그러하더냐?”
아쉬움이 잔뜩 묻어 나왔지만 천무진의 말을 들어 보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닌 듯싶었다.
그저 지금으로선 막연하게 그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결국 그렇게 삼 일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천지광은 그제야 괜히 천무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고생했구나.”
“……천룡혼을 받으시고 제게 하신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지. 네가 날 위해 이리도 고생을 해 주었거늘 내가 어찌 그 약속들을 잊겠느냐. 이번 생과 다음 생, 네 인생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마. 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약속도 마찬가지고.”
어린 시절 천무진이 십천야에 들어오며 걸었던 약속과 정신이 돌아온 이후 새로이 했던 약속까지.
그 모든 걸 들어주겠다며 천지광은 거짓말을 던졌다.
이미 약속을 어기고 천무진 주변의 모두를 죽이려 했으면서 말이다.
그걸 알기에 천무진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정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자신을 속이려 드는 이 천지광이라는 자에게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천무진 또한 어차피 지금은 이 장단에 맞춰 속아 주는 척을 해야만 하는 상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천무진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잠깐 물러나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밤새 연무장에 있었더니 조금 지쳐서 말입니다.”
“그래, 어서 돌아가 쉬면서 몸 관리도 좀 하고.”
“예, 어르신.”
말을 마친 천무진이 포권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렇게 천무진이 나간 직후였다.
방에 혼자 남은 천지광이 내부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삼 일이라.’
무림맹과 마교의 미심쩍은 움직임.
이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나마 고민을 했던 천지광이었다. 하지만 천무진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천지광은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삼 일이라면 그 두 세력이 정말로 십천야의 비밀 거점을 노리고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감춰져 있는 이곳을 찾아내기엔 너무도 모자란 시간이다.
비밀 거점은 진법에 감춰져 있고, 그것을 외부에서 파훼하기 위해서는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될 테니까.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지금 가진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천지광에겐 굳이 이곳에서 다른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지겨운 이번 삶의 마지막까지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건가 싶어 다소 짜증이 치밀었던 상황에, 이토록 딱 맞아떨어지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천지광은 오히려 유쾌해졌다.
마치 자신의 미래가 이처럼 쭉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무슨 연유로 무림맹과 마교가 이곳으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래도 하늘은 나의 편인 듯싶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천지광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웃음소리에 거처를 벗어나 걸어가던 천무진이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뒤편으로 슬쩍 시선을 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음껏 웃어 둬.’
이제…… 지금처럼 웃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